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21화 (421/463)

421화

“아미파 장문, 금정신니라 합니다.”

세인들은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미추(美醜)를 이야기함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마음가짐, 그간 지녀온 삶의 태도가 ‘인상’으로 표출된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여인은 바르게 살아온 게 틀림없다.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하는 선한 얼굴.

금정신니의 인상은 고아하며, 고결하기까지 했다.

‘웃기는 소리!’

그래서 화가 난다.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껍데기만 저럴 뿐이야!’

더 열이 받는 건 자연기마저 노을의 심정을 배신했다는 점이다.

더없이 투명하고 맑은 기운.

원수만 아니라면 얼른 다가가 마주 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말했으리라.

친해지고 싶다고, 가깝게 지내고 싶다고.

그런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노을은 물었다.

“왜 그랬어?”

직설적이면서 많은 물음이 함축된 질문이다.

금정신니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노을을 바라봤다.

“대답해! 왜 그랬냐고!”

선한 얼굴과 청아한 기운을 지닌 자가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금정신니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노을과 눈을 맞추던 그녀는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어떤 말을 하든 변명일 뿐……. 가슴이 미어지나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군요. 그저 소승의 사죄가 시주들께 작은 위안이 되기만을 바랍니다.”

말을 마친 금정신니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양 손바닥을 지면에 댔다.

고개를 숙이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오체투지(五體投地).

불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것은 극상의 예와 진심을 담은 절이었다.

“……!”

예상치 못한 광경에 와족은 말을 잃었다.

금정신니는 그들이 입을 열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이 감돌았다.

길게 이어진 침묵 끝에, 노을이 입을 뗐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한 번 말문이 트이자, 그다음은 쉬웠다.

“그까짓 절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건가? 우리의 한이 그렇게 가벼워 보여?”

노을이 조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심각한 오판이었다는 걸 알려주지. 이 산에 있는 인간은 오늘 전부 죽을 거야.”

노을이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금정신니가 고개를 들었다.

“제 목숨을 가져가세요.”

“……?!”

나이 지긋한 여승은 회한이 깃든 눈으로 노을을 올려다봤다.

“그것으로 시주들의 한을, 먼저 간 영혼들을 달랠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허나…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아주길 바라요.”

금정신니가 검을 뽑았다.

아미파 장문인을 상징하는 보검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녀의 손을 떠난 검은 천천히 허공을 날아서 노을의 앞에 머물렀다.

“우리의 입장을 헤아려달라는 말은 않겠어요. 부디 이것으로 끝없이 이어질 피의 굴레를 끊기를…….”

금정신니는 단정하게 정좌한 뒤에 눈을 감았다.

속세에 대한 미련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초탈한 모습.

눈을 반개한 그녀의 얼굴에서 설명할 수 없는 빛이 났다.

‘이자들은…!’

청성파의 장문인이란 자도 이와 비슷했다.

대체 어떤 게 이들의 진짜 모습인가.

노을은 답을 알고 있었다.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뿐.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날카롭게 갈아온 복수의 칼날이 무뎌질 것만 같았다.

“……자결해.”

어렵게 뱉은 한마디.

노을은 눈앞에 있는 검을 집어 던졌다.

지면에 꽂힌 검이 파르르 떨었다.

평온을 유지하던 금정신니도 이번만큼은 동요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란 말인가요?”

그럴 경우, 짊어지게 될 업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불가의 가르침은 정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자살의 과보가 중대함을 설파하고 있었다.

허나 망설이는 것도 잠시, 금정신니는 검을 들어서 자신의 목을 겨눴다.

“그리하겠어요. 고마워요. 시주의 결정이 많은 것을 바꿀 거예요.

“……!”

노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자결하려는 건가?

구파의 장문인이란 자가 싸우지도 않고 목숨을 끊는다고?

만약 그 뒤에 자신이 공격 명령을 내리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금정신니는 노을을 굳게 믿는 듯했다.

“아미타불. 안타까움과 사죄를 전합니다. 그럼 안녕히…….”

금정신니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할 때였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요! 장문인! 그러지 마세요!”

“으아앙! 스승님! 죽지 마요!”

아미의 제자들이었다.

십 대 초반의 사미니(沙彌尼)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어린 여아들이 대부분이었다.

산 위에 있던 아이들은 구르고, 엎어지며 비탈길을 달려 내려왔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거나 얼굴을 긁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들은 금정신니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만!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

금정신니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움찔하며 멈췄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보연! 사매들을 돌보라고 일렀지 않느냐! 왜 여기까지 내려온 게야!”

열두세 살쯤 되었을까?

보연이라 불린 사미니가 대꾸했다.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장문인. 아니, 막지 않았어요. 그럴 수 없습니다.”

보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금정신니는 냉정하게 명했다.

“당장 사매들을 추슬러 위로 올라가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리라 믿는다.”

장문인이 스스로를 찌르는 모습을 본다면, 아이들에겐 평생토록 잊지 못할 충격이 될 터다.

보연은 금정신니의 마음을 이해했고, 끅끅대며 울음을 삼켰다.

그러곤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갔다.

이를 꾹 깨물고 있던 금정신니가 입을 열었다.

“어른들의 사정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들이에요. 제 목숨을 거두고, 저들은 살려주기 바랍니다.”

금정신니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검 손잡이를 붙잡고, 힘껏 끌어당겼다.

검 끝이 목에 닿는 순간!

“……!”

칼날이 목젖 앞에서 덜컥 멈췄다.

금정신니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쥔 손바닥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검을 멈춘 건 노을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눈으로 금정신니를 내려다봤다.

‘아버님께서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점창과의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세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너른 하늘이 점창을 용서하게 된 배경과 그가 했던 말들에 대해.

전에는 갸웃거렸지만, 지금은 이해가 간다.

그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하아…….”

노을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말 어렵네요, 아버님. 수장의 자리라는 건.’

노을은 잠시 그렇게 있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러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승에게 말했다.

“……이쯤 해요. 믿어도 되겠죠?”

왜 그랬냐는 질문이 그랬듯이,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금정신니의 눈가가 떨려왔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그것만으로도 금정신니가 얼마나 많은 번뇌와 후회에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챙! 채챙! 쩌정! 쩌엉―!

그때, 뒤편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지막지한 살기를 뿜어내는 청성과 아미의 무인들.

그리고 그들의 공격을 걷어내며 질주하는 두 사람.

마른 비와 그믐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악을 쓰며 달려든 구파의 무인들만 얻어맞고, 걷어차이며 튕겨나갔다.

“장문이이인!!!”

용연사태가 기겁하며 부르짖었다.

그녀의 눈에는 노을이 검을 붙잡고, 금정신니를 찌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금정신니가 아차 하는 얼굴로 외쳤다.

“그만! 모두 멈추어라! 전쟁은 끝났다!”

“……?!”

공지량에게 휘말렸던 자들이 원한 관계를 청산하는 순간이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될 뻔한 사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든 순간이기도 했다.

“헉, 허억, 헉…!”

와족과 합류한 마른 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믐은 기력이 다했는지 아예 발라당 누워버렸다.

그들의 뒤에는 눈에 띄게 숫자가 줄은 구파의 무인들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의 상황은 마른 비로서도 의외였다.

평야에 핏물이 내를 이룬 걸 보았다.

당연히 아미산도 피에 잠겼을 거라 짐작했다.

여기서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쟁이 끝났다니?

‘한순간의 실수로 너무 많은 피가 흘렀구나…….’

금정신니는 그제야 장로들과 이대 제자들이 궤멸했다는 걸 떠올렸다.

정사대전에 파견한 병력과 청성에 보낸 정예들이 남아 있지만,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고통스런 얼굴로 눈물을 흘리다가, 마른 비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대가 수왕이군요. ‘그’의 아들이 맞죠?”

마른 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정신니는 마른 비에게 방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사문의 식구들을 잃고, 살기를 거두지 못하는 아미파 제자들을 억누른 건 물론이었다.

‘여기까진가…….’

염상이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운진인의 유언을 어기고 야수족을 쫓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복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뼈아픈 피해만 입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받아들이고, 감정의 잔해를 묻을 시간이었다.

“청성의 제자들은 자중하라. 신니께서 종전을 선언하셨다면, 우리의 명분도 여기까지다. 이제는 장문인의 유언을 따라야 한다.”

금정신니의 명에도 불구하고 살의를 감추지 못하던 청성의 무인들이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가슴은 찢어지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를.

청운진인이 바라는 바가 어떤 것인지를 말이다.

와족과 청성, 아미가 저마다의 감정을 추스를 때, 금정신니가 마른 비에게 다가왔다.

“그대에게 줄 것이 있어요.”

금정신니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깨끗한 천에 쌓인 건 너른 하늘이 생전에 항상 지니고 있던 물품이었다.

“부친은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사내였죠. 시신은 염하여 불가의 예에 따라 장사지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걸 발견했어요.”

“……목걸이?!”

위대한 전사를 상징하는 징표.

운남의 야수들을 무릎 꿇리고 획득한 전리품이었다.

대망의 비늘을 돌돌 말아서 가공한 줄에는 광서우 뿔의 파편이 걸려 있었다.

거악의 어금니와 전상의 상아 조각, 괴후의 송곳니도 보인다.

대미를 장식한 건 흰 수리의 발톱이었다.

설산의 제왕, 하얀 깃이 자랑하는 무기.

아버지의 유품을 받아든 마른 비는 울컥 치미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러고 보니 하얀 깃은….’

듣기로는 백수교에게 일부러 끌려갔다고 했다.

아마 옥예린과 연관이 있을 듯한데, 직접 본 게 아니니 확신할 수가 없다.

마른 비는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수천 사냥꾼들과 함께 백수교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정말 고마워. 유품도, 아버지의 시신을 방치하지 않은 것도.”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다.

원래는 사천에서의 전쟁이 마무리되는 대로 적색분지에 갈 계획이었다.

거기에 아버지와 선대 전사들의 주검이 남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청운진인과 금정신니가 전사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내준 것이다.

마른 비는 새삼 이들과의 원한이 마무리된 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별말씀을. 시주들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었어요.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마른 비는 너른 하늘의 유품을 뜯어보다가 목에 걸었다.

각성수들이 자랑하는 신체의 일부.

검치호의 이빨이 그랬듯, 거기선 강렬한 자연기의 잔흔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가 되길 바라. 쉽지 않겠지만, 시간에 맡겨 보자. 점창과 우린 그렇게 가까워졌어.”

노을의 판단을 존중한다.

청성진인과 금정신니를 겪으며, 마른 비 스스로도 많은 부분에서 감정의 변화가 일었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앙금을 털어내며, 마른 비가 등을 돌렸다.

“돌아가자. 운남으로.”

전격적이고도 파격적인 기습.

당가, 청성, 아미가 야수족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온 천하를 뜨겁게 달궜다.

운남에 쏠렸던 시선이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원의 세력들은 예상했다.

복수를 완성했으니 와족이 다시 잠적할 거라고.

하지만 와족은 또 한번 그들의 예상을 깨뜨렸다.

아미파 장문인이 패배를 선언한 지 팔 일.

사천에서 운남으로 진입하는 길목이 북적였다.

과거에 고즈넉한 풍경으로 방문자들을 맞이하던 영인.

와족과 흑전단의 전투로 폐허가 돼버린 그곳이 수백 명의 무인들로 넘쳐났다.

그들은 금광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자들이었다.

견제와 기 싸움으로 소란스런 그곳에 건장한 사내 한 명이 백호를 데리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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