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
그건 너무나 뜻밖이어서 얼른 와 닿지 않는 광경이었다.
정파, 사파, 또는 흑백의 분류로 가를 수 없는 군상들.
사내는 다양한 세력이 얽혀 있는 장내를 유유히 가로질렀다.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고, 어떤 기운도 발산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봤지만,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마치 일제히 사고가 마비된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이 자리에 나타날 리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앞마당을 산책하듯 슬렁슬렁 걷던 사내가 멈췄을 때, 비로소 누군가가 입을 뗐다.
“수, 수….”
군중의 눈이 커졌다.
멎었던 사고가 흐르기 시작했다.
의문과 경악이 뒤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왕?!!”
그 한마디엔 모든 게 들어 있었다.
장내의 인물들은 얼어붙은 채 그 이상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눈을 비비는 자들이 속출하는 걸로 볼 때,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했다.
“어. 왜 불러?”
마른 비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얼어붙었던 자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럴 리 없다고 되뇌었지만, 사내의 옆에 있는 백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수왕의 상징이었다.
“많이도 몰려왔네.”
마른 비가 폐허가 된 영인 시가지를 넓게 둘러봤다.
정파와 사파.
이놈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여기서도 둘로 나뉘어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좌우로 갈린 진영 외에도 많은 인원이 산개한 채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자, 마른 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해. 인간의 탐욕이란 거, 보면 볼수록 놀라울 뿐이야.”
용병연합을 몰살한 자리에서, 자신은 경고했다.
운남에 들어서지 말라고.
우리가 돌아오면, 눈에 띄지 말라고.
“여기가 운남인 건 알고 있지?”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등줄기를 훑는 땀이 소스라칠 만큼 차가웠다.
욕심에 눈이 멀어 흘려들었지만, 여기 모인 자들 중 수왕의 경고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경고는 한 번뿐이야.”
깊게 가라앉아 느낄 듯 말 듯 했던 기운이 실체를 드러냈다.
그제야 침략자들은 깨달았다.
그건 너무도 거대한, 그들의 인지 범위를 넘어선 살의였다는걸.
“살아나갈 생각 따윈 하지 마.”
영인에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 * *
털썩.
사내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영혼이 빠진 듯한 눈으로 폐허가 된 가주전을 바라봤다.
긴 전쟁의 끝.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건만, 반겨줄 식구들이 없었다.
완파된 가주전과 북문보다 그 점이 사내의 심장을 조여 왔다.
“…….”
큰 충격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중천에 닿을 때까지, 당문휘는 일어설 줄을 몰랐다.
“크흐흑…! 문휘야…….”
장로들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피해 상황은 참담할 뿐이다.
가주가 죽었고, 은영대와 녹수대가 전멸했으며, 비수와 독을 다룰 줄 아는 무인들이 몰살했다.
살아남은 건 아직 싸울 줄을 모르거나, 싸울 힘이 없는 노약자뿐이었다.
정사대전에 참전한 원로원과 은비대를 제외하면, 세가에 남아 있던 전투 병력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시체도 건지지 못했다……. 시체도…!”
세가를 지키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 아군을 휩쓸었다.
피가 스민 흙과 부패한 살덩이.
북문 앞에서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흡! 흐읍!”
석상처럼 굳어 있던 당문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피를 왈칵 뿜었다.
“문휘야…!”
시야가 흐려지는 가운데, 당문휘는 후회했다.
가주의 자리를 양보하는 게 아니었다고.
당건휘만 남겨둔 채 세가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아 이노옴…!’
질식할 듯한 살의가 목을 옥좼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이런 상황을 자초한 게 당건휘라는 점이었다.
‘천북표국, 금광…! 건휘, 이 멍청한 녀석아…. 본가의 자금은 충분하거늘, 왜 다른 이들을 해치면서까지 욕심을 낸 것이냐!’
장기가 뒤틀릴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회한이 버무려진 울화가 당문휘의 신체 내부를 뒤집었다.
‘크윽…! 비아. 너도…!’
이런 심정이었겠지.
직접 겪어보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힘들다.
혼백이 타버릴 듯한 분노와 절망을 너는 어떻게…!
“으, 으우욱…!”
당문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차라리 미쳐버리면 좋을 것을.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원한만을 생각하는 복수귀가 될 수 있다면 편할 텐데.
“커! 커헉…!”
당문휘가 또 한번 피를 토했다.
장로들과 은비대원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미안하다…. 용서할 수 없다…. 미안하다…. 용서할 수 없다…. 미안…!’
의식이 끊기는 순간까지 당문휘의 뇌리엔 그 두 문장이 명멸했다.
* * *
“그것이… 장문인의 유언이었소…….”
청성산의 주봉 노소정(老霄顶).
사내는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서 있었다.
사 년 전의 앳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시간과 전쟁이 사내를 키운 것이다.
청성파 제일 기재.
영송의 옆모습에선 완숙한 무인의 면모가 묻어났다.
“그랬군요…….”
곁에 선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눈빛과 칼로 조각한 듯한 콧날.
파르라니 깎은 머리도 여인의 미모를 퇴색시키진 못했다.
하지만 외모보다 그녀를 빛나게 하는 게 있었으니, 한 자루 검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다.
정사대전을 통해 아미파 검후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증명한 여인.
월연은 슬픈 눈을 한 채 영송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다.
“너무 내 말만 했군. 검후께서도 식구들을 잃고 슬픈 건 매한가지일 텐데.”
영송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월연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슬퍼요. 추모를 위해 청성산으로 오는 내내 눈물을 쏟았지요. 슬픔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지만… 장문인을 잃은 건 또 다른 차원이라 생각해요.”
금정신니가 건재한 아미와 달리 청성은 청운진인을 잃었다.
그 상실감은 월연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영송의 눈가에 물기가 고이자, 월연이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딱딱하게 검후니 뭐니 하실 필요 없어요. 그전부터 알던 사이잖아요.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부담돼서 먹은 게 얹힐 거 같아요.”
슬픔에서 잠시 눈을 돌리게끔 하려는 월연의 배려였다.
농담인 걸 알아채기 힘들 만큼 썰렁했지만, 그녀의 노력은 나름 빛을 봤다.
영송이 피식 웃은 것이다.
“못 보는 사이에 그런 말도 할 수 있게 됐소?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던 얼음땡이가 많이 변했구려.”
영송이 아련한 눈으로 말했다.
“비아 덕분이라고 하면 내 착각인가? 도강언에서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던 모습. 검후, 아니, 소저가 그런 얼굴을 한 건 처음이었지.”
월연이 움찔했다.
지난 사 년간, 문득문득 떠오르던 얼굴.
정사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마른 비만큼 좋은 인상을 준 사내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우리가 사문에 있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요?”
대답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물음이었다.
침묵하던 영송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마 그랬겠지. 우린 비아를 알고, 그의 체술을 본 적이 있으니까. 우리가 있었다면 그의 식구들과 충돌하는 걸 어떻게든 말렸을 것이오.”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좋은 인상을 주었던 사내는 이젠 사문의 식구들을 죽인 원수가 돼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복수를 갚았을지라도 와족에게 있어 자신들이 원수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청운진인은 원한의 고리를 끊고자 했지만, 감정이라는 게 어디 먼지 털듯 쉽게 털어낼 수 있는 것이던가.
“……장문인의 유언을 지킬 것이오. 그것이 옳은 길이고, 그분이 바랐던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허나, 난 다시는 비아와 웃으며 볼 자신이 없소.”
그게 솔직한 심정이리라.
월연은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 소협의 경우와는 다르죠. 우린 그분과 가까워지기 힘들 거예요…….”
청성, 아미의 상황은 점창과 판이하다.
공지량이 악행을 저질러서 내외부의 비난을 받은 것과 달리, 그들은 이용당했을 뿐이다.
청성진인의 유언과 금정신니의 장문령 때문에 참고 있지만, 와족에 대한 원한이 쉽게 가실 리 없었다.
그건 영송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게 있다면, 월연의 어조에선 안타까움이 좀 더 짙게 묻어난다는 점이었다.
“희생된 모두가 편안히 쉬시기를.”
월연이 사문의 식구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러곤 청성파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지금 아미파를 대표해 청운진인을 추모하러 온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르오.”
“……?”
의외의 말이 월연을 멈춰 세웠다.
영송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말했다.
“천검. 정도맹주께서 직접 운남에 내려올 거라는 소문이 있소.”
* * *
콰드득―! 우직! 빠드득!
골육이 분쇄되는 소리가 밀림의 경계를 흔들었다.
섬뜩한 음향을 뒤따른 건 혼이 나갈 듯한 비명이었다.
“으아아아아! 사, 살려…!”
“도망쳐! 밀림 밖으로 나가라!”
“제발 살려주시오! 다시는 여기에… 컥!”
살육자들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권갑과 수투, 경갑으로 무장한 전사들이 기계적인 살육을 행했다.
“크아앙!”
“푸륵, 푸르륵…!”
“슈라라락!”
공격받는 자들을 더욱 두려움에 빠뜨리는 건 살육자를 뒤따르는 야수들이었다.
쩌렁쩌렁한 포효와 야생의 살기가 밀림을 찢을 듯이 번졌다.
“무, 물러나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 귀주로 철수한다!”
연의문주(燕義門主) 하옥민이 외쳤다.
그는 설마 운남의 경계를 넘자마자 야수족을 마주칠지 몰랐다.
아니, 제정신이 박힌 놈들이라면 지금 여기 나타나서는 안 됐다.
‘정파와 사파가 전부 이를 갈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무슨 배짱으로 여기에?!’
백 명으로 사천 무림을 무너뜨린 놈들이다.
나타난 건 서른 명에 불과했지만, 잘 쳐줘야 중소문파에 속하는 자신들로서는 이길 방도가 없었다.
하옥민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뛸 때, 여인의 입술이 열렸다.
“나무표범. 숨통을 끊어라.”
그게 하옥민과 연의문도들이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휙― 하고 바람이 분 순간, 팔십에 달하는 병력이 머리가 깨지며 전멸했다.
주위엔 그들 외에도 백 명이 넘는 인원이 쓰러져 있었다.
“끝났군. 가져와.”
귀주에서 운남으로 넘어가는 길목.
노을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위 곰 전사가 묵직한 돌덩이를 내려놨다.
* * *
“뭐야. 여긴 몇 놈 없잖아?”
산이 안개걸음을 보며 투덜댔다.
운남의 동쪽 끝, 광서성과 경계를 맞댄 삼림지역이다.
북쪽 끝에 있는 영인에서 마른 비와 헤어져, 운남의 경계를 타고 내려왔다.
노을과 어스름을 중간에 두고, 동쪽 끝까지 달려 내려왔건만 적이 몇 놈 보이지 않았다.
“사람 죽이는 게 즐거워지기라도 한 거냐? 적이 없으면 좋은 거지, 그게 투덜댈 일이야?”
안개걸음이 정신 차리라는 듯 쏘아붙였다.
산이 진지한 어조로 대꾸했다.
“비아의 말이 맞아. 앞일을 생각하면 압도적인 힘을 보여야 해. 우릴 건드리면 죽는다는 공포를 새겨 넣어야 한단 말이다.”
산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난… 그때까지 살귀가 될 생각이다.”
안개걸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둘도 없는 친구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발을 옮겼다.
“……네가 해라. 힘은 네가 더 세니까.”
산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나무에 기대놓은 돌덩이를 향해 걸어갔다.
* * *
와족은 숨지 않았다.
그렇다고 금광에 모인 적들에게 가지도 않았다.
복수를 마친 그들은 운남과 다른 성들의 경계에 나타났다.
“수왕…! 미친 것 아니냐? 이, 이건 온 천하를 적으로 돌리는…!”
“그렇게 보여? 좋을 대로 생각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줄 테니.”
와족은 세력을 가리지 않았다.
마른 비의 경고대로 운남에 진입하는 적을 모조리 척살했다.
사천, 귀주, 광서.
북쪽에서부터 동쪽 끝까지, 접경지역을 따라 달리며 경계를 넘는 자들을 전부 죽였다.
그건 마치 적의 피로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듯했다.
“수, 수왕이다!”
영인이 피에 잠긴 지 이틀.
사천 쪽에는 가장 많은 인원이 몰렸지만, 이틀 동안 누구도 나아가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
마른 비는 그믐과 별비를 대동한 채 겁에 질려서 서성대는 군웅의 앞에 나타났다.
그의 어깨에는 거대한 비석이 들려 있었다.
쿠우웅―!
‘출입자사(出入者死).’
반듯한 바위에 글자를 파고, 적의 피로 색을 입혔다.
아연한 표정의 중원인들에게, 마른 비가 말했다.
“운남은 원래부터 이곳에 살던 이들의 땅이야. 우리의 영역이라고. 불순한 목적으로 침입한 자, 즉참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아주 거창하게.
수왕은 운남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