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초, 총채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이기도 했다.
폭룡이 갑자기 마맹산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후우욱…….”
눈이 붉게 물든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뒤로 손을 뻗자, 전각 아래에서 거대한 언월도가 날아 올라왔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미친 것이오, 폭룡?!”
초패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 초패에게만 들리는 전음이 날아들었다.
「키득.」
“……?!”
폭룡의 뒤.
장대한 체구에 가려진 사내가 웃음을 흘렸다.
그건 비웃음이요, 도발이 분명했다.
동시에 음식과 술 냄새와는 확연히 다른 향이 후각을 간질였다.
“이 새끼가아아! 네놈의 짓이구나!!”
착각이 아니었다.
여산에서 맡아봤던 냄새.
환희문이 녹림의 형제들을 공격할 때 사용한 약향(藥香)이 분명했다.
꿈에서도 찾아 헤맸던 적을 발견한 순간, 초패는 눈이 뒤집혔다.
“이리 와라! 네놈을 고문해서라도 실체를 밝혀내고 말 것이다!”
초패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호살열아가 빛을 뿜으려는 찰나, 전음이 들렸다.
「키킥! 그따위 실력으로?」
그리고, 그늘이 드리웠다.
“……?!”
활추를 막아선 거한.
횡으로 휘둘러진 언월도가 초패를 날려버렸다.
“크헉…!”
권갑이 있었다면 이토록 맥없이 밀리진 않았을 텐데.
가슴이 베인 초패가 붕 떠올랐다가 마맹산의 옆에 처박혔다.
“꺄아아악!”
무희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전각이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녹림의 인물들을 쓰러뜨린 장강의 지배자가 신음을 흘렸다.
“크으으….”
붉은 눈으로 거칠게 숨을 내쉬는 폭룡은 한 마리 짐승 같았다.
그는 초패를 날려버리자마자 마맹산을 향해 돌진했다.
“쿨럭! 컥…!”
벽에 처박힌 마맹산이 피를 울컥 뿜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언월도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폭룡을 발견했다.
“초 호법…! 이… 미친 늙은이가!!”
병기는 일 층에 두고 올라왔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내상을 입었다.
하지만 마맹산은 도망칠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는 피를 퉤 뱉고, 몸을 일으켰다.
“비열한 자라 새끼가…! 덤벼라! 죽여주마!”
진산투왕.
마맹산은 별호답게 투지를 불살랐다.
하지만 병기도 없고, 위중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에게 승산은 없었다.
후아아악―!
폭룡아(暴龍牙).
전선을 일 합에 침몰시키는 광격 앞에서, 마맹산은 죽음을 예감했다.
추아아악―!
피부가 갈리고, 핏물이 터졌다.
한데 마땅히 뒤따라야 할 대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
폭룡 필생의 절기를 막아낸 건 련주였다.
뚝, 뚝…….
팔뚝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육중한 언월도가 맨손에 가로막혔다.
전력을 끌어올린 폭룡과 달리 갑작스런 난입으로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에도 태호천은 도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왼팔에 깊은 부상을 입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크, 으으…!”
폭룡이 이를 드러내며 힘을 더했지만, 언월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패군이 입술을 뗐다.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공허한 물음이었다.
척 봐도 폭룡은 이성이 날아갔고, 끝을 모를 분노만 토해내고 있었다.
노인은 괴수처럼 울부짖으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로군.”
언월도에 찍한 팔뚝이 허연 뼈를 드러냈다.
새빨간 피가 줄줄 흘렀지만, 패군은 침착했다.
“중요한 건 내 앞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것.”
이성이 날아갔든 말든 그건 저쪽 사정이다.
손님으로 와서 다른 손님에게 기습을 가하고, 연회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태호천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치솟았다.
“죽더라도 원망하지 말도록.”
투콰앙―!
일격.
한 방이면 충분하다.
적사자기가 깃든 오른 주먹이 폭룡의 얼굴을 후려쳤다.
장강 대함대의 지배자가 하늘을 날아서 반대편에 처박혔다.
폭룡이 꿈틀거리는 가운데, 활추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게 패군인가!’
폭룡이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좀 더 버텼을 것이다.
일을 벌인 이상 련주의 개입은 예정된 수순이었고, 활추는 사파 지존의 전력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성이 날아간 폭룡으로는 그의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란 말이지?’
등이 축축하다.
순간 견식한 적사자기만으로도 솜털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활추는 혹시나 가능성이 보이면 시행하려던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어림도 없겠는데?’
준비한 계획이 휴짓조각이 됐음에도 활추는 미소를 지었다.
삼 년도 안 되는 시간으로 무너뜨릴 정도라면 너무 싱겁다.
이 정도는 되어야 잡아먹는 맛이 있지 않겠나.
‘키킥! 천천히 가야지, 천천히. 일단은 폭룡부터 완전히 집어삼키고 나서….’
생각을 마친 활추가 소리쳤다.
“폭룡채! 총채주께서 피습을 당했다! 폭룡전단(暴龍戰團)은 채주를 모셔라!”
태호천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피습? 피습이라니? 네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우드드득!
전각의 바닥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둔중한 무언가가 천장을 뚫고 올라왔다.
쾅! 쾅! 쾅! 콰쾅―!
이기어도. 허공섭물.
뭐라고 부르든 관계없다.
패군의 부름에 이끌린 애도가 전각을 뚫고 수직으로 치솟았다.
천하팔대신병의 하나.
패군이 적사자도(赤獅子刀)를 손에 쥔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세가 전각을 뒤덮었다.
“으으… 이건 너무하잖아?”
상상을 초월하는 무력.
활추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아이, 안 되는데. 이건 곤란해.”
심각한 오판이었다.
잘하면 홀로 있는 련주를 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건 너무 터무니없다.
패군을 잡지 못한 이상, 폭룡을 살려서 돌아가야 하는데 까딱하면 여기서 다 죽게 생겼다.
활추는 앞섶을 헤쳐서 지니고 있는 약포(藥包)를 전부 꺼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입에 쑤셔 넣었다.
“뭘 먹는 거냐?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무슨 꿍꿍이지?”
태호천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사이, 활추는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을 까뒤집었다.
그러곤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전신의 감각이 열리고, 잠력이 격발된다.
생기까지 깎아 먹는 환단을 삼켰음에도 활추는 패군을 이길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팔!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은 왜 아직도…!”
활추의 얼굴에 핏줄이 불거졌다.
그리고 마치 인격이 변한 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질 때, 기다리던 병력이 당도했다.
“총채주!!!”
“교아채 채주의 말이 맞았다! 싸움이 벌어졌어!”
“아래에 있던 잔챙이들은 정리했다! 총채주를 지켜라!”
패군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교아채의 채주? 네놈이 소기악의 수채를 이어받은 거냐?”
활추는 대꾸하지 않았다.
언제든 날아오를 채비를 한 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날 뿐.
“병력이 당도하는 시간을 보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 이러려고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냐?”
패군의 기세가 일변했다.
투기만을 내비치던 그가 온몸이 저릿저릿한 살기를 뿜어냈다.
붉은 머리칼이 사자의 갈기처럼 뻗치고, 전각의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떠올랐다.
“네놈들이… 감히 나를 상대로 모략을 꾸몄단 말이지?”
패군이 진정한 힘을 드러냈다.
진신전력을 개방한 적사자 앞에서 장강의 최정예가 두려움에 떨었다.
“으, 으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오! 왜, 왜 련주가 우리에게?!”
폭룡전단은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대기하라는 언질만 받았을 뿐이다.
진산투왕과의 알력 때문에 그러는 건가 싶었는데, 난데없이 패군이라니?!
“시끄럽다! 비루먹은 개새끼들아! 총채주께서 쓰러진 게 안 보이느냐! 주둥이 터는 건 나중에 해! 일단 여기서 벗어난다!”
“벗어난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패군이 적사자도를 들어 올렸다.
강대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붉은 살의가 폭룡전단을 덮쳤다.
“빌어먹을! 쳐랏!!”
“으, 으아아아!”
일 대 백.
아니, 활추까지 쳐서 일 대 백일.
장강의 수려한 경치를 담은 전각이 굉음을 뿌리며 터져 나갔다.
* * *
“꾸룩, 꾹꾹꾹, 꾸!”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삼림에 번졌다.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활엽(闊葉) 사이로 새가 날아오를 때였다.
“차앗!”
나뭇잎을 뚫고 솟은 검이 비둘기의 몸통을 꿰었다.
“꾹…!”
산비둘기는 외마디 비명만 남긴 채 날아오르다 말고 추락했다.
“됐어! 잡았다!”
네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
검을 찬 무인들이 후다닥 다가와서 비둘기를 챙겼다.
“한 시진 만에 발견한 게 고작 비둘기라니…….”
검을 던진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의 어조에선 실망이 짙게 묻어났다.
여인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이게 어디예요. 요즘은 산새도 찾기가 힘들어요. 이 일대의 동물은 완전히 씨가 말랐다고요.”
금광 앞에서 사도련과 대치한 지 수 개월.
운남에 진입한 정파의 무인들은 창룡검대를 중심으로 뭉쳤다.
수왕이 아니었다면 금광은 사도련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그가 녹림을 통솔하는 독고길을 죽이고, 야수족이 숫자를 줄여놓지 않았다면 대치할 엄두도 못 냈으리라.
힘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새로운 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어왔다.
그중에는 정사지간에 속한 무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정파와 사파 중 어느 한곳에 몸담은 자들이었다.
‘우리를 압도할 병력이 모이는 순간, 사파 놈들은 칼을 들 것이다! 정파인이라면 무조건 끌어모아!’
그렇게 정파와 사파는 경쟁하듯 세를 불렸다.
금광이 코앞에 있는데, 누구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놈들을 치워야만 금광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맨 처음 금광을 발견한 자들의 증언과, 그들이 들고나온 금광석은 중원인들의 눈을 뒤집어 버렸다.
그렇게 극한의 대치가 이어진 지 수 개월.
가져온 식량은 애초에 동났다.
총합 삼천오백에 달하는 인간이 죽치고 앉아서 먹어만 대니, 일대의 짐승이 씨가 마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요?”
여인이 한탄하듯 읊조렸다.
동물은 물론이고 열매나 식용 식물마저 초토화됐다.
식량을 구하는 데 쓰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만 간다.
이토록 풍성한 대자연에서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한다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싸움보다 그들을 짜증 나게 하는 건 식량 문제였다.
“그리 멀진 않을 거요. 이 지긋지긋한 대치가 끝나는 날이.”
“……?”
여인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검을 던졌던 사내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금일 아침, 맹주께서 정도맹을 나섰다는 소식이 당도했소. 그럼 길을 나선 지 꽤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소이까?”
사내는 수풀을 검으로 헤치며 나아갔다.
그러면서 계속 중얼댔다.
“사도련이 움직일 걸 걱정했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 패군이 부상을 입고 요양 중이라는 정보가 입수됐거든.”
사내는 검을 놀리며 쭉쭉 나아갔다.
“패군은 녹림과 수로맹을 휘하에 두려고 한 모양이더군. 처음에 들었을 땐 기겁을 했지. 만약 그리된다면 사도련은 날개를 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연합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내분이 벌어졌다나 뭐라나. 사파 놈들이야 뻔하지 않소이까. 이권을 놓고 다툰 게 틀림없소. 안 봐도 훤하지.”
사내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녹림을 흡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패군과 진산투왕, 호살권이 부상을 입었소. 폭룡도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쳤다고 하고, 폭룡전단은 몰살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지. 이거야 원, 손도 안 대고 코 푼 격이 아닌가.”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정체 모를 자가 엄청난 무위로 패군의 손아귀에서 폭룡을 빼돌렸다고 하는데, 그자도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어찌 됐든 그 덕에 맹주께서 운신이 자유로워졌다, 이 말이오.”
한참을 주절거리던 사내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내 말, 듣고 있소?”
“어. 듣고 있어.”
처음 듣는 목소리다.
하지만 음성의 주인을 본 순간, 사내는 얼어붙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흥미진진하네. 계속 말해 봐.”
목이 꺾인 채로 죽은 네 명의 동료들.
마른 비가 혼자 남은 사내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