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이놈! 네가 감히 본가에 쳐들어와?!”
실성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따위 말을 뱉을 순 없다.
당건휘가 핏발 선 눈으로 마른 비를 노려봤다.
“전부 너희 때문이다! 네놈들 때문에 내 금광이…!”
미친 게 확실하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뭐라고 지껄이는 것인가.
“그 눈빛…!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오냐! 내 직접 네놈의 멱을 따주마! 파촉객잔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마른 비가 당건휘를 마주 노려봤다.
“누가 할 소리를. 최후의 발버둥이라도 쳐 봐. 당가의 가주가 될 자격이 있는지 내가 시험해줄 테니.”
“으아아아! 죽어라! 야만인 놈아!”
당건휘가 허공에서 광인처럼 손을 뿌렸다.
시릴 듯한 예기가 비수에 깃든다.
구천현녀(九天玄女).
서왕모의 오른팔이자 영웅들의 수호신이라는 전설 속 여신이다.
궁지에 몰린 황제나 영웅에게 투술을 전수해준 전투신.
그녀의 이름을 딴 기예는 만천화우와 더불어 당가 최강의 암기술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휘리리릭―!
날카롭게 회전하는 은빛 기둥이 마른 비에게 쇄도했다.
예상과 다른 형태에 마른 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비수가 일렬로?’
먹이를 포착한 새처럼 날아오는 비수.
거기엔 천공(天空)을 꿰뚫을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방어하기엔 어렵지 않은 궤도다.
백열갑을 앞으로 내밀 때, 당건휘의 외침이 터졌다.
“차아앗!”
코앞까지 다가온 비수들이 일제히 산개했다.
맹렬하게 휘도는 암기들은 하늘을 아홉 방향으로 나눈 구천의 방위를 따르고 있었다.
중앙의 균천(鈞天).
동서남북의 창(蒼), 호(昊), 염(炎), 현천(玄天).
나머지 방위인 양(陽), 주(朱), 변(變), 유천(幽天)이 그것이다.
당가는 ‘가장 높은 하늘’과 ‘하늘의 아홉 방위’를 가리키는 구천의 중의(重義)를 하나의 기예에 담았다.
“까불지 마!”
마른 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가 됐든 물러날쏘냐!
백열갑을 두른 양팔이 눈부시게 회전했다.
비막의 방어력을 전면에만 집중시킨 한 수에는 농익은 회전의 묘가 담겨 있었다.
투카카카캉―!
귀청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홉 줄기 비수의 행렬이 새하얀 방벽 앞에 모조리 가로막혔다.
백열갑을 장착한 마른 비의 방어는 완전무결이란 단어가 떠오를 만큼 완벽했다.
“그럴 줄 알았다! 이놈!”
허나, 당건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징그러운 미소가 번뜩인 순간, 비수가 의지를 지닌 생물처럼 살아 움직였다.
“엇?!”
마른 비가 깜짝 놀라며 주춤했다.
비수의 일부가 백열갑의 표면을 타고 올랐기 때문이다.
등천겸(登天鎌).
네 자루의 낫을 붙여놓은 모양의 소형 암기다.
적중하는 순간, 수레바퀴처럼 전진하며 피부를 갈가리 찢어놓는 병기.
한번 물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 그것은 당가 철장들의 혼이 담긴 역작이었다.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대다수의 암기는 부서지고 박살 났지만, 백열갑에 안착한 등천겸은 무서운 속도로 팔뚝을 기어올랐다.
불똥을 튀기고, 날이 깨지면서도 상박(上膊)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그것들은 집요한 생물처럼 보였다.
“후하하! 죽어라! 야만인 놈아!”
당건휘가 광소를 터뜨렸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해서 요인에게만 지급되는 등천겸은 당가 암기술의 살상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병기였다.
“쪼개지 마.”
병기의 우월함이라면 양보할 생각이 없다.
마른 비가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울부짖어. 칼이빨.”
흉포한 기운이 몸부림쳤다.
백열갑에 깃든 야수의 힘이 수왕의 부름에 응답하자, 포효가 가주전을 뒤흔들었다.
〔크아아앙!〕
또렷이 유형화한 충격파!
고대 맹수의 기운이 하잘것없는 쇠붙이들을 깡그리 날려버렸다.
“이, 이럴 수가…!”
그게 유언이냐?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죽어라.
“판결해줄게. 넌 가주의 그릇이 아냐.”
와족 정권, 바위 부수기.
화염기가 실린 백열(白熱)의 권격이 하늘을 불살랐다.
“네 이노…!”
미친놈처럼 고함을 지르던 당건휘는 말도 마치지 못하고 머리통이 날아가 버렸다.
화르르륵―!
몸통에 옮겨붙은 불이 당건휘의 육신을 불태웠다.
그는 화장을 위한 뼛가루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가주님…!”
동문, 서문, 남문.
기관을 해체한 북문 일대를 제외하면 삼 방은 멀쩡했다.
그리고 거기엔 예외 없이 삼십 명씩의 은영대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이 달려왔지만, 와족은 전격적인 기습으로 당가의 머리를 날려 버리는 데 성공했다.
“왜 그랬냐고 물을 필요도 없어. 공지량도, 너도 말을 섞을 가치도 없는 놈들이야.”
그것이 당건휘란 인물에 대한 마른 비의 평이었다.
마른 비가 숨을 고를 때, 비통한 외침이 터졌다.
“당가의 식솔들이여! 퇴로를 막아라! 우리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을 살려 보내지 마라!”
예순이 넘은 노인이 눈물을 흘렸다.
기나긴 오욕의 세월을 넘어 되찾은 명성.
어긋나고 모자랐더라도 당건휘는 세가의 가주였다.
수장을 잃은 은영대주가 돌격 명령을 내렸다.
콰릉, 우지직―!
가주전이 서리불꽃의 후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어둠을 밝히던 등롱들이 와르르 쏟아지며 목재에 불을 붙였다.
당가의 자랑이던 가주전이 거대한 모닥불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노을아. 먼저 가.”
결사항전?
그럴 이유가 없다.
적의 머리를 쳤고, 당가의 상징을 부쉈다.
전사 한 명이 귀중한 이때, 포위된 채 싸우는 건 미련한 짓이다.
덤비는 놈들을 놔둘 생각은 없지만, 불리한 전장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노을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북쪽을 돌파한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 반려수와 합류한 뒤에 적들을 섬멸한다!』
노을이 선두에 서자, 산과 안개걸음이 양익을 맡았다.
어스름까지 그녀의 뒤를 받치자 강력한 쐐기진이 완성됐다.
“흠. 북쪽은 정예가 없구나. 선두는 아이들만으로 충분하겠어.”
그믐이 마른 비에게 다가왔다.
부족의 삼 대를 아우르는 노장이 수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와족 최강의 전력인 두 사람은 구십 명의 은영대가 내뿜는 기세에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솜씨가 많이 늘었더구나. 아주 제법이야. 늙은이와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내기할까?”
“무리하지 마, 할아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오래오래 사세요. 그래야 떡두꺼비 같은 손주도 안겨 드리지.”
두 사람은 적진 한복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웠다.
자신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실력에.
믿는 것이다.
등을 맡길 전우를.
그건 보기에는 좋지만, 서글픈 광경이었다.
전쟁을 겪기 전이라면 살인을 앞두고 농을 주고받진 못했을 테니까.
마른 비도, 그믐도 사 년 전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싸움에 취하지 말거라. 우리의 임무는 전사들을 무사히 대피시키는 것이야. 방어에만 집중하자꾸나.”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잔소리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믐의 조언이 기꺼웠다.
힘의 고하를 떠나, 그믐은 생존해 있는 전사들 중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알 수 없는 힘이 샘솟는다.
마른 비는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걱정 마. 할아범. 나도 이젠 강해졌어. 아마 할아범보다 내가 더 많이 싸워봤을걸?”
“예끼, 이 녀석. 삼십 년은 멀었다. 주먹 뼈가 닳은 후에나 그런 소릴 하거라.”
여유로운 말과 달리 둘의 행동은 민첩했다.
전사들의 후방에 바짝 붙으며, 날아오는 비수를 모조리 쳐낸다.
비막과 올빼미 사냥이 그려낸 방벽은 절대 뚫리지 않을 철옹성과 같았다.
“놓치지 마라! 비수를 계속 퍼부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간다!”
은영대주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가옥에서 쏟아져 나온 무인들이 앞을 막았지만, 와족의 돌진을 늦추진 못했다.
주력 전투 집단에 편성되지도 못한 무인들로는 희생만 늘릴 뿐이었다.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당가와 똘똘 뭉쳐서 전진하는 와족의 전사들.
차유람은 넋을 놓은 채 그 모든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다.
“정말… 대단해…!”
가주전이 타오르고, 비수에 반사된 화광(火光)이 어둠을 불살랐다.
마른 비와 그믐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암기를 전부 차단하고 있었다.
짙게 내리깔린 독무 위로 피 안개가 번진다.
와족의 돌격은 화염지옥을 꿰뚫는 투창처럼 보였다.
“멈추지 마요! 계속 달려!”
차유람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
와족이 어느새 성문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노을은 의아했으나 차유람을 믿고 멈추지 않았다.
“성문을 나가는 대로 좌우로 나뉘어요! 그리고 성벽에 바짝 붙어! 비아와 어르신도 서둘러요!”
“……?”
비수를 쳐내던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렸다.
반려수들이 보이지 않는다.
정신을 집중하니 성벽 바깥에서 야수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마른 비는 차유람이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걸 깨닫고 지시를 따랐다.
“놈들이 도망친다! 쫓아라! 지금쯤이면 청성에 변고가 전해졌을 것이야!”
성도 남서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아미산과 달리, 청성산은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청성도 가깝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미에 비하면 지원 병력이 당도할 시점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그렇듯이 청성파도 첩보조를 운용할 테고, 지금쯤이면 야수족의 습격을 눈치챘으리라.
“북쪽으로 몰아라! 청성파가 분명히 호응할 게야! 사천에 접어든 이상 놈들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근거 있는 판단이었다.
공지량과 협잡을 벌였다는 의심을 받는다 해도 위기를 맞은 이상 도울 수밖에 없다.
은영대주를 필두로 구십 명의 전대 고수들과,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전부 따라붙었다.
수백 명이 진형을 짜니 만만치 않은 기세가 전해졌다.
당가가 성문에 접근했을 때, 마른 비와 그믐까지 빠져나간 통로에서 여인의 팔이 튀어나왔다.
끼리릭― 철컥.
신경을 건드리는 기계음.
은영대주의 눈이 커졌다.
투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요동치고, 성벽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와족은 기겁을 하며 외벽에 몸을 기댔다.
“뭐, 뭐야?”
산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
성문 너머에선 한 올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충천했던 적의 기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숨결조차 끊긴 완전한 침묵.
와족 전사들이 하나둘 통로로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
성벽 너머엔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걸레 조각이 된 인간의 육신이 핏물에 잠겼다.
뒤에 남은 차유람이 준비한 것.
그녀는 끊어졌던 기관을 연결하여 망루의 기능만을 복구해냈다.
와족을 쫓는 당가를 저지하기 위해서.
한 번만 손을 놀리면 망루에 저장된 비수가 쏟아지도록.
결과는 토악질이 나도록 참혹했다.
“몰살… 인가?”
산이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댔다.
설명을 들었지만 이 정도 파괴력을 지녔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게 아군을 향했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통로 너머에는 피와 살덩이만이 존재했다.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요…….”
차유람이 피에 절은 복면을 끌어올렸다.
그러곤 눈을 꾹 감으며 얼굴을 묻었다.
마치 너무나 죄스러워 복면 뒤에 숨는 것처럼.
그녀는 마른 비를 돕기 위해 왔지만, 설마 자신의 손으로 대량살상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직접 손을 쓴 게 아니라서 그럴까?
원수를 갚은 건 기쁘지만, 개운치가 않다.
뼛속까지 전사인 와족으로서는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좋게 생각해. 이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중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늘어났을 거야.”
상황을 추스른 건 노을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전사들을 둘러봤다.
“잊지 마. 우리는 목숨을 걸고 복수에 나섰다는걸. 죽이지 않으면….”
노을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죽는 거야.”
마른 비가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중원에서 많은 사람을 봤어. 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특히 우리 같은 이민족에게는.”
직책이 없을 뿐 마른 비는 이미 족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입을 주목했다.
“마음 독하게 먹어. 당가를 멸했으니 이제부터 온 천하가 적으로 돌아설 거야. 우린 백 명이지만, 적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어.”
마른 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싸울 수 있는 전사는 우리뿐이야. 부족의 미래가 우리 손에 달렸어. 원수를 갚고, 운남에 침입한 놈들을 쓸어버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