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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19화 (419/463)

419화

“이놈들이 설마…!”

왜 함께 가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수왕의 힘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야수족은 당가와 청성을 부수며 그들의 힘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건 전략이 통했고, 그들이 똘똘 뭉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제아무리 수왕이라 해도 구파의 둘을 홀로 막겠다는 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마른 비는 눈빛으로 너희를 저지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시간을 벌겠다는 속셈인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청성과 아미가 분노한 이유였다.

함께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혼자서 오백 명을 막고, 나머지를 보내서 아미를 친다?

와족이 노리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아미파 장문인 금정신니의 목.

청운진인을 살해했듯 아미의 수장을 노리고 남하하는 것이다.

“오만이 하늘에 닿았구나! 떨거지들로 장문인을 해하려 들다니!”

용연사태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은원과 복수를 논하기에 앞서 금정신니가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 또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이름 좀 알려졌다고 스물 초반의 풋내기가 홀로 앞을 막아?!’

그때까지, 용연사태의 눈엔 그믐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믐은 그 사실을 눈치챘다.

“허허허……. 나도 요란하게 중원행이라도 할 걸 그랬나? 이거 영 자존심이 상하는구나.”

운남에선 전설이라 일컬어지는 그믐이다.

하지만 중원인들은 그를 방구석에서 손주의 재롱을 감상하는 촌로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기분 나빠서 안 되겠군. 비아 넌 여기 가만있거라. 나 혼자 간다.”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안 돼, 할아범!”

위험하다고 같이 가자고 한 게 누구였는지.

남자의 자존심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믐은 마른 비를 남겨두고 혼자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지?’

경공을 펼치며 따라붙던 용연사태가 미간을 찌푸렸다.

늙수그레한 노인이 홀로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자폭이라도 하려는 건 아닌지 살폈지만, 노인은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바뀐 건 그믐이 코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어디 한번 받아보거라.”

눈빛이 번쩍이고, 자연기가 폭발하듯 끓어오른다.

그믐이 사선으로 솟구친 순간, 용연사태가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 이럴 수가! 이자, 십좌에 필적하는…!”

쩌저저정―!

다섯 줄기 발차기 연격.

검이 날아올랐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용연사태가 달려들던 속도보다 빠르게 튕겨나갔다.

그녀의 손아귀는 터져서 피가 흘렀으며, 왼쪽 쇄골이 부러져 있었다.

그믐이 놀란 얼굴로 중얼댔다.

“막았단 말이냐? 중선오격을?”

이 격은 흘렸지만, 삼 격은 적중하는 거였다.

뒤의 삼 타를 막은 건 여덟 명의 여승이었다.

그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용연사태 앞에 버티고 선 여인들을 살폈다.

“놀랍구나. 기껏해야 서른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항마팔수(降魔八手).

여승들은 차기 검후의 자리를 노리던 인재였다.

원래라면 그들 중 한 명이 검후가 됐겠지만, 터무니없는 천재가 튀어나왔다.

사 년 전, 마른 비가 도강언에서 만났던 월연.

마른 비가 수왕의 칭호를 얻었듯이 월연 또한 약관의 나이에 정식으로 검후의 자리에 올랐다.

열 살이나 어린 사저에게 밀렸지만, 다행히도 시기하는 자는 없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한편, 복호전을 대표하는 항마팔수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전주님. 괜찮으세요?”

검을 든 여인이 그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용연사태는 장로인 동시에 전주였고, 절대 잃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용연사태가 통증을 참으며 놓쳤던 검을 잡았다.

“방심했구나. 수왕이 홀로 나온 게 아니었어. 난데없이 십좌급의 고수라니…….”

경공이 뒤처지는 제자들이 따라붙었다.

용연사태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겨눴다.

“합공을 주저치 마라! 저자와 수왕을 쓰러뜨리고, 장문인께 갈 것이다!”

용연사태가 그믐에게 돌진했다.

항마팔수는 부상을 입은 그녀를 거들었다.

그믐은 남쪽을 향해 달리며 아홉 명의 고수와 한꺼번에 맞붙었다.

“으음…!”

일대일이라면 어렵지 않게 쓰러뜨리겠는데, 힘을 합치니 만만치 않다.

그리고 합공에 앞서 신경을 건드리는 게 또 있었다.

“정신 사납게시리! 뭔 놈의 무기가 이렇게 다양한 게야?!”

널리 알려진 난피풍검법(亂披風劍法)과 수미혜심검(須彌慧心劍)은 말할 것도 없다.

천불계도(天佛戒刀)를 휘두르는 도객부터, 복호권(伏虎拳)과 금정면장(金頂綿掌)이 장기인 권사, 난화창(亂花槍)을 구사하는 창술의 고수까지…….

항마팔수는 갖가지 무기로 그믐의 눈과 간격을 어지럽혔다.

“이런 빌어먹을…!”

맨손이었다면 낭패를 봤으리라.

진형을 갖춘 채 달려드는 아홉 명의 고수들 때문에 그믐은 욕을 뱉었다.

허나 말과 달리, 수투를 낀 양손은 날아드는 병기를 현란하게 막아냈다.

“제길! 이름 좀 날려보려는데 쉽지가 않구먼!”

일 대 구.

그믐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접전을 지켜보는 무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직접 상대하는 자들은 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괴물이…! 그냥은 쓰러뜨릴 수 없다! 소(小) 항마복룡진을 준비하라!”

마음이 다급해진 용연사태가 검진을 발동했다.

항마팔수가 팔방을 밟고, 용연사태가 중심에 섰다.

강대한 기가 휘몰아치며 사위를 압박하자, 그믐의 표정이 변했다.

“이런…! 혼자서 너무 깊게 들어왔나!”

그믐은 난감해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큰소리 탕탕 치고 왔는데, 어찌 물러나랴.

그는 질주를 멈추고 뒤꿈치를 땅에 붙였다.

엄지와 검지를 딱 소리 나게 튕기자, 창공을 배회하던 거조가 내리꽂혔다.

“늙으니까 힘이 부치는구나. 나도 친구랑 같이 싸우련다.”

“삐아아악―!”

어둔 날개는 위에서.

그믐은 아래에서.

그것은 근래에 완성한 둘만의 비기였다.

“전대 족장을 이겨보겠다고 준비한 기예니라. 허나 이젠 받아줄 사람이 사라져 버렸어….”

어둔 날개가 그믐과 교차한 순간, 검은 장막이 사위를 휘감았다.

“어두워?! 이, 이게 대체?”

“환술인가…!”

검격을 쏟아내려던 아홉 명이 우뚝 멈췄다.

살의와 함께 증식하는 어둠.

그럴 리 없건만, 해가 지고 밤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허상이다! 방금 일출이 떠올랐는데 이런 눈속임을…!”

그믐이 용연사태의 외침에 화답했다.

“아이들이 속성기를 연마하는 걸 봤다. 평생 그런 건 시도해본 적도 없는데……. 하니까 되더라고.”

정신이 아득해질 듯한 단련의 끝.

노장은 또 한번 한계를 돌파했다.

그믐이 필생의 깨달음을 녹여내 터득한 건 어둠의 속성기였다.

“흑야호렵수(黑夜虎獵手)라 이름 붙였느니라.”

스아아악―.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울렸다.

칠흑 같은 밤에 범을 낚아채는 올빼미처럼.

효조(梟爪)를 흉내낸 손가락과 진짜 올빼미의 발톱이 번뜩였다.

암기(暗氣)를 담은 수격이 공간을 후비자, 아미파 최강의 절진이 낱낱이 해체됐다.

환영 같은 어둠이 걷히고, 아홉 명의 검수가 무릎을 꿇었다.

“이, 이럴 수가…!”

진이 깨졌다.

무기가 동강 나고, 내력이 흔들렸다.

용연사태는 그 정도에 그쳤지만, 항마팔수는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나버렸다.

쿵, 쿠쿵― 쿠웅!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여승들의 심장에는 엽전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사저…! 안 돼애!!”

“마기(魔氣)! 방금 그것, 마기다…!”

뒤따라온 아미파 제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숨 막힐 듯한 살기와 새카만 기운.

진짜 마기를 본 적 없는 자들로선 오인할 만했다.

연달아 패배를 겪은 용연사태가 입술을 떨었다.

“아냐……. 마기라면 항마복룡진이 반응했을 터. 저건…!”

순수한 무의 결정체.

대자연에서 추출한 어둠의 정수였다.

화기와 냉기, 뇌기처럼 특정 속성을 담은 기운일 뿐이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큰 기술을 쓴 직후! 지금이다! 지금 들이쳐야 해!”

수장들의 패배로 충격에 휩싸인 아미와 달리, 청성은 냉정했다.

아미파를 따라잡은 그들은 염상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그믐에게 달려들었다.

“이보게들. 숨 돌릴 틈도 안 주고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나?”

전력을 쏟아낸 직후다.

밀려오는 공허감을 채울 새도 없이 적들이 들이닥쳤다.

‘이건 진짜로 위험하구먼.’

허나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믐이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뭐야. 할아범. 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거야?”

저쪽이 청성이라면, 이쪽은 수왕이다.

그믐의 앞을 막아선 등판이 전면으로 돌아갔다.

“핫!”

천둥바위 삼 연타.

대지의 충격파가 세 방향을 일거에 휩쓸었다.

검을 휘두르며 쇄도하던 적들이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마른 비는 무리하지 않고 그믐을 낚아채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 살살 해라! 이 녀석아! 삭신이 쑤신다!”

지켜줘야 할 아이라고만 여겼다.

마른 비에게 몸을 맡길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바람에 휘날리는 빨랫감처럼 흔들거리면서도 그믐은 미소를 지었다.

“흑야호로수? 올빼미 사냥이랑 중선오격만으로도 대단한데, 뭘 또 만든 거야, 할아범?”

흐뭇해하던 그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흑야호렵수다! 이 녀석아! 뭘 어떻게 들으면 ‘호렵’이 ‘호로’가 되는 게야?!”

멍청한 건 특질인가 보다.

몰라보게 강해졌어도 이런 부분은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믐은 그마저도 기꺼웠다.

“아주 여유만만이구나! 너희가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할 상황인가!”

송서초상비(松鼠草上飛).

풀잎 위를 밟으며, 날아가듯 달리는 극상승의 경공이다.

초상비에 청성만의 색깔을 덧입힌 그것은 바람보다 빨랐다.

지척까지 따라붙은 염상이 노성을 터뜨리자, 마른 비가 간단히 대꾸했다.

“그럴 만하니까.”

그러곤 그믐을 하늘로 내던졌다.

거기엔 자연기를 소진한 채 후퇴하는 어둔 날개가 있었다.

“이, 이 녀석이 늙은이를 짐짝처럼…!”

‘알아서 받겠지.’

양손의 자유를 얻은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렸다.

“죽어라! 수왕! 장문인의 복수다!”

쩡! 쩌정! 쩌저저정―!

검과 권갑이 부딪히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음이었다.

청옥상천검과 백열갑은 뚫리지 않는 창과 방패처럼 공방을 주고받았다.

햇살이 남쪽으로 이동하며 싸우는 두 사람을 그림처럼 채색했다.

“이럴 수가! 그것도 신병인가?!”

청성파의 신물과 부딪혀도 금 하나 가지 않는 병기.

염상은 점점 다급해졌다.

“겨우 따라잡았다! 놓치면 안 돼! 놈을 둘러싸라!”

청풍각의 정예들이 앞쪽으로 튀어나왔다.

염상의 검격을 방어하며 달리는 마른 비에 비해 질주에만 집중한 그들이 빠른 건 당연했다.

‘대략 서른 명…!’

기다렸던 순간이다.

마른 비의 입술이 열리며 언령이 발해졌다.

『대부분의 추격자들은 말이야.』

두쿵―!

청풍각 무인들이 멈칫했다.

허나 그들은 야수 제어를 예상했는지 내력을 끌어올려 압력을 떨쳐냈다.

『희한하게 발밑을 못 보더라고?』

주춤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적들의 발바닥이 땅에 닿는 순간, 마른 비의 오른발이 내리꽂혔다.

“하압!”

철 기둥 같은 진각이 지면을 뒤흔들었다.

적들이 중심을 잃고 관성에 밀려 나뒹굴었다.

검기의 극의를 깨닫고 검강의 문턱을 어른대는 고수들이 자빠지는 건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큭…!”

“제기랄!”

몇 년 전, 이를 부득부득 갈며 따라붙던 비마가 딱 저 모습으로 엎어졌었다.

마른 비가 회상에 젖을 때, 분통 터지는 외침이 들렸다.

“어디서 이따위 얄팍한 수작을…! 정정당당히 승부해라! 수왕이란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염상이었다.

제 딴에는 도발이랍시고 하는 모양이지만, 가소로울 뿐이었다.

“응. 난 원래 그래. 태어날 때부터 ‘얄팍! 얄팍!’ 울었다더라.”

지금껏 가지고 있던 수왕의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

난생처음 듣는 헛소리에 염상이 부들거릴 때, 마른 비가 한마디 덧붙였다.

“흥분하지 마. 노화의 지름길이래. 봐, 이마에 주름 생겼잖아.”

저 깐죽거림…!

미치도록 얄밉다.

‘저런 경박스런 놈에게 장문인이…!’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던 염상도 고삐가 풀렸다.

“잡아라!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을 죽여!”

청성과 아미가 썰물처럼 쇄도했다.

그 와중에도 마른 비는 놓치지 않았다.

적들이 진형을 흩뜨린 채 추격에만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는 걸.

‘거의 다 왔을 텐데?’

마른 비가 전신의 감각을 열었다.

그러자 느껴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바람이.

그건 골짜기에서 밀려 올라오는 곡풍이 분명했다.

당가에 가기 전에 확인한 지형.

사천의 지리에 빠삭한 적들도 그걸 눈치챘다.

“각주님! 저 앞에는…!”

대읍(大邑)을 둘러싼 산맥 사이를 연결하는 길.

거기엔 한참을 돌아가야 할 거리를 단축시키는 흔들다리가 놓여 있었다.

협간연교(峽間連橋).

땀을 식히는 곡풍을 등지며 마른 비가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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