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뭐 하는 놈이지?’
스물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다.
해사한 얼굴과 하얀 피부는 무인이라기보다는 책사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사내를 살필수록, 초패의 눈이 가늘어졌다.
‘흑사어가 수왕에게 덤볐다가 죽었다고 했어. 그럼 저놈이 소기악의 자리를 꿰찬 놈이란 말인데….’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소기악은 장강의 이인자라 불릴 만한 놈이었다.
흑교섬 덕분이긴 하나 무공도 쓸 만했고, 세력을 불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잔인하고 악랄한 심성은 적에게 두려움을 주었으며, 공을 세우는 데 혈안이 돼 있어서 어지간한 일은 전부 그의 선에서 정리됐다.
폭룡 입장에서는 측근으로 둘 만한 존재였던 것이다.
‘한데 저놈은….’
아무리 살펴도 특별한 게 없다.
존재감도 별 볼일 없으며, 무인 특유의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폭룡이 왜 저런 놈을 옆에 두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평범했다.
‘머리를 쓰는 놈이겠군.’
그것 말고는 이 중요한 자리에 동석할 이유가 없다.
초패는 그렇게 사내에 대한 판단을 마쳤고, 다시 후각에 집중했다.
그런데….
‘……향이 사라졌어? 내가 잘못 맡은 건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코를 간질이는 거라곤 식욕을 돋우는 음식 냄새와 향긋한 주향뿐.
‘뭐지? 그 특이한 향을 착각할 리가 없는데….’
초패가 지그시 인상을 쓸 때였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마맹산이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칠십이 다 된 노인네가 지칠 줄을 모르는군. 그 나이 먹고 만날 눈에 힘주고 다니면 안 피곤하오?”
언뜻 들으면 시비를 거는 것 같지만, 그건 마맹산 나름의 화해 시도였다.
폭룡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곤 픽 웃었다.
“내가 할 말이다, 애송아. 수틀리면 주먹부터 휘두르는 무식한 놈에게 그런 소릴 듣다니…. 두고 봐라. 내 나이가 되면 넌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 테니.”
폭룡이 마맹산의 화해 제의를 받아들였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끝을 모르고 치솟던 살기가 누그러지자, 태호천이 중얼댔다.
“음? 안 싸우는 거요? 술이랑 안주 다 챙겨놨는데?”
“…….”
산과 강의 지배자들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크흠! 련주께서 싸움 구경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던데, 사실이었구려.”
마맹산이 헛기침을 하며 술병을 들었다.
그는 독주를 병째 들이붓더니 ‘크으~!’ 하며 입가를 닦았다.
“녹림과 수로맹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사적인 날이 아니오. 여기서 싸웠다간 한평생 머저리란 오명을 벗지 못하겠지.”
마맹산은 수육을 한 줌 쥐어서 입에 털어놓고, 으적으적 씹었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한자리에 앉힌 것. 장담컨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요. 사도칠문(邪道七門) 세 개에 해당하는 힘을 안겨드리리다, 련주.”
정파에 구파일방이 있다면, 사파에는 사도칠문이 존재한다.
그들은 역사와 전통이 길진 않지만, 힘만큼은 구파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마맹산은 녹림과 수로맹의 연합이 칠문 중 세 개 문파의 힘과 비슷하다고 자신한 것이다.
폭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구파에 밀릴 뿐, 한곳에 집결한 수로맹의 힘은 화산과도 한판 붙어볼 만하다고 자부하오. 녹림과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산과 강을 사도련의 손아귀에 둘 수 있지.”
지형의 이점.
그리고 압도적인 숫자.
그것이 진산투왕과 폭룡이 칠문 세 개의 전력이라 자신하는 근거였다.
태호천은 절대 섞일 수 없다고 여겨온 물과 기름을 한 병에 담는 데 성공했다.
“고맙소. 두 분 덕분에 겨우 사 호법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 련주씩이나 돼서 하는 게 뭐냐고 닦달을 해서 괴로웠다오. 계속 이따위로 굴면 떠나겠다고 협박까지 하더이다.”
진산투왕과 폭룡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태호천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자는 없었다.
패군을 향한 연무검의 충심은 유명했으니까.
“음. 진짠데….”
태호천이 들릴락 말락 중얼거릴 때, 폭룡이 말했다.
“패군의 무용담은 이 늙은이조차 반하게 만들었지. 련주이기에 가능한 일이오. 녹림과 수로맹을 한배에 태우는 건.”
폭룡은 자신보다 연하인 사내를 경외가 깃든 눈으로 바라봤다.
무력 하나로 사도련의 정점에 선 남자.
사파인들에게 태호천이란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만하시구려. 민망하니까. 여기 있는 사람 중 소싯적에 이름 날려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태호천은 겸연쩍은 듯 턱을 긁더니 술잔을 쭉 들이켰다.
그러곤 다시 잔을 채우고 들어 올렸다.
“자, 한잔합시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소. 그대들이 내 요청에 응한 것처럼 나 역시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리다.”
중원을 양분하는 세력의 지존이자, 천하최강을 다투는 무인.
그럼에도 이처럼 소탈하고, 담백하다.
그 점이 진산투왕과 폭룡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았다.
“그대가 그 유명한 호살권이군. 만나서 반갑네.”
자리가 무르익도록 초패는 폭룡의 옆에 앉은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호천이 먼저 인사를 건넨 뒤에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런 실례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련주.”
초패가 황급히 포권을 건넸다.
엉뚱한 놈에게 한눈을 팔았지만, 그 역시 패군을 흠모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눈으로 반가움을 표한 련주가 폭룡 옆에 앉은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데… 그대는 처음 보는군.”
초패가 내내 시선을 떼지 못했던 청년.
그가 빙긋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키힛! 모르실 수밖에 없죠. 세상에 나온 적이 없으니. 수로맹에서도 이제 겨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답니다.”
청년은 술병을 들더니 느긋하게 술잔을 채웠다.
“랄라~ 천하에 이름을 날린 영웅들을 뵙게 돼서 기분이 좋네요. 듣고 잊어버릴 이름보다는 별호로 기억해주시기 바라요.”
청년은 천천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활추(猾鰍). 련주께서 기억해주시면 영광이겠네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녹림과 수로맹의 두령마저 경의를 표하는 패군 앞에서 위축된 기색이 없다.
무의 냄새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청년은 밑도 끝도 없이 당당했다.
‘저놈이 뭘 믿고 저렇게….’
초패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패군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교활한 미꾸라지라…. 어울리지 않는 별호로군. 차라리 주인을 잃은 흑사어의 이름을 쓰는 게 어떤가? 흉악한 송곳니를 감춘 자가 고작 미꾸라지라니?”
“……!”
침묵이 흘렀다.
진산투왕은 긴가민가하던 눈치였고, 폭룡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반면 초패와 활추는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송곳니라고?’
알아듣기 힘든 비유일 리 없다.
저건 말 그대로 힘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무인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게 뜻하는 바.
자신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초패는 믿을 수 없었다.
“하, 하하…! 역시… 명불허전이군요.”
활추도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활기를 가장했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가늘고 붉은 입술을 혀로 핥은 뒤에 말했다.
“숨기고 싶었는데 한눈에 간파하시네요. 행여나 오해는 마시길. 힘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을 뿐이에요.”
패군은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초패는 미동도 하지 않고 활추를 노려봤다.
‘정말로 저놈이 나보다….’
경각심이 든다.
자신보다 강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감춘 게 까발려진 뒤에 드러난 표정.
오랜 경험이 경고를 보냈다.
저건 대단히 위험한 놈이라고.
“……성에 차진 않지만, 련주께서 추천하시니 흑사어를 쓰는 걸 고려해보죠.”
활추가 대꾸했지만, 태호천은 이미 마맹산과 폭룡에게 시선을 돌린 뒤였다.
한참이나 늦게 대답한 데다가 속삭이듯 말한 걸로 보아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그 뒤에 일어났다.
활추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그어진 것이다.
세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느라 깨닫지 못했다.
오직 초패만이 미세한 변화를 읽어냈을 뿐.
‘저놈은 대체?’
무슨 말을 꺼낼까?
어떤 방식으로 떠봐야 저놈의 정체를 캘 수 있을 것인가.
‘제길. 이거야 원. 그냥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게 낫지….’
초패가 골머리를 앓을 때였다.
활추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갔다.
그는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던 초패를 똑바로 바라봤다.
‘……!’
활추가 웃었다.
보일 듯 말 듯 해 알아채기도 힘들지만, 활추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했다.
‘이 새끼가…!’
초패가 욱해서 고함을 지르려 할 때였다.
호탕하게 웃던 폭룡이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술잔을 내려놨다.
“으음….”
맞은편에서 껄껄거리던 마맹산이 웃음을 그치며 물었다.
“어? 영감. 왜 그러시오? 어디가 안 좋소?”
폭룡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통증이 있는지 인상까지 찡그렸다.
“죽을 때가 됐나……. 일 년 전부터 시시때때로 이러는군. 뇌가 울려. 머리도 지끈거리고.”
“……두통인가? 그거 아프오? 아파본 적이 없어서 어떤지를 모르겠군. 영감 같은 고수도 그런 걸 앓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인이라고 아프지 말란 법 없고, 나이도 있으니 지병 한두 개쯤은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러기에 폭룡은 너무 강했다.
마맹산과 일전을 겨루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그토록 정정한 자가 두통 따위에 시달린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드문 경우였다.
“으음…. 용하다는 의원들에게 보여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더군. 증상은 있는데, 원인을 알 수가 없다나? 돌팔이들 같으니라고.”
폭룡은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태호천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본련에 뛰어난 의원이 있소. 그에게 보이도록 하지. 백원 의원 출신이라 믿어도 될 것이오.”
“으음…. 괴의의 제자인가? 그럼 믿을 만하지. 고맙소이다, 련주.”
태호천이 고개를 돌려서 의원을 데려오라고 지시할 때였다.
달큼한 냄새가 공기 중에 확 번졌다.
‘음?!’
초패가 눈썹을 꿈틀댔다.
그가 활추를 돌아볼 때, 폭룡이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했다.
“으, 으윽…! 큭…!”
통증이 심해진 듯 그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어, 어라? 영감, 괜찮소?”
마맹산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술기운을 억누르지 않은 그는 얼굴에 불콰한 주기(酒氣)가 맴돌았다.
“이보시오, 영감. 많이 아프오? 아니, 이게 무슨……. 천하의 폭룡이 그까짓 두통 때문에….”
마맹산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때, 폭룡이 고개를 들었다.
“으, 크윽…! 닥쳐라. 네가 뭘 안다고….”
실핏줄이 터진 걸까?
폭룡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그것만으로 눈이 저토록 붉을 순 없다.
그의 몸에서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혈기(血氣)가 스멀댔다.
“아니, 뭘 또 그리 예민하게 받아들이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오. 난 그냥 걱정이 돼서….”
화해를 한 이후, 마맹산은 예전 일을 말끔히 잊었다.
그가 사과하며 다가갈 때였다.
「라랄라~ 이때다~! 꽝!!」
괴상망측한 전음이 초패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투쾅―!
마맹산이 피를 뿜으며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