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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14화 (414/463)

414화

“큭! 으아아아!”

마른 비가 어깨에 힘을 주자, 그의 허리가 점점 펴졌다.

와족 비전, 전투화장.

여울의 손을 거치며 한 단계 진화한 술법이 수왕의 육신에 무한한 힘을 불어 넣었다.

투둑, 투드득―.

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여들던 무형의 그물이 성기게 풀어헤쳐졌다.

“하아압!”

누가 믿을까.

당가 전체를 감쌀 정도의 대규모 진법.

그 압력을 홀로 견디는 남자가 있다는걸.

“누나! 숙여!”

차유람이 허리를 굽히자, 마른 비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러곤 교룡갑을 발동하며 발을 뻗었다.

투카아아앙―!

성문을 일격에 날려버린 마른 비가 방향을 틀었다.

“헤헤……. 어쩌다 보니 품에 안겼네? 소원 성취!”

얼굴이 피로 물든 차유람이 배시시 웃었다.

상처가, 그리고 마음이 안 아플 리 없건만.

연인이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둘만큼 경우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가 이러는 건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이리라.

“미안해, 누나. 상처는 꼭 없애줄게. 여울이가 할 수 있어.”

차유람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쁘게 웃었다.

“뭐야! 진작 말할 것이지! 시집가긴 글렀다 싶어서 낙담했잖아!”

이 순간에도 비수는 마른 비의 전신을 두드리고 있었다.

전투화장을 두른 교룡갑이라도 맨몸으로 버티는 건 무리가 간다.

무엇보다 차유람이 움직일 공간을 확보해야만 했다.

“합!”

비막을 재발동하자, 고요한 폭풍의 눈이 형성됐다.

“됐어, 누나! 해체해!”

차유람이 무섭게 집중하며 번개처럼 손을 놀렸다.

철컥, 철컥, 철커덕―!

성벽 틈새에 숨은 기관의 연결부가 낱낱이 끊겨 나갔다.

마른 비는 출입구 좌측에 쌓아놓은 비수의 산을 또 한번 만들어냈다.

치킥, 차칵! 철컥―!

자물쇠가 열리는 듯한 음향.

차유람의 철제 도구가 통로 끝을 찍었을 때, 일대가 진동했다.

드드드드―

사물과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와 함께 어깨를 짓누르던 압력이 걷혔다.

끝을 모르고 퍼붓던 비수가 뚝 그쳤다.

“허억, 헉…!”

통로를 빠져나온 두 사람이 털썩 주저앉았다.

둘에겐 영겁과도 같은 순간이었지만, 실제론 숨 몇 번 들이켤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댕, 댕, 대앵―!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는 침입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왁자지껄한 외침이 성문 너머에서 들리고,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어둠이 잠식한 밤, 당가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됐어! 성공이야…!”

육중한 압력을 뿜어내던 성문이 완전히 침묵했다.

계획대로 당가가 훼방을 놓기 전에 기관진식을 해체한 것이다.

병력이 진입할 침투로를 열었으며, 그건 퇴로가 확보된 걸 의미했다.

“대단해! 고생했어!”

노을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뒤엔 돌격 준비를 마친 와족 전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후우……. 저도 같이 가요. 마을도 안심할 수 없어. 방금 또 다른 경계망이 발동됐어요.”

차유람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녀는 통로를 빠져나온 순간부터 당가의 내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법은 별거 없어. 바람이 원활히 흐르도록 하는 종류……. 저걸 왜 설치해 놓은 거지?”

차유람은 슬쩍 보는 것만으로 마을 내부에 깔린 진식을 파악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응?”

마을을 훑던 차유람이 뭔가를 발견했다.

무소의 뿔로 만든 듯한 원통형 관이 집집마다 설치돼 있었다.

가옥 내부에서 무언가를 바깥으로 배출하기 위한 용도.

크기나 휘어짐으로 보건대 고체나 액체를 위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기체인데…….”

먼저 떠오른 건 밥 짓는 연기였다.

하지만 굴뚝이 따로 있는데 굳이 저런 걸 설치한다고?

관의 용도를 알아챈 건 차유람보다 마른 비가 빨랐다.

“독이네. 비수와 함께 당가를 대표하는 물건이잖아. 하독을 위한 관 같은데?”

“아…!”

튼튼하게 지은 가옥 내부에서 거리에 독무를 흩뿌린다.

그러면 마을에 설치된 진이 바람을 흐르게 하고, 독을 순환시켜 침입자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마을 전체를 독무에 잠기게 하는 진법.

당가이기에 가능한 방어술이었다.

“이건 너무하잖아! 이러면 진입할 수가 없는데…!”

차유람은 울상이 됐다.

고생 끝에 난관을 돌파했는데, 마을 전체를 독에 잠기게 하는 무식한 덫이 기다릴 줄이야.

지들이야 해독환(解毒環)을 삼킬 테니 멀쩡하겠지.

마을에 퍼진 독은 적이 전멸하고 나서 유유히 해독 작업을 하면 그만이다.

무식하기 짝이 없지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방어법이었다.

당가의 불행은 적이 와족이라는 점이었다.

“독이라고?”

산이 귀를 쫑긋 세우며 끼어들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뱉었다.

“그럼 뭐가 걱정이야? 그냥 가면 되지.”

차유람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중원의 사정에 어두운 모양이신데, 당가의 독은 일절이라 불릴 만해요. 야생의 뱀 따위와 비교하시면….”

그때, 마른 비가 차유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생했어, 누나. 아무 걱정하지 마. 여기부턴 우리가 맡을게.”

마른 비가 반려수 부대의 선두에 선 별비를 돌아봤다.

“별비야. 누나를 도와서 퇴로를 지켜. 독무가 깔려서 반려수들은 여기에 남는 게 좋겠어.”

검을 입에 문 별비가 늠름하게 대꾸했다.

〔걱정 마라. 다가오는 놈들은 모조리 베어버릴 테니. 성벽 위도 우리가 정리하마.〕

‘쟤는 언제까지 저럴 셈이지?’

마른 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몸을 날렸다.

노을이 마른 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외쳤다.

“적의 심장부로 간다! 목표는 중앙에 있는 거대한 집! 앞을 막는 놈들은 전부 죽여!”

“오오오! 알겠습니다, 족장님!”

와족 전사들이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집집마다 설치된 원통에서 오색빛깔의 연기가 흘러나왔다.

짐작대로 당가가 준비한 건 독이었다.

“아, 안 돼…….”

당가의 독술을 잘 아는 차유람은 안절부절못했다.

마른 비가 진시황릉에서 독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걸 보았지만, 내공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라도 설마 와족 전체가 면역에 가까운 내독성을 지녔다는 걸 상상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당가도 마찬가지였다.

파바박―!

자갈이 튀고, 모래먼지가 인다.

백 명에 이르는 와족 전사들이 사람 한 명 없는 길을 내달렸다.

무혈 돌파.

와족을 상대로 독을 꺼낸 시점에서 당가의 패배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

놀라 자지러질 것 같은 반응들이 일었다.

길 좌우에 밀집한 가옥에서 당가의 식솔들이 허둥대는 게 보이는 듯했다.

본래라면 시체의 산을 쌓았을 함정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맙소사…! 전부 다 만독불침이라고?!”

차유람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비아야! 가주전은 성문 못지않은 기관진식이 도사리고 있어! 무작정 진입하면 안 돼!」

차유람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마른 비는 불야성 같은 휘황찬란한 전각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그러면?』

「진시황릉에서 선보인 무공! 뢰창이라고 했나? 그걸 가주전 꼭대기에 날려! 거기가 기관의 핵이야!」

본래라면 가깝게 붙어야 진체를 파악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당건휘는 고맙게도 불을 밝혀서 기관의 실체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성문이 뚫리고, 차유람 같은 기관 해체의 달인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오 층 전각의 꼭대기.

외벽에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그곳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벌컥 열었다.

“아니? 이게 무슨…!”

당건휘는 보았다.

가주전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야생의 전사들을.

마른 비도 보았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수의 얼굴을.

『저길 날려버리면 된다는 거지? 좋아. 접수됐어.』

마른 비가 우뚝 서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한 손엔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기를.

다른 한 손엔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를.

뢰창? 그 정도로 끝내기엔 서운하다.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최강의 비기.

서리불꽃이 당가 한복판에서 파멸적인 위용을 드러냈다.

“안 돼! 수왕이 무언가를 준비한다! 막아라!”

가주전 근처에 서 있던 녹수대가 기겁하여 달려왔다.

그들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고, 마른 비를 향해 던졌다.

향낭을 연상케 하는 주머니.

당건휘가 와족과의 일전을 대비해 준비한 물품이었다.

“막앗! 비아를 엄호해!”

노을의 외침과 함께 와족 전사들이 몸을 날렸다.

그들이 인의 장벽을 친 순간, 주머니가 독무에 녹으며 분말이 공기 중에 퍼졌다.

녹수대주가 비수를 꺼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야만인 놈들을 끝장 낼 준비를 해라!”

사 년 전, 마른 비가 방문했을 때의 일을 당건휘는 잊지 않았다.

그는 당운석과 당영령에 이어 손을 썼고, 마른 비를 잠시 혼몽 상태에 빠뜨렸다.

당가가 자랑하는 절독은 먹히지 않았지만, 이로운 성분을 추출한 몽혼약(曚昏藥)이 통하는 걸 확인한 것이다.

적색분지 대회전에서 화통달의 마비산이 가설을 증명해주었다.

마비산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당건휘는 와족을 잠재울 몽혼약을 직접 제조했다.

“운남에 시선을 묶어두고, 본가를 치러 오다니! 우리가 우습게 보였더냐!”

녹수대가 이를 드러내며 살기를 뿜었다.

그들이 달려들려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발밑을 파고들었다.

“한 번 뼈저린 경험을 했다. 같은 게 통할 것 같으냐?”

와족 일절, 올빼미 사냥.

노장의 수격이 밤공기를 갈랐다.

섬전 같은 연격이 녹수대의 몸통을 꿰뚫었다.

경악하는 적들에게 노을이 말했다.

“들이마시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까짓 것 숨 참으면 그만이지.”

후아아악―!

독무를 뚫고, 와족 전사들이 들이닥쳤다.

녹수대는 이름처럼 독술이 전문이지, 비수에 특화된 자들이 아니었다.

하물며 거리를 내준 상황.

근접 백병전에 접어든 순간, 힘의 우위가 극명하게 갈렸다.

“크아아악!”

“아악…!”

은비대와 원로원이 빠진 상황에서 와족을 건드린 대가는 컸다.

녹수대는 차 한 잔 들이켤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수장들이 총집결한 와족 전사단은 당가를 대표하는 무력집단 중 하나를 앞마당 눈 쓸듯 치워버렸다.

그그그긍.

그사이, 희대의 절기가 출격 준비를 마쳤다.

가주전을 밝힌 불빛보다도 눈부신 광휘.

전신화장으로 끌어낸 수왕의 잠력이 광구에 담겼다.

콰우우우웅―!

빛기둥이 밤하늘을 갈랐다.

서리불꽃이 가주전에 접근한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광파(光波)를 가로막았다.

우지직―!

가주전을 보호하는 무형의 방벽.

그것은 최상승의 진법이었으나, 근거리에서 발출한 서리불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투콰아아앙―!

수왕의 맹격이 당가의 심장을 날려버렸다.

가주전 오 층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맹렬한 기운을 내뿜던 진법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기관이 헝클어지는 소리와 함께 들릴락 말락 하던 구동음이 뚝 꺼졌다.

“거기냐!”

마른 비는 놓치지 않았다.

창문에서 검은 그림자가 뛰어내리는 걸.

번갯불을 시전하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흐헙…!”

죽도록 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원수!

마른 비의 눈동자에 당건휘의 기겁한 얼굴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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