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13화 (413/463)

413화

“멈춰라!”

당원영이 엄하게 외쳤다.

그의 손엔 이미 여덟 자루의 비수가 들려 있었다.

여인을 발견한 당원영이나 당중걸 뿐만이 아니었다.

모닥불 주위에 서 있던 은영대는 고함이 터진 순간 일제히 돌아서며, 비수를 발출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라면 여인의 모습에 현혹됐을지도 모른다.

아리따운 미모와 곳곳이 찢겨나간 옷가지.

파들거리는 입술은 애처롭기만 했다.

허나 은영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평생토록 강호를 주유하며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건 노인과 여인, 아이와 같은 노약자라는걸.

어설픈 동정심과 연민이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간다.

은영대는 방심하지 않고 여인을 멈춰 세웠다.

“이 야심한 시각에 젊은 처자 혼자 돌아다닌다……. 본가 외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말이지.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오?”

당원영과 달리 당중걸은 예의를 지켰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날카롭게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 맞아요. 산에서 피습을 당해 동료들을 잃었어요. 저희 일행도 강한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적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놈들은 그 뒤에 저에게….”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사실이냐는 것.

당중걸이 됐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무인이오?”

여인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당중걸의 눈이 미세하게나마 풀어졌다.

그녀가 나타났을 때부터 내공의 흔적을 느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여인은 고수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일대일로 붙는다면 쉽게 제압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고강한 무인이다.

‘무공을 익힌 걸 숨기지 않고, 악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심지어 무공 수위는 내게 버금가는 여인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호기심이 치솟았다.

“거리를 두는 걸 이해하리라 믿소. 우리의 임무가 그것이라서.”

“이해해요. 이해하고말고요.”

여인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의 무인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게 또 한번 은영대의 경계심을 녹였다.

“소저의 존함을 물어도 되겠소?”

여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유람. 친구들은 천녀신투라고 불러요. 어떤 사람들은….”

차유람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툭 뱉었다.

“색광신투라고도 하더군요.”

은영대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색광신투. 그 별호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당원영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중원 칠대 기인?!”

이 순간만큼은 산전수전 다 겪은 은영대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접어놓은 기억을 펼치자, 차유람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들었던 바와 일치합니다. 키와 외모는 그녀가 맞아요.」

「조장. 내가 초상화를 본 적이 있소. 점 위치까지 똑같아.」

「경공에 있어 천하제일을 다투는 대가…….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적들을 떼어놓은 게 이해가 가. 그녀라면 가능하지.」

전음이 쇄도했다.

당중걸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참 어린 후배지만, 차유람이라면 강한 게 당연하다.

뭐가 됐든 무공 분야에 있어 천하제일에 가깝단 소리를 듣는다면 다른 부분도 평범할 리 없으니까.

‘비슷하다고 느꼈던 건 내공이 소진되어서인가?’

은영대의 경계심이 급격히 누그러졌다.

창고가 털린 악덕 부호들은 이를 갈지만, 차유람은 백성들에게 의적이라 칭송 받는 여걸이었다.

방법에는 문제가 있더라도 결과만 놓고 보면 그녀는 정파에 가까웠다.

당중걸의 지시에 고분고분히 따르는 것도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크게 낮추었다.

“음…….”

당중걸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뗐다.

“들어 보니 소저께서 색광… 커흠! 천녀신투 본인 같다는 의견이 많구려. 허나.”

외모는 얼마든지 비슷하게 꾸밀 수 있다.

난데없는 별호에 놀랐지만, 당중걸은 빠르게 평정을 찾았다.

“그것만으로 그대의 신상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 것이오.”

“물론이에요. 저는 안전만 확보할 수 있으면 돼요. 패악한 놈들이지만, 설마 당가까지 쫓아오진 않겠죠. 다가가지 않을게요. 여기 머물러도 되죠?”

절박함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어조.

은영대를 안심시킨 결정적인 말이었다.

차유람은 티가 나지 않도록 은영대를 살폈다.

그 결과, 후방에 있는 무인이 슬그머니 팔을 내리는 게 보였다.

효시든 폭죽이든 무언가를 쏘아 올려 비상사태를 알리는 자이리라.

차유람이 속으로 웃었다.

‘됐어!’

별호로 놀라게 하고, 고분고분한 태도로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그 결과 이변을 알리는 신호를 한 박자 늦출 수 있었다.

그래도 보고가 올라가겠지만…….

‘충분해. 그전에 끊어낸다!’

은영대는 천망발도진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문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다.

여기까지 접근했다면 충분하다.

차유람이 머리를 굴릴 때, 당중걸이 물었다.

“일행이 해를 입은 건 안타깝구려. 마음이 편치 않겠지만, 적들에 대해 물어도 되겠소?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그대와 같은 여걸을 패퇴시킨 것이오?”

당중걸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은영대의 이목도 차유람에게 쏠렸다.

모두가 그녀를 쳐다볼 때, 기다리던 자들이 도착했다.

“드디어 찾았다! 여기 있었군!”

어딘가 어색한 말투였다.

산만 한 덩치와 훤칠한 키를 지닌 사내 두 명.

차유람에게 향했던 눈길이 정체불명의 거한들에게 돌아갔다.

그 순간, 차유람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와족. 요사이 중원에선 그들을 야수족이라 부르더군요.”

“뭣이라?!”

쾌애애액―!

은영대가 깜짝 놀랄 때, 돌풍이 솟구쳤다.

지형에 녹아든 채 모닥불을 우회한 최정예.

마른 비, 노을, 그믐, 어스름과 검은 수리 전사들.

그들은 은영대가 낌새를 채기도 전에 심장을 꿰뚫었다.

“커헉…!”

“기, 기습이다! 적들이…!”

고함이 터졌을 때, 쓰러진 숫자는 이미 스물에 달했다.

당가의 방패라 일컬어지는 전대의 노고수들이 손쓸 틈도 없이 쓰러진 것이다.

“정말이다! 이놈들, 남만 야수족이야!”

“이, 이럴 수가! 수왕?!”

차유람의 뒤에서 나타난 건 산과 안개걸음이었다.

그들까지 가세하자, 은영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수를 던질 시간도, 독을 뿌릴 틈도 없다.

살아남은 은영대가 황급히 거리를 벌렸지만, 와족 전사들이 그들을 놔둘 리 없었다.

퍼억! 우두둑! 스가각―!

모닥불이 비추는 피는 소름이 끼치도록 붉었다.

삼십에 달하는 당가의 최정예가 무기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전멸했다.

“색광신투! 네 이년! 네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우릴…!”

당중걸이 비통하게 외쳤다.

차유람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구명지은. 수왕 님 덕분에 지하에서 살아나왔거든. 그리고 당신들이 누굴 욕할 처지는 아니잖아? 죽였으면, 죽어야지.”

“……!”

무슨 말인지 모를 리 없다.

당중걸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당원영의 말이었다.

‘원영의 말이 맞았다…. 가주를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어!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본가가 피에 잠기겠구나!’

하얀 수투를 낀 노인.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엄습해왔다.

손가락을 구부려 모은 수공.

당중걸의 생애 마지막 기억은 그믐이 출수한 올빼미 사냥이었다.

퍼어억!

와족의 수장들이 은영대를 정리했을 때, 마른 비는 차유람과 성문에 도달해 있었다.

“으, 은영대 어르신들이…!”

“적습이다! 적들이 침입했다!”

성벽 위에 있는 놈들은 은영대에 비해 한참이나 수준이 떨어졌다.

그들은 현역으로 뛰는 무인이지만, 아직 무르익지 않은 청년들이었다.

진법의 요충지에 서 있던 그들이 곧바로 폭죽을 터뜨렸다.

허나 당황하는 게 뻔히 보였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차유람이 복면을 도로 쓰며 외쳤다.

“수왕 님! 저한테 붙어요!”

차유람은 눈을 빛내며 성벽 아래로 진입했고, 그녀의 뒤엔 마른 비가 따라붙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이곳이 진정한 승부처였으니까.

우우웅―

불쾌한 구동음.

폭풍이 불어 닥친 건 직후였다.

쾌애애애액―!

손톱만큼의 빈틈도 허용치 않는 비수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보는 것만으로 기가 질릴 그것은 기계장치로 구현한 만천화우나 다름없다.

기세 좋게 달려가던 차유람의 눈이 커졌다.

그 순간, 하얀 철벽이 그녀를 둘러쌌다.

투카카카캉!

쇠붙이들이 모조리 부러져 나갔다.

비막(臂膜).

예전에는 피부에 자연기를 주입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다.

차유람에게 밀착한 마른 비는 양팔을 휘둘렀고, 백열갑의 강도는 비수 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괜찮아. 날 믿고 전진해.”

든든한 음성이 들리자, 차유람의 눈이 몽롱해졌다.

“와아……. 미치겠네! 수왕 님. 나 진심으로 껴안고 싶은데요?”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라니.

진시황릉에서도 느꼈지만, 차유람은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지 마, 누나. 노을이가 당장이라도 죽이려고 달려올걸?”

마른 비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차유람은 입을 헤 벌리더니 제 볼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아깝네.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먼저 꼬시는 건데!”

헛소리와 달리 그녀의 손은 재빨랐다.

성문까지 이르는 좌측 벽을 주르륵 훑으며 달려간다.

철제 도구가 닿을 때마다 벽 사이사이에서 ‘철컥, 철컥!’ 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성문에 가까워질수록 거세지는 저항!

마른 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누나! 잠깐만!”

성문을 몇 걸음 남겨놨을 때, 마른 비가 처음으로 주춤했다.

“왜? 안 될 것 같아요?!”

차유람은 폭풍의 눈 속에서 안전하게 해체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녀를 보호하는 마른 비는 결코 쉽지 않았다.

원 기마대의 강궁에 버금가는 관통력.

비수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마른 비의 뒤편으로 박살 나고 깨진 쇠붙이가 작은 둔덕을 이뤘다.

“아냐! 막을 수 있어. 전진해!”

마른 비가 자연기를 끌어올리며 외쳤다.

차유람이 이를 꽉 깨물더니 바쁘게 손을 놀렸다.

철커덕! 차칵! 그그긍―!

“다 왔어요! 조금만 더…!”

이제야 깨달은 것인데, 그녀도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기관을 해체하는 건 작은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하물며 진법이 가미된 것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쪽은 끝이야! 이제 우측 벽만 훑으면 돼요!”

‘헉! 이 짓을 또 해야 한다고?’

헛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하지만 돌아나가는 것이니 한결 수월하리라.

마른 비가 방향을 트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구우우웅― 두쿵!

“흡…!”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

진법이라더니 기관을 구동하고 연결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천망(天網).

그 안에 든 자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수식처럼 보이지 않는 그물이 마른 비를 옥좼다.

야수 제어에 걸린 자들의 심정이 이럴까?

가중되는 압력에 마른 비의 허리가 굽었다.

“으, 으윽…!”

비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도 힘이라면 사람을 압살하여 육포로 만들고도 남는다.

등에 육중한 바위가 얹힌 것처럼 무릎이 꺾였다.

몸이 휘청하는 순간, 비막을 펼치던 양팔이 궤도를 이탈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수가 틈새를 파고들었다.

“아악…!”

핏물과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누나! 괜찮아?!”

휘청했던 차유람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고개를 들자, 찢긴 복면 사이로 긴 혈선이 보였다.

자칫하면 죽을 뻔한 상황.

천만다행이지만, 여인의 얼굴이 상한 건 중상이나 다름없는 치명타였다.

“미안해! 갑자기 압력이 가해져서 그만…!”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 순간만큼은 마른 비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유람은 의연했다.

“별거 아냐! 안 죽었으면 됐어! 정신 똑바로 차려! 수왕이 이런 곳에서 무너질 거야?!”

어느새 그녀는 말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그걸 인식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마른 비는 자책하며 이를 깨물었다.

‘오만이었어. 최선을 다해도 모자를 판에 힘을 아끼다니! 지금 발동한다!’

천망발도진의 핵이라더니 과연 그럴 만하다.

이 정도 방어를 갖추어 놓았으니 당천기가 황성 침공에 응했던 거였다.

설령 무칼리가 이끄는 기마대가 마교 대신 당가를 쳤더라도, 주원장이 북진할 동안 버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무칼리가 기겁하여 회군할 때까지.

키이이잉―!

눈을 꾹 감았다 뜨자, 마른 비의 육신에서 형형색색의 무늬가 번쩍였다.

여울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시킨 전투화장.

얼굴을 넘어 온몸에 그려진 그것은 전신화장이라 불려야 마땅했다.

『오오오오!』

전투함성을 터뜨리자, 대자연의 기운이 진법의 힘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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