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허…!”
“무슨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히다는 반응이 뒤따랐다.
군웅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땅에 몰려온 이유가 금광 때문이라는걸.
그리고 그것이 와족의 공동묘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적이 흐를 때,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발을 들이면 죽인다고? 운남이 얼마나 넓은데, 그게 전부 네 땅이라도 된단 말이냐?”
사파의 일원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우람한 가슴과 우락부락한 근육.
병장기를 들고 있지 않은 걸로 보아 권각을 사용하는 자 같았다.
상당한 수련을 거쳤는지 사내의 몸은 척 봐도 단단해 보였다.
그의 정체를 눈치챈 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붕권(崩拳) 형익…!”
“련에 소속된 고수가 아니냐? 사도련이 본격적으로 병력을 파병한 건가?!”
“아냐! 그런 말은 없었어! 개별적으로 내려온 것 같다!”
정파의 무인들이 웅성댔고, 사파 무인들은 기세가 올랐다.
붕권 형익이라면 사도련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영입할 정도로 유명한 권사였기 때문이다.
형익이 군중의 반응을 즐길 때, 정파 진영에서 누군가가 나섰다.
“사파 떨거지의 입장에 동조하게 될 줄이야. 이번만큼은 저 말이 맞다. 출입자사라니. 기가 차는군.”
검 한 자루를 가슴에 품은 중년 사내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정파의 무인들이 환호했다.
“효조검(梟爪劍) 독고철…!”
“마안산(馬鞍山) 전투에서 사도련 놈들 사십 명을 베었던 분이다! 언제 와 있던 거지?”
독특한 검술로 유명한 자.
독고철의 초식은 마치 올빼미가 사냥감을 낚아채는 듯한 형태를 띤다고 했다.
실전적이고도 날카로운 검격은 정사대전을 거치며 ‘효조검’이란 별호를 널리 퍼뜨렸다.
“떨거지?! 독고철, 죽고 싶으냐?”
형익이 눈을 부릅떴다.
독고철은 그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가능한 말을 내뱉도록. 주먹을 제법 쓴다고 들었지만, 넌 나한테 안 돼.”
형익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고함을 치려 했다.
하지만 독고철이 한발 빨랐다.
“우리끼리의 알력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지. 지금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게 먼저니까 말이야.”
독고철의 눈길이 마른 비를 향했다.
“수왕, 아니, 건우라고 했던가? 간교한 술수로 구파의 뒤통수를 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냐?”
그는 가슴에 품고 있던 검을 들어서 마른 비의 뒤편을 가리켰다.
“천하의 누구도 성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한 경우는 없었다. 하물며 야만인 따위가…. 황제의 비호를 받더니 자만이 하늘에 닿았구나.”
몇 마디 말만 들어도 독고철의 성격을 알 만했다.
북벌에 참전하지 않았던 그는 마른 비를 처음 보았고, 그의 실력을 믿지 않았다.
사천 무림이 무너졌단 소식은 들었지만, 그건 구파의 주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루어진 급습이라 여긴 것이다.
‘구파가 놓친 놈을 내가 잡는다면…!’
독고철은 이 자리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일 기회라 판단했다.
“수왕이라 불릴 정도니 실력은 있겠지. 허나 구파를 건드린 건 너의 실수다. 심지어 수백 명이 모인 곳에 혼자 나타나다니…….”
독고철은 신중했다.
그는 마른 비를 만만히 보지 않았고, 혼자 덤비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다들 잘 생각해보시게. 금광 앞에서 정파와 사파가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교착 상태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여기에 있네. 만약 우리가 저놈을 잡는다면?”
군웅들의 어깨가 꿈틀했다.
금광의 지분과 명성에 대한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건 그들이 탐욕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부나방이란 증거였다.
독고철은 그들의 욕망에 기름을 부었다.
“수왕을 없애서 금광을 수월히 접수할 수 있게 한 공로. 정파라면 내가 맹에 천거할 것이요, 사파라면 형익이 그리하겠지. 안 그런가, 붕권?”
“그, 그렇지! 공을 세운다면 당연히 그리해야지! 내가 직접 련주를 찾아뵙고 아뢸 것이네!”
형익도 독고철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는 조롱당했던 것도 잊고 독고철의 선동에 편승했다.
분위기가 제법 괜찮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걸출한 우두머리가 없는 상황에서 수왕이란 공동의 적을 두고, 정파와 사파의 임시적 제휴가 성사됐다.
‘흐흐. 자, 그럼….’
독고철이 쐐기를 박으려 할 때, 난데없는 투덜거림이 들렸다.
“이것 봐라, 비아야. 아미파도 그러더니 잔챙이들마저 나를 무시하는구나.”
수왕의 옆에 있는 노인이었다.
그믐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망할 놈들이 전부 마른 비만 신경 쓰고, 자신은 없는 사람 취급한다.
그믐으로서는 이런 대우가 영 못마땅했다.
무표정하게 있던 마른 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 없잖아, 할아범. 쟤들은 할아범을 모르는걸.”
“그러니까 기분이 나쁜 거다. 힘 좀 쓰는 놈이라면 내 존재감을 놓칠 리가 없거늘. 주제 파악도 못하는 머저리가 가르침이니 야만인이니 떠드는데 내가 기분이 안 나쁠 수가 있냐?”
“자, 잔챙이?! 지금 내게 머저리라 했나!”
독고철이 발작하려는 찰나, 그믐이 그의 말을 끊었다.
“심지어 별호가 효조검이란다. 그것도 꼴 보기 싫어. 저건 내가 치우마.”
그믐이 뒷짐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마른 비는 자연스럽게 형익을 바라봤다.
“그럼 내가 저리로 갈게. 권사라니 어떤 기술을 쓸지 흥미롭네. 한 주먹거리도 안 될 것 같지만.”
죽이 척척 맞는 도발이었다.
모욕을 당한 독고철과 형익이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굉음이 터졌다.
콰쾅―!
와족 비전, 번갯불.
흙먼지가 휘날릴 때, 마른 비와 그믐은 둘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으, 으아앗!”
거만한 표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독고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자부했던 무력이 마른 비는커녕 그믐의 발치에도 못미친다는 것을.
“호들갑 떨지 말고 검이나 쥐어라. 올빼미 발톱을 닮았다는 검 솜씨 좀 보자.”
단숨에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독고철은 그믐이 다가올 때까지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보아야겠다.
효조검이란 것의 실체를.
기회를 얻은 독고철이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늙은이!!”
수직으로 세운 검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그건 곧 급격한 변화를 보이며 끊어 치는 절격(切擊)으로 변했다.
그믐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중얼댔다.
“옘병. 뭐 이런 허접한……. 이따위 실력으로 올빼미의 이름을 썼다고?”
수투를 낀 손가락이 뻗어졌다.
그믐의 올빼미 사냥은 검을 부수고, 독고철의 머리까지 날려버렸다.
“괜히 시간을 끌었군. 눈만 배렸어. 저승에서 반성해라, 애송아.”
형익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으아아아!”
중단세.
무너뜨릴 붕(崩).
형익은 혼신의 힘을 다한 정권을 날렸으나, 마른 비의 눈높이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약해.”
뻐어어엉―!
기술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마른 비의 바위 부수기야말로 붕권의 이름이 어울렸다.
상체가 날아간 형익이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이, 이런…!”
독고철의 선동에 휩쓸렸던 자들이 정신을 차렸다.
대어볼 수도 없는 힘의 차이.
마른 비와 그믐은 일격으로 적들의 전의를 꺾어버렸다.
“또 있어? 나설 사람?”
있을 리가 없다.
군중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그들은 감히 마른 비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땅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운 좋은 줄 알아. 여기가 운남이 아니라는 게.”
군중들의 눈이 비석으로 향했다.
‘출입자사.’
마른 비의 말처럼 그들은 아직 운남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여, 영인…!’
저 멀리 피에 물든 폐허가 보였다.
이틀 전, 운남에 진입한 자들의 말로.
군중은 온몸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맛봐야 했다.
“자신 있으면 넘어봐. 눈에 띄는 족족 죽여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마른 비는 영인을 향해 걸어갔다.
등이 훤히 드러난 무방비한 자세지만, 누구도 감히 검을 뽑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허허, 참. 비아와 따로 다녀야 나를 좀 주목하려나?”
그믐이 투덜대며 뒤를 따랐다.
말과 달리 그의 입가엔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천, 귀주, 광서.
야수족의 경고가 담긴 비석이 운남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세워졌다.
어느 한 곳 할 것 없이 비석 주위엔 피가 낭자했다.
그건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인 경고였다.
중원인들은 이를 갈 뿐 경계를 넘지 못했다.
수백 명의 무인이 똥 마려운 개처럼 비석 앞에서 서성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리고…….
쐐애애액―!
효과적으로 침입자들을 묶어놓은 와족은 일제히 남하했다.
세 방향에서 달려온 그들은 영묘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집결했다.
* * *
“참을 수가 없네요.”
화려한 집기가 놓인 방.
정도맹에 방문한 귀빈들을 위한 객청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후개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갈 기세.
침상에 누워 있던 규화신개가 슬쩍 눈을 떴다.
“왜? 무엇이 문제더냐?”
후개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곤 알면서 왜 묻냐는 듯 언성을 높였다.
“방주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직접 행차하셨습니다! 한데 접견조차 이루어지지 않다니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지만, 결국 우릴 무시하는 게 아닙니까?”
백호대를 보내서 총타를 둘러싼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짓거리다.
백 번 양보해 정말 의심을 했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용두방주가 직접 왔는데 수일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후개는 맹주를 향해 분노를 토해냈다.
“흥분하지 말거라.”
반면 규화신개는 전혀 화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기침 때문에 쿨럭이던 그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이 정도 압박에 평정을 잃어선 안 되느니. 도리어 확실해지지 않았느냐. 맹주가 원하는 게.”
“……?”
후개는 영민했지만, 그건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경험한 부분에 한해서다.
정치적 줄다리기는 후개로선 관심을 둔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분야였다.
“백호대를 보내서 눈치를 주고, 직접 방문하니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에둘러 표현하지만, 이건 거절이지.”
규화신개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숙이고 들어오란 뜻이다. 맹주가 그동안 감추었던 속내를 드러낸 것이야.”
“그게 무슨….”
후개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고, 규화신개는 계속 말했다.
“정사대전이 벌어지기 전이었다면, 내가 건재했다면 이러지 못했겠지. 맹주의 위상이 달라졌단 뜻이기도 하다.”
그러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리고 맹주가 원하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본방의 정보력. 그걸 수중에 넣고 싶은 거겠지. 협력 차원이 아니라 직속에 가까운 관계로서.”
규화신개는 잠시 쉬었다가 덧붙였다.
“협력자가 아닌, 말 잘 듣는 개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마치 저 신룡처럼.”
불세출의 지자.
하지만 제갈준은 맹에 들어온 이후, 그답지 않은 지략들을 내놓으며 변해가고 있었다.
용두방주는 그 이면에 맹주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난 병마에 시달리고 있고, 넌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니냐. 개방을 길들이기에는.”
“그것이….”
후개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용두방주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지만, 굽히지 않는다면 압박의 수위는 점점 거세지겠지.”
규화신개는 쿨럭이며 기침을 토하다가 눈을 떴다.
그러곤 하나뿐인 후계자를 바라봤다.
“선택의 시간이다. 넌 어떻게 하고 싶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