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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18화 (418/463)

418화

“당황할 것 없어. 예상했던 바야.”

마른 비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와족 전사들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노을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괜찮겠어? 솔직히 너무 위험해 보여.”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사천 침공에서 가장 큰 난관이 될 거라 예상했던 건 당가였다.

성벽은 물론이고 기관진식으로 도배를 해놓은 탓에 이기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볼 거라고 추측했었다.

하지만 차유람 덕분에 한 명도 잃지 않고 당가를 무너뜨렸다.

그 뒤는 수월했다.

뼈대 굵은 무파의 자존심 때문인지 구파일방은 기관진식을 애용하지 않는다.

그만큼 무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지만, 청성은 중견고수들을 정사대전에 파견했고, 주력 검대는 와족과 길이 엇갈렸다.

원로원이 본산에 남아 있었으나, 그들은 각개격파 당했다.

마치 하늘이 도운 것처럼 모든 상황이 와족에게 유리하게 흐른 것이다.

“너무 순조로워서 도리어 걱정돼. 비아 널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적이 너무 많잖아.”

노을의 염려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지금부터 하려는 건 위험천만한 추격전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른 비는 웃었다.

“걱정 마, 노을아. 장담하는데, 나보다 추격전에 능숙한 사람은 드물걸?”

이유 있는 자신감이다.

열다섯 살에 설지굉과 설검대의 추격을 뿌리쳤으며, 강소성에선 마교의 정예를 따돌렸다.

중원 전체를 통틀어 경공이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비마를 격살한 전적도 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북벌이었다.

말인지 황소인지 헷갈릴 정도로 거대한 전투마.

그 위에 올라탄 원의 기병.

참마도와 장창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기마대에게 쫓기는 건 직접 겪어본 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압박이다.

그 모든 걸 이겨낸 지금, 마른 비는 어떤 추격도 뿌리칠 자신이 있었다.

“잠깐만. 숫자와 기운을 확인하고.”

마른 비가 기감을 확장하여 산을 오르는 적들을 가늠했다.

곧 그의 얼굴엔 미소가 어렸다.

“확실해. 이 작전, 성공할 수 있어.”

아직 일반 전사들에겐 차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노을이 가면서 알려주겠다며 전사들을 독촉했다.

모두가 발길을 떼는 가운데, 그믐이 마른 비에게 다가왔다.

“대충 이야기를 들었다만, 혼자는 위험하다. 같이 움직이자꾸나.”

“나랑 간다고? 할아범 없이 괜찮을까?”

마른 비가 청년 전사들을 돌아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서로 걱정하고 난리구먼. 에베베다, 이 녀석아.”

“에, 에베? 그게 뭐야, 할아범!”

마른 비가 얼굴을 붉혔다.

그믐은 산을 내려가는 노을을 힐끗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노을이는 강하다. 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지. 산과 걸음이, 어스름까지 뒤를 받치면 녀석들은 완전체나 다름없어.”

기술의 정교함을 힘과 속도가 보좌한다.

거기에 허를 찌르는 암습이 더해지니, 넷이 힘을 합치면 실로 무적에 가까웠다.

심지어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의 전사들.

실제 대련에서 그믐은 이십 수도 버티지 못하고 패할 수밖에 없었다.

“별비까지 붙여주지 않았느냐. 저쪽의 전력은 충분하다. 위험한 건 우리야.”

그믐이 천천히 몸을 풀 때였다.

기다리던 적이 마침내 당도했다.

“대, 대장로님…!”

비통한 외침이 줄을 이었다.

“재엽 사제! 운일 사제!”

“어떻게, 어떻게 이런…!”

절규가 정점을 찍은 건 가슴이 꿰뚫린 청운진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였다.

“장문이이인!!!”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청풍각주 염상.

그는 청운진인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으아아아! 어찌 이런…!”

한순간의 엇갈림으로 모든 걸 잃었다.

염상 역시 공지량과 당건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마음 무거운 나날을 보내왔다.

그리고 혐의가 확실해지면 어떻게든 지난 일을 바로잡고자 했다.

하지만….

“다 죽여 버리겠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장문인께선 너희를 살려 보냈거늘! 맹주의 압박도 밀어내며, 지난 일을 바로잡으려고…!”

막상 하늘 같은 장문인이 살해된 걸 보자, 죄책감은 머리에서 지워졌다.

염상이 검을 쥐며 일어섰다.

그에게는 마른 비가 도망치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게 끔찍한 조롱처럼 보였다.

“아파?”

마른 비가 물었다.

염상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이놈이 그걸 말이라고…! 죽여 버릴 것이다! 뼛조각도 남기지 않고 갈가리 찢어버릴…!”

“나도 아팠어.”

말문을 틀어막는 한마디였다.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치던 염상이 멈칫댔다.

“적색분지에서 아버지를 잃었거든. 우린 가족이 죽는 걸 지켜봐야 했어. 너희의 칼이 우리의 식구를 죽였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염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눈만 파르르 떨었다.

참상에 눈이 뒤집혔지만,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그건….”

입술을 뗐지만, 금세 도로 닫았다.

무슨 말을 하든 변명일 뿐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으며, 먼저 칼에 피를 묻힌 건 자신들이었다.

마른 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본 순간, 염상은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아프겠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이성이 송두리째 날아갈 정도로. 그래… 아플 거야.”

소중한 사람을 실제로 잃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머리로는 아프겠다 짐작하지만, 가슴으로 와 닿는 건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 잃는 것과 잃었을 때를 상상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사문의 식구들을 잃고 나서야 염상은 와족의 심정이 어떨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우, 우린….”

염상이 입술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먼저 잃은 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럴 리 없지만, 검을 쥔 손에서 피가 묻어나오는 듯했다.

“복수 여부는 너희가 판단해. 우리도 그럴 테니까.”

‘복수…!’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사고가 또 다른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와족이 그랬듯이, 청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후 관계가 어찌 됐든 식구들은 살해당했으며, 원수가 지금 눈앞에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가요, 할아범.”

‘……가? 간다니? 어딜 간단 말이냐?’

염상의 반응은 느렸다.

순수하게 분노하는 제자들과 달리, 그는 청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입장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하산하기 전, 청운진인의 당부도 있었다.

당가를 지원하되, 살생을 최대한 피하라는.

어렵겠지만, 야수족과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라는.

식구들이 살해당한 충격과 지휘자로서의 입장이 염상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를 일깨운 건 청성의 제자들이었다.

“각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원수들이 멀어집니다! 속히 공격 명령을…!”

염상을 현실로 끌어당긴 건 청성의 제자들이었지만, 그를 움직이게 한 건 아미파였다.

“사, 사매! 수왕이 향하는 방향이…!”

남쪽.

마른 비와 그믐이 향한 건 남쪽이었다.

가만히 보니 먼저 움직인 전사들 또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거기엔….

“맙소사! 야수족이 본산을 향합니다! 저리로 똑바로 내려가면 아미산이라고요!”

이 상황에서도 복수를 완성할 생각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아미산을 향해 남하할 리 없었다.

청성의 참사를 보고 넋이 나갔던 아미파가 기겁을 했다.

그들 또한 주력을 내보낸 건 마찬가지였고, 본산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맞닥뜨릴 거라 생각했지만, 와족은 아미파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청성을 무너뜨렸다.

“쫓아라! 본산이 위험하다!”

청풍각이 그랬듯이, 복호전의 무인들 또한 금정신니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다.

와족과 더 이상 척을 질 일은 피하라는.

하지만 청성산이 피에 잠긴 걸 보자, 아미파 무인들은 장문인의 당부를 잊었다.

“전력으로 따라붙어라! 피를 보아도 상관없어! 절대 놓쳐선 안 돼!”

복호전주.

젊은 시절, 복호대라검으로 무명을 날린 용연사태가 외쳤다.

아미 일절, 등천능운십팔식(騰天凌雲十八式)이 여승들의 몸을 띄웠다.

유려하게 흐르는 경공은 구름을 앞지를 듯 경쾌했으나, 와족의 주법 또한 못지않았다.

깃털 날리기와 구름 걷기가 마른 비와 그믐의 신형을 쭉쭉 잡아당겼다.

“각주님!”

청성 무인들의 외침에, 염상이 이를 깨물었다.

“……쫓아라. 아미까지 피에 잠기는 건 막아야 한다.”

그때, 청운진인의 유언을 듣고 자리를 지켰던 젊은 제자가 말했다.

“각주님. 장문인께선….”

“그만! 알고 있다. 장문인께서 어떤 말씀을 남기셨을지 잘 알고 있어…….”

원한과 도리의 경계.

수장을 잃은 제자와, 정도를 지켜야 할 무인으로서의 갈등이다.

하지만 청운진인의 참혹한 시신이 염상으로 하여금 검을 들게 했다.

“아미를 돕는다는 명분. 마지막 기회다. 장문인의 명을 어기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끝이야.”

이번에 잡지 못하면, 깨끗이 손을 뗀다.

그리고 청운진인의 유언대로 원한을 청산한다.

그게 염상이 그은 선이었다.

“죽기 살기로 따라붙어라! 원수들을 절대 놓치지 마!”

그것이 이 순간, 인간으로서의 솔직한 심정이리라.

필생의 공력을 끌어올린 염상이 땅을 박찼다.

그의 손엔 청운진인이 놓쳤던 청옥상천검이 들려 있었다.

오백 명에 가까운 구파의 정예들이 와족의 뒤를 쫓았다.

해가 동쪽 하늘을 비추는 가운데, 새하얀 검광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쐐액― 쾌액! 쐐애액―!

바람이 일고, 풀잎이 휘날린다.

얼굴을 때리는 풍압에 눈을 뜨기도 힘들다.

뒤를 돌아보자, 살을 에는 살기가 산사태처럼 밀려왔다.

다급함과 원한이 버무려진 기세는 마른 비를 긴장하게 만들 정도였다.

‘필사적이야!’

당연하다.

한쪽은 사문을 지켜야 할 입장이며, 또 한쪽은 식구들이 방금 살해당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 아미와 청성은 산이라도 밀어버릴 기세였다.

‘점창보다 막강해!’

그 또한 당연한 일이다.

마른 비는 몰랐지만, 구파에도 엄연한 힘의 우위가 존재했다.

북숭소림(北崇少林), 남존무당(南尊武當).

구파의 절대 강자로 거론되는 소림과 무당은 정파를 떠받치는 양대 산맥이나 다름없다.

그 뒤를 바짝 추격하는 게 화산과 곤륜이며, 청성과 아미의 힘 또한 그 둘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점창은 종남, 해남과 더불어 구파에선 약체에 속했다.

이강사중삼약(二強四中三弱).

실제로 싸워본 적이 없고, 원의 치세를 거치며 많은 게 변했겠지만, 그간 축적된 평은 그랬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것 외에, 공지량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병력을 끌어모은 또 하나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할아범!』

구파 간의 우열?

관심도 없을뿐더러, 알았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저들을 적으로 맞닥뜨렸다는 사실뿐.

마른 비의 언령이 터지고, 그믐이 몸을 돌렸다.

수왕과 노장이 반전하자, 아미와 청성의 무인들이 흠칫했다.

그들은 곧 마른 비의 의도를 눈치채고 불같이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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