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어떻게 하다니…….”
물으나 마나가 아닌가.
이런 치졸한 짓거리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정치는 모르지만, 도리는 안다.
재물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다.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개방의 앞날을 생각하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규화신개는 후개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그래서 또 한번 물었다.
“적당히 굽히는 게 본방의 앞날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말이냐?”
“…….”
후개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규화신개가 말을 덧붙였다.
“정파인 이상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진 못할 것이다. 맹주는 노회한 자야. 사람을 다루는 데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
규화신개는 굳은 표정을 한 후개의 반응을 살피곤 재차 입을 열었다.
“맹주의 그늘에 들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을 게야. 본방의 특성상 이용가치가 크기 때문에 상당히 괜찮은 대우를 받겠지. 잃는 건 하나다. 너의 자존심.”
말없이 서 있는 후개에게, 규화신개가 물었다.
“다시 물으마. 넌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후개가 고개를 번쩍 들며 대꾸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용두방주의 자존심이 곧 개방의 자존심입니다. 저는 방주님께서 허리를 굽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겠죠.”
후개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차라리 면전에 대고 말했다면 고민할 여지라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맹주의 됨됨이를 알겠어요.”
후개는 고개를 돌려 운남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친애하는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맹주는 저를, 그리고 개방을 담을 그릇이 못 되네요.”
후개의 말투가 변하고 있었다.
여유를 찾고 있다는 증거였다.
“제자, 미욱하지만 한 가지는 아네요. 한 번 굽히면 끝까지 굽혀야 한다는 것. 진정으로 개방을 생각한다면 그런 결정을 내려선 안 된다고 믿네요.”
“맹주의 압박이 거세지면 어쩔 거냐? 말도 안 되는 혐의를 씌우고, 권력과 힘으로 압력을 가한다면? 맹에서의 본방의 입지를 축소하고, 의결권을 박탈하면?”
후개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대꾸했다.
“해볼 테면 해보라죠. 본방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줄 테니. 묵사발을 만들 자신 있네요.”
규화신개가 후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흠. 역시 내 눈은 쓸 만하다니까? 밥 달라고 질질 짜던 꼬맹이가 제법 괜찮은 눈을 하게 됐구나.”
후개는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용두방주의 시험을 통과했다는걸.
어쩌면 스승은 백호대가 총타를 둘러싼 시점부터 맹주가 접견을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기 위해서.
후개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방주님도 참 너무하시어요. 그냥 총타에서 물어도 될 걸 굳이 여기까지….”
“음? 눈치챘느냐?”
규화신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은 곧 기침으로 바뀌었다.
“쿨룩, 쿨룩…!”
후개의 표정이 변하더니 규화신개에게 달려왔다.
그는 스승을 부축하는 한편 탕약을 준비했다.
“그러게 몸도 안 좋으신데 왜 무리를…….”
“실제 상황이 닥쳐야 본심이 나오니까. 네가 잔머리 살살 굴리면서 듣기 좋은 말만 하면 내가 어찌 알겠느냐?”
후개가 입을 삐죽댔다.
그는 규화신개가 탕약을 들이켜는 걸 기다린 뒤에 부축했다.
“총타로 돌아가요. 비위가 상해서 여기 더는 못 있겠네요.”
정도맹을 나서는 길.
잘 닦인 관도에 접어들자, 사방에서 걸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원이 육결 이상의 매듭을 단 그들은 추레한 행색과 달리 날카로운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호법 외에도 스무 명 가까이가 따라붙자, 개방의 행렬은 대단한 위용을 뽐냈다.
“며칠이 지나도록 나오질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맹주는 못 만나신 겁니까?”
후개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위를 담당하는 걸개의 표정이 굳었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망할 놈 같으니라고. 잘하셨습니다, 후개 님. 혹시 모르니 만반의 대비를 갖추겠습니다.”
육결과 칠결이면 법개와 장로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은 용두방주가 맹에 방문한 목적을 알고 있었다.
“뭐야? 나 빼고는 다 알고 있는 거였네요?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나중에 고기반찬 생기면 나눠줄 텐데.”
후개가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걸개는 흡족하게 웃었고, 그간 입수한 정보들을 건넸다.
“……이런 상황입니다. 운남에서 주목할 건 두 가지. 야수족의 동향과 마인들의 출현입니다.”
“야수족은 당연한 건데, 마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어요?”
용두방주가 총타를 나서자, 백호대는 철수했다.
개방은 맹의 제재가 풀리자마자 정예들을 파견했다.
맹주의 간섭 때문에 운남의 정세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무림공적으로 몰려서 잠적했던 자들.
전대의 마인들이 떼거리로 나타난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저희나 하오문이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전부 죽어 있었거든요. 제자들이 놈들의 용모파기를 기억하고 있었습죠.”
“전멸? 그런 놈들이 뭉쳐서 나타났는데 죽었다고요?”
걸개는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네. 광혈마라는 놈이 대장인 듯합니다. 혈왕출세라는 독문무공이 유명했죠. 그의 시체에는 수왕의 권흔이 남아 있었습니다.”
걸개는 거기까지 말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문제는 나머지 사십 명인데……. 대단히 예리한 검에 베였습니다. 절단면으로 보아 신병이기가 분명한데, 검사의 수준이….”
“수준이 왜요?”
걸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독하리만치 형편없었습죠.”
“……무슨 말이어요? 그게?”
“초식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냥 지나치면서 힘으로 벤 게 분명합니다. 검이 아까울 정도였죠. 어이가 없는 건 그런 자에게 당했다는 겁니다. 전대의 마인 사십 명이, 손도 못 쓰고.”
후개도 덩달아 얼굴을 찌푸렸다.
실력이 형편없는 검사가 분수에 맞지 않는 보검을 지녔는데, 그걸로 마인 사십 명을 베었다?
반격도 못 할 만큼 압도적으로?
‘그게 가능한가?’
후개는 마른 비의 주변 인물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아는 선에서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검사는 없었다.
“……수왕이 또 희한한 친구를 사귀었나 보네요.”
그게 후개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아무리 개방이라도 별비가 검을 물고 날뛴 걸 상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인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한데 뭉칠 수 없는 놈들이 무리를 이뤘으니까요.”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알리는 징조였다.
따로 명을 내리지 않아도 그들을 찾기 위한 탐색망이 가동되고 있으리라.
후개는 일단락된 마인들의 문제에서 와족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왕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후개가 마른 비를 언급하자, 걸개의 얼굴엔 경외심이 떠올랐다.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용병연합을 박살 낸 것부터 정파와 사파를 금광 앞에 묶어둔 것, 사천무림에 대한 급습, 운남을 야수족의 영역으로 선포한 것까지……. 칼날 위에 서서 기가 막힌 묘기를 선보이고 있어요.”
그는 말을 끊었다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어쩌면…… 우린 전설로 기록될 순간들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후한 평가였다.
후개는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감정이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지만, 그는 이제 마른 비를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 인간은 어딜 가나 시끌벅적했네요. 그런데 이번엔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하지만 위태로워요. 지금까지의 행보로 볼 때, 그는 멈추지 않을 거네요.”
후개는 상황을 되짚은 뒤에 말했다.
“비석을 세우고 추가적인 침입을 막은 것……. 기발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위험하네요. 욕망에 눈이 먼 자들이 계속 거기에 머물 리 없어요. 누군가 선을 넘으면 우르르 따라나서겠죠.”
“맞습니다. 소수로 움직이던 자들이 뭉칠 테고, 경각심을 느낀 세력들은 힘을 합치겠죠.”
걸개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현시점에서 가장 큰 변수는 맹주입니다. 소문대로 그가 움직인다면….”
후개도 들어서 알고 있다.
맹주가 직접 운남으로 내려갈 거라는 소문을.
하지만 그걸 들었을 때, 후개는 피식 웃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릴. 맹주는 절대 움직이지 못해요.”
“……?”
후개는 의아해하는 요원에게 설명했다.
“정사대전은 끝났지만, 사도련이 건재해요. 무엇보다 패군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죠.”
맹주는 지나치리만큼 신중한 성격이다.
그런 그가 발밑에 강대한 적을 두고 운남에 내려간다?
후개가 보기에 그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맹주는 움직이지 않아요. 차라리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건지 조사해야….”
“후개 님. 그게….”
후개가 확신 어린 어조로 말할 때, 걸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실제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패군이….”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후개의 눈이 커졌다.
* * *
장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각.
귀빈들만 오를 수 있는 꼭대기 층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가야금 소리가 은은히 번지는 가운데, 장대한 체구의 사내들이 자리를 메웠다.
주안상의 중앙에 앉은 사내가 미소를 띠며 술잔을 들었다.
“초청에 응해주어 고맙구려. 산과 강의 지배자가 한자리에 모이니 든든하기 그지없소.”
강바람이 사내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붉은빛.
분위기를 이끄는 건 태호천이었다.
그가 즐거워 보이는 반면, 좌우에 앉은 두 사람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은은한 살기를 뿌렸다.
진산투왕과 폭룡.
녹림십팔채의 두령과 장강수로십팔채의 영수는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총채주.”
초패가 마맹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양 진영에서 딱 두 명씩만 출입이 허가된 자리.
마맹산이 초패와 동석했듯 폭룡도 수하 한 명을 데려왔는데, 그는 처음 보는 자였다.
옆구리를 찔린 마맹산이 움찔하며 술잔을 들었다.
“커흠. 초청해주셔서 감사하외다, 련주.”
마맹산은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건너편에 앉은 노인에게 말했다.
“그쪽도 오랜만이외다. 늙… 아니, 폭룡.”
‘늙은이’라고 하려던 게 분명하다.
그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쓸어 넘긴 백발에 두건을 쓴 사내.
태호천보다도 커다란 몸집을 지닌 노인은 마맹산에 뒤지지 않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듯한 사내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애송아. 련주께 감사하거라. 네가 입을 나불댈 수 있는 건 오로지 련주 덕분이니.”
진산채와 폭룡채의 칠 주야에 걸친 전쟁이 끝났을 때, 폭룡은 선언했다.
다시 보게 되면 마맹산의 머리통을 부숴놓겠다고.
하지만 그건 진산투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짝 열고 들어갔어야 할 늙은이가 주둥이만 살았군. 련주께 양해를 구하고, 못다 한 승부를 가려볼까?”
연배를 고려하여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인데, 저따위로 받는다.
마맹산은 이 이상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살기를 일으키자, 전각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태호천이 홀로 술을 들이켰다.
그러곤 씩 웃으며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쳤다.
“까짓거 시원하게 한판 붙으시오. 내가 입회인이 되지. 진산투왕 대 폭룡이라…. 아주 흥미로워.”
“…….”
초패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당연히 말릴 줄 알았는데 되려 싸움을 붙이다니?
눈이 반짝거리는 게, 패군은 진심으로 신나 보였다.
“참으십쇼, 총채주. 오면서 몇 번이나 다짐했잖소.”
초패가 나지막이 말렸고,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저 늙은이가 도발을 하잖나!”
마맹산은 억울하다는 듯 그를 돌아봤다.
초패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 때였다.
“음?!”
무언가가 초패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 이건…!’
콧속을 파고드는 달착지근한 냄새.
죽었다 깨어나도 잊을 수 없는 향이었다.
초패의 시선이 폭룡의 옆에 앉은 사내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