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16화 (416/463)

416화

‘다시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의 말을 들었다.

“바라던 바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아. 덤비면, 죽일 뿐.”

안개걸음이 경갑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산도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까닥였다.

“어디 봐요.”

전사들이 투지를 불태울 때, 여울은 차유람에게 다가갔다.

눈물과 피에 젖은 복면을 벗기자, 비수가 긁고 지나간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창상(創傷)은 코뼈의 일부분을 부숴놓기까지 했다.

여차하면 평생 복면을 쓰고 살아야 할 치명상이었다.

“맙소사! 이렇게 다치고도 가만있던 거예요?!”

여울이 경악하자, 차유람이 손을 내저었다.

“전투 중이었는걸요.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이까짓 게 뭐 대수라고….”

말과 달리, 그녀의 눈은 간절했다.

마른 비의 말이 사실이기를.

눈앞에 있는 오묘한 분위기의 여인이 흉터를 없애주기를.

차유람의 심정을 눈치챈 여울이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 말아요. 제가 고칠 수 있어요. 족장님이 성년식을 마치고 나타났을 때 어땠는 줄 알아요?”

여울은 담담히 말했다.

흰 수리의 발톱에 찢긴 흉터와 동창(凍瘡)으로 인한 손상.

온몸에 징그러운 상처를 달고 나타난 노을의 이야기를.

연녹색 은은한 기운을 상처에 깃들이면서.

차유람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열여덟 살에 영수를 길들였다고?! 그래서 저토록 강하구나!’

차유람이 빙옥을 깎아 만든 듯한 흰 수리를 올려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칼바람은 뭘 보냐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차유람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서 이번엔 노을을 힐끔거렸다.

‘칠룡이나 사호는 비교도 안 돼. 구파의 장문인에 버금가는 무력! 스물 초반의 나이에 어떻게…!’

온 천하를 뒤져도 찾기 힘든 여걸.

노을을 관찰한 차유람의 결론이었다.

우락부락한 전사들을 통솔하는 그녀는 중원에서 본 어떤 여인보다 빛났다.

마른 비와 나란히 서 있어도 바래지 않는 존재감.

두 사람은 하늘이 내린 배필처럼 보였다.

‘정말 잘 어울리네!’

차유람의 입꼬리가 올라갈 때였다.

여울이 그녀의 어깨를 탁탁치며 일어섰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쉽게 이길 수 있었어요. 모두를 대신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울은 고개를 숙이더니 보기 좋게 웃었다.

“그럼 전 비아를 회복시켜야 해서 이만.”

차유람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곤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

“어, 어엇?!”

광대뼈가 갈릴 정도로 패였던 상처가 원래대로 복구됐다.

지혈산을 뿌려도 그치지 않던 피가 멎었다.

깨진 코뼈가 수복되고, 새살이 돋아났다.

직접 경험하고도 믿을 수 없는 기사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한 세대에 딱 한 명에게만 허락된 술력.

여울은 지금껏 그녀가 본 어떤 술사보다도 뛰어났다.

‘대체 이 사람들은…!’

한 명 한 명이 범상치 않다.

전사단을 이끄는 수장들도 대단하지만, 마른 비와 함께 쐐기진의 후방을 담당했던 노인은 십좌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을 압도하는 수왕.

차유람은 와족을 적으로 마주친다는 상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들이라면… 해낼 거야. 중원 전체가 몰려와도 이 사람들이 꺾이는 건 상상할 수가 없어!’

차유람이 감탄을 연발할 때였다.

밤하늘 저편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까악, 까아악―!”

‘……갈까마귀?’

날아온 방향은 북서쪽.

와족의 반려수로 보이는 녀석이 쏜살같이 하강했다.

갈까마귀는 지면이 가까워지자 부드럽게 선회했고, 나무 표범 전사의 어깨에 안착했다.

“까아악! 깍―!”

갈까마귀가 부리를 놀리는 걸 빤히 지켜보던 사내가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비아야. 너와 족장님의 예상이 맞았다. 청성파가 이쪽으로 대규모 병력을 급파했어.”

마른 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곧바로 움직이자. 이제부턴 흔적을 남기지 말고 이동해야 해.”

마른 비가 여울과 함께 별비의 등에 올라탔다.

목적지까지 달리는 동안 치유의 술로 소진된 기운을 회복할 생각이었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차유람을 돌아봤다.

“고마워. 누나.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을게.”

차유람이 어깨를 으쓱하며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뭐래? 네가 은혜를 왜 갚아? 구명지은에 대한 보은이야. 이걸로 퉁쳐!”

왕문이 그랬듯이, 차유람은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정파의 세력들에게 쫓기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빠져야 했다.

차유람이 복면을 덮어쓰며 말했다.

“힘내, 비아야.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고. 전쟁이 끝나면 마을에 초대해줘.”

차유람이 마른 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엔 걱정보다는 신뢰가 가득했다.

* * *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

황하(黃河)강 남쪽의 대평원에 위치한 이곳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다.

수, 당 시대에 이르러 강남 개발이 진척되며 물자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원 시대에도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무림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개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파가 있었으니, 바로 십만의 방도를 거느린 개방이었다.

“쿨룩, 쿨룩.”

개방의 총타(總舵)는 무언가 있을 거란 기대와 달리 볼품없었다.

그 흔한 전각도, 방파라면 필수적으로 보유하는 네모반듯한 연무장도 없다.

비바람만 대충 피할 법한 천막에서 기침 소리가 울렸다.

“방주님. 괜찮으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후개였다.

그리고 기침을 터뜨리는 건 육십을 훌쩍 넘긴 듯한 노인이었다.

후개는 정중한 태도로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눈빛에선 걱정과 염려가 묻어났다.

“쿨룩, 쿨럭…!”

피를 토할 듯이 기침을 하던 노인이 눈을 들었다.

병마에 시달리며 정기가 쇠했지만, 여전히 강건한 눈빛.

십만 개방을 이끄는 용두방주(龍頭幫主) 규화신개가 후개에게 물었다.

“후우……. 어찌 되었느냐?”

앞뒤가 생략된 물음이었다.

하지만 후개는 스승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짐작했다.

“여전하네요. 총타를 정도맹의 무인들이 둘러싸고 있어요. 백호대주(白虎隊主)가 직접 경계를 서네요.”

평온한 말투지만, 규화신개는 느낄 수 있었다.

후개가 짙게 분노하고 있다는 걸.

그건 규화신개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본방을 핍박하다니……. 맹주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규화신개는 몇 마디 내뱉지 못하고 기침을 토했다.

후개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방주께서 편찮으시니 이럴 수 있는 거네요. 정사대전을 거치며 맹주의 영향력도 커졌고요. 분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네요. 건강을 회복하는 데만 신경 쓰셔요.”

운남에 침투한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후개는 상황을 알아볼 수도, 복수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백호대가 총타를 점거한 채 전서를 일일이 검열했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

전시인 걸 빌미로 맹주령을 들고 온 백호대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늘어놨다.

‘개방이 불온한 세력들과 내통한다는 소문이 있소. 정의개 구칠이 마교의 첩자였다지? 게다가 소속이 불분명한 수왕을 도왔다던데…… 사실이오?’

무슨 개소리냐고 소리칠 뻔했다.

아닌 걸 알면서도 그 두 가지를 그렇게 엮은 저의가 뭐냐고.

진심으로 본방을 의심할 리는 없을 텐데, 뭐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당분간 개방에 당도하는 서찰은 맹의 검열을 받을 것이오.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마찬가지. 나도 이러긴 싫소, 후개. 허나 혐의를 벗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소.’

할 말을 끝낸 백호대주는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정도맹 소속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면상을 후려쳤을 것이다.

둘 다 맹주 직속이지만, 창룡대주와는 전혀 다른 위인.

후개는 백호대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신만이 아니야. 사람의 출입까지 제한하는 완전한 봉쇄.’

백호대의 무인들은 총타를 넓게 둘러쌌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오갈 수 없도록 검문을 펼쳤다.

충돌을 각오하면 나갈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간 덤터기를 쓸 판이다.

개방이 할 수 있는 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백호대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쿨룩, 쿨룩. 운남이 시끄럽다지? 맹주가 노리는 건 금광이겠구나.”

규화신개의 말이 후개를 상념에서 건져 올렸다.

후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네요. 군사회의에서 부결됐지만, 맹주는 사도련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창룡검대를 파견했어요. 그리고 어떻게든 병력을 파병할 거네요. 방법은 모르지만….”

후개가 운남을 계속 살필 수 있었다면 대번에 판세를 읽어 냈으리라.

하지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로는 맹주의 노림수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규화신개는 후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더냐? 수왕이란 청년은?”

후개가 그건 왜 묻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쁘지 않네요. 순수하고 믿을 만해요. 허나 사람 속은 알 수가 없으니…. 게다가 불안한 측면이 있네요.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폭주한 적이….”

“순수하고 믿을 만하다라…….”

규화신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가뭄에 콩 나듯이 나오는 긍정적인 평이구나.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상당히 괜찮은 모양이지?”

“흥. 그 정도는 아니네요.”

“아니긴 뭘 아니야. 뼛속까지 인간 불신에 휩싸인 놈이.”

후개가 발끈하려는 찰나, 규화신개가 선수를 쳤다.

“괜찮다면, 잡아라. 네가 개방을 이끌 시기에는 원의 치세와는 비교도 안 될 혼란이 닥칠 것이야. 믿을 만한 자들을 가리고, 너의 사람으로 만들어라.”

분위기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후개가 가만히 있자, 규화신개가 툭 뱉었다.

“되도 않는 이상한 말투나 쓰지 말고. 무공도 전수받았겠다, 후개의 자리도 굳혔겠다,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지 않느냐?”

규화신개가 끄응,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일어나시면 안 되는데? 의원이 안정을 취하라고…!”

후개가 말렸으나, 규화신개는 냉수 들이켜듯 탕약을 비웠다.

그러곤 천막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쿨럭…! 망할 하얀 고양이 놈들은 사부가 치워주마. 출타할 준비를 하거라. 내 직접 맹주에게 가서 따질 것이야.”

일세를 풍미한 거인이 기세를 일으켰다.

천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백호대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후개라면 몰라도, 용두방주가 나서면 백호대주 따위가 앞길을 막을 순 없다.

개방이 손발을 묶은 포승줄을 끊으려는 순간, 전서를 담당하는 걸개가 뛰어왔다.

“후, 후개 님! 방금 사천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수왕이 당가를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뭐라고?!”

후개의 동공이 흔들렸다.

“맙소사…….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 무식한 인간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이러면 정파 전체가 적으로 돌아설 텐데…!”

적색분지 대회전에 대해선 들었지만, 지금 사천 무림을 건드리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운남에 들어선 자들만으로도 벅찰 텐데 적을 늘리다니…….

“……방주님. 서두르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후개의 말투는 변해 있었다.

* * *

고립무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군도 없고, 정보를 얻을 수도 없다.

심지어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기습으로 당가를 박살 냈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할 게 훤했다.

고작 백 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냐고 비웃겠지.

청성파가 나선 이상 상황은 종료될 거라고 여길 것이다.

‘두고 봐.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

동녘 하늘에서 여명이 밝아온다.

청성산이 빛에 물들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마른 비가 청성파 장문전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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