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17화 (417/463)

417화

“커헉…!”

“크아악!”

“마, 막을 수가 없어…!”

사천성 성도(成都)의 북서쪽, 관현(灌縣)의 남서쪽에 위치한 청성산.

무당산, 용호산과 더불어 도교의 삼대 성지인 그곳이 핏물에 잠겼다.

“후욱, 훅….”

여명을 등지고, 마른 비가 거칠어진 숨결을 골랐다.

그의 뒤에선 와족의 전사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른편에는 노을이, 왼편에는 그믐이.

하나로 똘똘 뭉친 전사들이 가공할 기세를 뿜어냈다.

그들의 병기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자, 장문인…! 피하… 시오!”

상체의 절반이 날아간 노인이 절규했다.

청성파의 대장로, 청허진인이었다.

노검객은 숨을 할딱대다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적이 침입했는데 왜 경보가 울리질 않은 거지?!’

청허진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당가를 돕기 위해 주력 검대를 파견했고, 그 바람에 산이 텅 비었다.

만약을 대비해 경계에 심혈을 기울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장로들이 직접 제자들을 이끌고 요처마다 포진했으며, 이변을 알릴 수 있도록 호각을 지급했다.

한데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야수족이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심처 중의 심처라고 할 수 있는 상청궁(上淸宮) 앞마당에 말이다.

기가 막힌 건 비명은 물론이고 호각 한 번 울리질 않았다는 것.

청허진인은 자파의 제자들이 손도 못 쓰고 무너졌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경계조가 넓게 퍼져 있어서 수월했어. 한데 뭉쳐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올라오진 못했을 거야.’

마른 비가 지나온 길을 힐끗 돌아봤다.

청성파의 치명적인 실책은 병력을 분산시킨 것이었다.

그들은 산 전체를 방어하려 했고, 적의 침입을 포착하기 위해 병력을 넓게 퍼뜨렸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적절한 대비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양자 간의 무력 차이가 이토록 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와족이 정면 돌파가 아닌 암습을 감행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마른 비, 노을, 그믐, 어스름과 검은 수리 고위 전사들.

수장들이 암습으로 길을 뚫고, 전사들이 뒤를 따랐다.

경계조마다 장로급 내지는 대주급의 무인이 껴 있음에도 적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청성파가 침입을 눈치챘을 때, 와족은 산문에서부터 상청궁까지를 한달음에 돌파한 뒤였다.

삐이익― 삑! 삐이익―!

호각이 울리고, 산에 퍼져 있던 무인들이 달려왔다.

허나 와족은 압도적인 힘으로 피의 돌파를 이뤄냈다.

진형도 갖추지 못한 채 허겁지겁 달려온 자들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뿐이었다.

“야, 야수족?! 어떻게 여기에…! 청풍각과 본파의 제자들을 따돌렸단 말인가?!”

사천무림은 와족을 눈뜬장님이라 여겼다.

하지만 와족은 빠르고 은밀하며,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시야를 지닌 ‘눈’을 보유하고 있었다.

날짐승들.

어둔 날개와 칼바람을 필두로 하는 반려수들이 청성파에서 당가에 이르는 길을 감시한 것이다.

숫자가 적을 뿐, 한정된 영역을 살피는 데 있어 날짐승을 능가할 존재는 없었다.

결국 와족은 청성의 주력 검대를 따돌리고, 빈집털이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놈들! 멈춰라! 여기가 어디라고…!”

심지어 와족은 힘을 합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적이 나타나자, 수장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요격한 것이다.

장문인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대장로가 일 합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허를 찌르는 기습.

청성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장문전에 이르는 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안… 돼! 맞서서는… 안 되오, 장문인! 도저히 승… 산이 없…!”

그 말을 끝으로 청허진인은 고개를 떨궜다.

찬란한 일출이 한 시대를 풍미한 검객의 육신을 쓰다듬었다.

대장로의 눈을 감긴 햇살은 곧이어 새파란 검광과 만났다.

청옥상천검.

청성파를 상징하는 신물을 지닌 자는 한 명밖에 있을 수 없었다.

“사형…!”

백 년, 아니, 천 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아버지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자.

마른 비가 장문전을 박차고 나온 원수를 노려봤다.

청운진인이 마른 비를 보더니 흠칫했다.

“그 얼굴…! 게다가 ‘그’를 쏙 빼닮은 기질이라니! 그렇군. 자네가 그의 아들인가…….”

청운진인이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러곤 잠시 후에 눈을 뜨더니 떨리는 눈동자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약관쯤 돼 보이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군.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부친을 능가하겠어. 그대가 수왕이겠군….”

“더러운 입에 아버지를 담지 마!”

마른 비가 호통을 쳤다.

청운진인은 고통스런 표정이었다.

분노와 비통함보다는 회한이 휘몰아친다.

악인에게 놀아나 원한의 늪에 발을 담갔다는 사실이 한스럽다.

청운진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녹아내린 눈물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죽일 때는 거리낌이 없더니……. 제 식구는 귀한가 봐? 울지 마. 당신은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어.”

청운진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마른 비의 비난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모습이었다.

말없이 서 있던 노인이 허리를 숙였다.

진심이 담긴 사죄.

고개를 든 청운진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와 그대의 식구들을 보니 확신이 드는군. ‘그’도 그랬지. 한 점 티 없이 맑고 깨끗했어. 정파라 자부해온 스스로를 돌아볼 만큼…….”

마른 비를 마주한 순간부터, 청운진인의 눈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닌, 슬픔과 자조가 깃든 눈빛.

노인이 또 한번 고개를 숙였다.

“비극을 막지 못한 점, 마음을 다해 사죄드리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잘못이었어…….”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으려는 태도.

오히려 그 모습이 마른 비의 화를 돋웠다.

사람을 죽여놓고 사과하는 꼴이니 말이다.

마른 비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시끄러워. 무슨 소릴 지껄이든 넌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그러니까 검을 들어. 최선을 다해서 발버둥 치란 말이야!”

맑고 투명한 느낌.

자연기는 노인이 좋은 사람임을 알려주었다.

허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성품이 어떻건 간에 그는 찢어 죽여도 모자랄 원수일 뿐이었다.

청운진인도 살아남을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앞으로 불어 닥칠 피바람을 최소화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산에 남은 건 여물지 않은 아이들이라오. 지난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이지. 내 목숨을 거두는 대신 그들에겐 자비를 베풀어주시게.”

청운진인이 청옥상천검을 지면에 꽂았다.

저항하지 않겠다는 의사였다.

마른 비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가 잠자코 있는 덕분에 청운진인은 와족 전사들을 하나하나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정녕 놀랍구나! 이들은… 선대 전사들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다! 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기에 서른도 안 된 젊은이들이 이토록 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청운진인은 경악했다.

주력 검대 없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눈앞에 있는 자들을 꺾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있다 해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병력에서는 앞서나, 고수의 질에서 밀리는 상황.

청운진인은 어스름과 산, 안개걸음을 보면서 놀랐고, 노을과 그믐에 이르렀을 때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마른 비.

믿기지 않지만, 수왕의 힘은 구파 장문인의 무위를 상회하고 있었다.

청운진인은 와족의 수장들을 뜯어볼수록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저항을 포기한 그에게 마른 비가 말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 웃기지 마. 너흰 그렇게 했어? 만약 너희가 멈췄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마른 비가 주먹을 들어서 청운진인을 겨눴다.

“검을 들어. 그리고 싸워. 숨이 끊길 때까지. 이제 와서 후회하는 척하지 말고.”

마른 비가 재촉했지만, 청운진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긴가민가했지만, 마른 비를 보고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와족은 피해자일 뿐이며, 모든 원인이 공지량에게 있다는 언급.

너른 하늘의 그 말이 사실이었다는걸.

정도맹의 맹약에 따라 파병했지만, 청운진인은 당가를 돕기 위해 지원 병력을 보낸 것도 후회하고 있었다.

“싸우지 않겠소. 피에는 피를. 강호의 불문율이 아닌가. 그대의 식구들을 해한 대가는 피로 갚을 수 있을 뿐이오. 부디 이 늙은이의 목숨을 가져가고, 아이들만은 살려주시게.”

청운진인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청성의 제자들은 장문령(掌門令)을 받들라! 오늘을 끝으로 우린 야수족과의 원한 관계를 청산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나서지 말 것이며, 복수를 꿈꾸지 마라! 명을 어기는 자, 파문에 처할 것이다!”

지엄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청운진인조차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그를 향한 제자들의 존경과 충심이었다.

근처에 있던 제자가 외쳤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눈 뜨고 장문인을 잃느니 차라리 파문을 당하겠습니다!”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검을 뽑은 제자가 몸을 날렸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장문인을 지켜라!”

“침입자들을 몰아내고 사문을 수호하라!”

“청성은 패하지 않는다!”

상대의 힘을 가늠할 능력도 없는 풋내기들이었다.

투지는 좋았으나, 현실의 벽은 높고도 높았다.

“아, 안 된다! 재엽! 물러나라!”

청운진인이 외치기 무섭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실낱같은 생존 가능성을 스스로 차버리는군. 봐줄 필요 없다. 반격하라.”

같은 상황에서 노을은 인내했다.

너른 하늘의 뜻을 알기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며 분루를 삼켰다.

그렇게 후일을 기약하고, 식구들을 살렸다.

하지만 청성의 제자들은 장문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촤악! 우드득! 퍼억―! 으직!

상대도 되지 않는다.

청성의 제자들은 날아오르기 무섭게 추락하며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피가 튀고, 육신이 갈렸다.

와족 전사들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살육을 행했다.

연민을 느끼기에는 그들의 가슴에 쌓인 분노와 한이 너무도 컸다.

“멈추시게! 패배를 인정하고 목숨을 내준다 했거늘! 상대도 되지 않는 아이들을 꼭 죽여야만 하는가!”

청운진인이 눈물을 흩뿌리며 검을 잡았다.

장문인 같은 검사가 되겠다며 천진난만하게 웃던 제자들의 얼굴이 스친다.

허나 소중한 이들을 잃은 건 와족이 먼저였다.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 꼭 우리가 악인 같잖아.”

살인이 유쾌할 리 없다.

당건휘의 숨통을 끊을 땐 후련했지만, 이들을 죽이는 건 그렇지 않다.

하지만 복수의 칼을 뽑은 이상, 마른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잘 가.”

그 말이 신호였다.

독수리 사냥이 검날을 걷어내고, 올빼미 사냥이 어깨를 꿰뚫었다.

바위 부수기가 몸통을 분쇄하자,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크윽…! 부탁이오. 아, 아이들은…!”

그것이 청운진인의 유언이 됐다.

하지만 덤벼든 자들은 고혼이 된 지 오래였다.

일 할이나 될까?

살아남은 건 겁에 질렸거나, 장문인의 심중을 헤아린 몇몇뿐이었다.

겁쟁이들은 도망가고, 인내하는 자들은 제자리에서 서서 와족을 노려봤다.

“빌어먹을. 심란하게 하는구만.”

산이 욕을 뱉으며 생존자들을 바라봤다.

당가와는 다르다.

이들을 죽이는 건 후련하기는커녕 입맛이 썼다.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청운진인이 공지량, 당건휘와는 근본부터 다른 사람이라는걸.

그때 그믐이 조용히 입술을 뗐다.

“덤비지 않는 놈들은 놔주는 게 어떻겠느냐? 방금 죽은 이자……. 우리가 살아 있는 건 이 노인 덕분이다.”

“……?”

의아해하는 전사들에게, 그믐은 말했다.

청운진인이 적색분지에서 청년 전사들을 놔주었다고.

짐작건대 당가의 추격을 저지한 것 또한 청운진인과 금정신니일 거라고.

“우리와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이들은 주력이 살아 있지만, 후대가 몰살했어.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정황으로 보건대 청성 또한 자신들처럼 휘말렸을 뿐이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청년들은 청성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믐 또한 그 마음을 이해했다.

“늙은이의 조언은 참고만 하거라. 은원의 무게를 분명히 하고자 노력했지만, 그건 내가 살아온 방식일 뿐이야. 공지량의 경우를 보면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겠지. 이젠 너희의 시대다. 너희끼리 의논하여 결정하거라.”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마른 비와 노을을 바라봤다.

고심에 잠겼던 둘이 입술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장문전 아래, 상청궁 부근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이것! 본대가 벌써…!”

본산을 침공당한 청성파가 복귀했다.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기운! 아미파까지!”

중간에서 만났는지, 아미의 병력까지 합류하여 장문전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비아야! 족장님! 어떻게 할 겁니까?!”

와족 전사들의 눈길이 마른 비와 노을에게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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