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아직 전사들이…!’
좁고 긴 다리의 끝.
아군이 연교를 통과하는 게 보였다.
전사들은 둘째치고 반려수들이 건너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마른 비는 다리 앞에 버티고 서서 허리를 세웠다.
질주에 분배하던 자연기를 전투에 쏟자, 뭉클대는 기파가 사위를 뒤덮었다.
“아무도 통과할 생각하지 마. 다가오면 죽일 테니까.”
철창 한 자루를 비껴든 채 수십만 대군을 막았다는 고대의 장수처럼.
협교를 막아선 수왕의 위용은 대단했다.
염상이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장판파의 장비 흉내라도 내는 거냐?! 웃기지 마라! 우린 조맹덕이 아니야!”
진형을 갖추고, 들이친다.
오백에 가까운 구파의 정예가 검진을 구축하자, 해일 같은 기세가 밀려왔다.
비로소 제대로 시작된 일전.
마른 비가 이를 아드득 깨물며 눈에 힘을 주었다.
키이이잉―!
여기다.
여기가 승부처다!
수왕의 육신에서 전신화장이 빛났다.
“큭…!”
마른 비가 발을 옮기다 말고 휘청거렸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전투화장을 연달아 발동하니 무리가 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리에 힘을 주며 전진했다.
“다 덤벼!!”
바위 부수기에 검진이 출렁이고, 거목 쪼개기가 적들을 분쇄했다.
올빼미 사냥이 수십 자루의 검날을 파고들며 적들의 급소를 뚫었다.
백열갑이 포효를 터뜨리자, 검기의 벽이 충격파를 상쇄했다.
일 대 오백.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할 전투가 산맥을 뒤흔들었다.
“물러서지 마라! 숫자로 밀어붙여!”
염상이 부르짖었다.
제대로 발동한 수리건곤진이 마른 비를 찍어 눌렀다.
『으… 오오오!』
전투함성이 자연기를 북돋으며 검진의 압력을 밀어 올렸다.
검날을 백열갑으로 걷어내고, 놓친 것들은 교룡갑을 발동한 몸으로 받아낸다.
피가 터지고, 피부가 갈려도 마른 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크아아아!!!”
무아지경.
마른 비는 야수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왼손과 오른손에 붉고 푸른 기운이 맺혔다.
화기와 한기.
서리불꽃을 합칠 때 썼던 속성기를 근접전에 활용한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적들이 불타고, 얼어붙으며 나뒹굴었다.
“비켜라!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력으로 누르지 않는 한 저걸 차단할 방법은 신병밖에 없다.
염상이 앞으로 나서며 청옥상천검을 맞대자, 피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격체전력을…!”
막대한 내공이 염상의 몸에 깃들었다.
방어에는 실패했지만, 너른 하늘의 서리불꽃을 받고도 살아남았던 그때처럼.
염상의 청운적하검에 맞선 건 또 다른 속성기였다.
파지지직―!
푸르른 뇌기가 지상에 강림하니, 하늘의 분노가 수왕의 손 안에서 요동쳤다.
전신화장에 기댄 뢰창은 눈이 시릴 만큼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쩡! 쩌저저정―!
뚫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염상은 달려들다 말고 아군이 있는 지점까지 정신없이 밀려났다.
“크, 크아악!”
결국, 검을 놓치고 만다.
염상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뒹구는 동안 뢰창은 수리건곤진을 관통했다.
우르르릉―!
이차 충격파.
귀청을 찢는 음파가 청성파를 덮쳤다.
허나 수왕의 비기에 대해 알고 있는 그들은 내공을 때려 부어 기의 막을 쳤다.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던 땅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뢰창의 궤도에 걸린 자들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뒤였다.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놈이 다 있단 말이냐!”
원한조차 꺾어버리는 무력이다.
염상이 질린 얼굴로 마른 비를 돌아봤다.
잠력을 남김없이 격발한 그는 지친 듯 숨을 몰아쉬었지만, 감히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투지가 꺾이지 않은 건 마음이 급한 아미파의 무인들이었다.
“효연 사매! 별동대를 이끌고 골짜기를 건너라! 경공으로 뛰어 넘어!”
용연사태가 합류하며 명을 내렸다.
부상을 입고, 제자들을 잃었음에도 그녀는 멈출 줄을 몰랐다.
용연사태가 검진의 중앙에 서서 공격을 지휘하고, 별동대가 마른 비를 무시한 채 절벽 끝에서 도약을 준비했다.
“이런…!”
이번만큼은 마른 비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다리를 틀어막고, 적을 견제하기 바빴다.
골짜기를 뛰어넘을 실력을 가진 자들이 허공을 가로지를 때였다.
“삐이이익―!”
골짜기 밑에서 어둠이 솟구쳤다.
이때를 대비해 숨죽이고 있던 어둔 날개가 양익을 활짝 폈다.
“헉?!”
“이, 이런…!”
갑작스런 기습에 별동대가 헛바람을 삼켰다.
거조는 창공을 제집인 양 누비며 디딜 곳 없는 적들을 격추시켰다.
“안 돼! 제자들이…!”
오십이 넘는 정예가 우수수 추락했다.
까마득한 골짜기로 떨어져 내린 그들은 어떻게 봐도 살 방도가 없었다.
“이, 이…!”
허무하게 아군을 잃은 용연사태가 비명을 질렀다.
“죽여라! 놈은 지쳤어! 검진으로 압살해버렷!”
이쯤 되면 수십 년간 불경을 외며 수양한 평정심도 바닥이 날 만하다.
용연사태가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그때, 항마복룡진의 측면이 무너져 내렸다.
“나를 잊은 게 아니냐?”
그믐의 육신에서 빛무리가 번쩍였다.
어둔 날개와 함께 솟아오른 그가 전신화장을 발동했다.
날카로운 수격이 아미파 검진의 외벽을 찢으니, 마른 비를 바라보고 있던 적들이 우수수 땅에 누웠다.
“비켜라. 피곤해 죽겠다.”
새카만 기운이 일렁이는 정권.
그믐은 아미파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마른 비를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그러곤 순식간에 검진을 돌파하여 지친 그를 낚아챘다.
“이 이상은 무리다. 더 버티다간 우리가 위험해.”
노을이 이끄는 본대는 시야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마른 비는 저항하지 않고 그믐에게 몸을 맡겼다.
“조금 쉬어라. 곧 또 싸워야 할 테니까.”
그믐은 마른 비를 어깨에 얹은 채 흔들다리를 질주했다.
멍하니 있던 청성과 아미가 정신을 차리고 추격에 나섰다.
“이, 이런…!”
“쫓아라! 놈들을 놓치지 마!”
구파의 병력이 다리에 진입했다.
이기어검을 구사할 줄 아는 무인들이 절벽 끝에 서서 검을 집어 던졌다.
“삐아아악―!”
어둔 날개가 묘기에 가까운 비행을 선보이며, 그믐에게 날아드는 검날을 차단했다.
몇 자루의 검이 몸통을 긁자, 녀석도 무리하지 않고 그믐의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 젠장!”
‘이게 무슨 꼴이냐! 스물 초반의 애송이와 늙어빠진 노인을 뚫지 못하다니!’
염상도 그가 아는 욕설을 뱉으며 다리 위를 달렸다.
추격에 나서기 전, 자신이 상정한 복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세 개의 점을 새카만 뭉텅이가 쫓는 형국이었다.
“장비는 장판교를 끊었다고 하지. 썩 좋은 책략이 아니었던지라 따라하고 싶진 않다만……. 어쩔 수 없구나.”
다리를 건넌 그믐이 손을 휘둘렀다.
사천 중부를 오가는 자들의 시간을 절약시켜 주던 협간연교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부각주와 조장급이 먼저 간다! 나를 따르라!”
대비하고 있던 염상이 몸을 날렸다.
정예들이 먼저 건너뛰어 그믐의 반격을 무마하고 착지점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멈추지 말고 달려라! 곧장 따라붙어!”
정예들인 만큼 방해가 없자 낙오자도 없었다.
무너지는 다리에서 도약한 청성과 아미가 다시금 마른 비를 쫓기 시작했다.
그 무렵, 노을이 이끄는 와족의 본대는 놀란 얼굴의 아미파 무인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전투화장을 발동하라! 전부 쓸어버려!”
산맥을 넘자, 아미산이 아스라이 보이는 평야가 나타났다.
시야가 탁 트인 그곳에서 와족은 아미파의 병력을 마주했다.
“어, 어떻게 야수족이 이곳에?!”
흥미로운 건 적의 표정이었다.
그들은 청성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하산한 아미파의 장로들이었다.
아직 주력 검대에 들지 못한 이대 제자들을 이끌고 지원을 나온 것이다.
‘좋아! 비둘기와 엇갈렸구나!’
청성을 무너뜨리자마자 남하한 결과였다.
청성이 와족에게 공격받았다는 소식이 전서구를 통해 전해지자, 아미는 황급히 원로원을 소집하여 추가 병력을 파병했다.
한참 뒤에 또 하나의 전서구가 당도했다.
청성이 무너졌고, 와족이 아미산으로 향한다는.
하지만 지원 부대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그리고 와족이 아미산에 이르는 최단 거리를 택한 이상, 둘은 만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간발의 차로 때가 어긋나서 식구를 잃어야 했던 네 달 전과는 다르다.
이번에는 절묘할 정도로 시간이 와족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저게 마지막 남은 적의 주력이다! 사정 봐주지 말고 쓰러뜨려!”
“알겠습니다, 족장님! 염려 마십쇼!”
“크아아앙!”
반려수들이 달려 나가고, 전투화장을 발동한 와족의 본대가 폭풍처럼 질주했다.
아미파의 장로들이 하얗게 질린 제자들을 수습했다.
“후퇴하려다간 뒤를 잡힌다! 겁먹지 마라!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검이 뽑혀 나오고, 엄밀한 방진이 형성됐다.
아미가 자랑하는 십여 명의 장로들이 최전선에 서서 검강을 피워 올렸다.
“일점 돌파! 나를 따르라!”
노을이 선두로 나서며 외쳤다.
양측이 충돌하기 직전, 백광 두 줄기가 그녀를 앞질렀다.
“커허헝!”
“삐이이익―!”
별비. 그리고 칼바람.
새하얀 영수들이 하늘과 땅에서 적진을 덮쳤다.
“크윽…!”
“한낱 금수가 이런 힘을…!”
그리고 둘의 맹격은 검강의 벽을 부수고, 장로들을 물러서게 할 정도였다.
“이, 이런…! 반격을 준비해라! 본대가 온다!!”
아미파의 대장로.
복호대라검(伏虎大羅劍)으로 무명을 떨친 희연사태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전부 쓸어버려!!”
와족의 힘은 아미파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투콰카카캉―!
부러진 검편이 하늘을 날고, 주황색 승복이 피에 물들었다.
팔다리가 뜯겨나간 여인들의 절규가 평야를 데웠다.
“산! 걸음! 좌우를 받쳐! 단번에 돌파한다!”
노을이 외치자, 산이 응답했다.
“언제는 오빠라면서요! 왜 갑자기 반말입니까?!”
“시끄러! 내 맘이야! 급하잖아!”
독수리 사냥.
새하얀 조도가 풍경을 절단했다.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하나만 하십쇼! 오빠 소리 듣다가 이름 불리면 괜히 빈정 상하니까!”
곰 발.
묵직한 권격이 검진을 통째로 갈아엎었다.
“집중해! 산! 지금이 그런 거 따질 때냐!”
섬표.
보이지도 않는 순속의 발차기가 적들의 반격을 모조리 걷어냈다.
“족장님! 마무리 하십쇼!”
“걱정 마. 끝났어.”
추아아악―!
노을이 지나치고 나서야 희연사태는 눈을 껌뻑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대장로님!!”
“네 이놈! 목을 길게 빼라! 사저의 복수를…!”
장로들이 노을에게 일제히 달려드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쐐애액― 쾌액! 퍼어억―!
연, 올빼미 사냥.
장로들은 자신이 무엇에 당한 지도 모른 채 가슴이 꿰뚫렸다.
빛살 같은 수격, 혀를 내두를 암습이었다.
“산. 걸음. 똑바로 못 하나? 애초에 적이 족장님께 접근하지도 못하게 차단하란 말이다.”
좌우를 쏘아본 어스름이 스르륵 사라졌다.
꾸중을 들은 둘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만 삐죽댔다.
“크아앙!”
“음머어…!”
“샤아아악!”
장로들이 몰살하고, 반려수까지 당도하자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이백에 불과한 와족이 사백이 넘는 아미의 제자들을 파죽지세로 섬멸했다.
회생 불가능한 타격.
마른 비와 그믐에게 당한 자들까지 감안하면 아미는 쇠락의 길을 걸을지도 몰랐다.
“끝인가?”
노을이 피에 젖은 평야를 돌아봤다.
정면 돌파를 하는 바람에 이쪽도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지만, 구파와 충돌한 것치고는 경미한 피해였다.
‘비아는?’
노을이 고개를 들 때, 산맥 쪽에서 검은 점이 하강하는 게 보였다.
‘어둔 날개! 무사히 빠져나왔구나!’
그럼 이제 정말 거리낄 게 없다.
와족의 본대는 순식간에 평야를 가로질렀고, 해가 중천에 이를 때쯤 아미산의 초입에 당도할 수 있었다.
“……!”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스런 멋을 지닌 산문 아래.
아미파 장문인 금정신니가 정좌한 채 와족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