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27화 (427/463)

427화

“으아아아아!”

처절한 비명이 숲을 흔들었다.

홀로 남은 사내는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지만, 마른 비에게 생채기도 낼 수 없었다.

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무력.

사내는 극심한 좌절에 휩싸였다.

‘왜,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냐?’

그를 더욱 절망에 빠뜨리는 건 소리를 질러도 달려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금광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뉜 정파와 사파는 보이지 않는 선을 그은 것처럼 상대의 영역을 침범치 않았다.

그리고 주변의 동물이 씨가 마르자, 점점 먼 곳까지 식량을 구하러 나섰다.

암묵적으로 서로를 공격하지 않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에 함께 나온 조들이 있을 텐데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지원 병력이 오지 않았다.

그게 의미하는 건….

‘다, 다 죽은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용할 리 없다.

사내는 저항 의지를 상실한 채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포기한 거야?”

마른 비가 물었지만, 사내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선택해. 아는 걸 털어놓고 깔끔하게 죽을지,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 고통에 시달릴지.”

“사, 살려주면….”

“안 돼.”

마른 비는 단호했다.

그를 마주친 시점에서 사내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푸른 숲이 붉은 피로 번져 간다.

금광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 식량을 구하러 나온 정파와 사파의 무인들이 몰살했다.

연락을 주고받는 자들까지 한 명도 남김없이.

지형에 익숙한 와족의 전사들은 외곽에서부터 둥근 선을 그리며 적들을 도륙했다.

“푸륵, 푸르륵…!”

“어엇! 멧돼지다!”

“잡아! 절대 놓치지 마!”

습격하기 애매한 위치에 있는 자들은 반려수를 이용해 꾀어냈다.

멧돼지나 사슴, 족제비와 같은 반려수를 보내자, 굶주린 자들이 이성을 잃고 쫓아왔다.

짐승에 정신이 팔린 자들을 암습하는 건 쉬웠다.

사냥조는 변변찮은 저항 한번 못해보고 전멸했다.

“곧바로 이동해. 영묘에 있는 놈들이 알아채기 전에 작업을 끝낸다.”

정파를 습격했던 전사들은 사파 쪽으로, 사파를 소탕한 자들은 정파 쪽으로.

와족은 기습에 성공하자마자 서로의 위치를 바꿨다.

그들의 손에는 적의 무기와 시체가 들려 있었다.

“놈들은 수십 개의 세력이 모여 있어. 흉수가 우리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야.”

“많이도 필요 없어. 문파를 상징하는 무기를 서너 개만 떨어뜨려 놔. 격전 끝에 실수로 잃어버린 것처럼.”

“습격을 마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다가 죽은 것처럼 위장해. 상흔을 훼손해서 우리의 흔적을 지우고.”

와족은 응목대가 썼던 수법을 그대로 흉내 냈다.

적의 병기로 시체를 훼손하고, 상대의 진영으로 넘어와 습격을 가한 것처럼 위장했다.

작업이 마무리되자, 광범위 야수 제어를 퍼뜨렸다.

『전부 이동해! 최대한 멀리. 이 주변에 남아 있지 마!』

짐승은 물론이고, 작은 벌레들까지.

식량이 될 만한 생명체를 남김없이 몰아냈다.

이제 주변에 남은 건 식용식물과 열매뿐이었다.

그마저도 금광에서 한참을 나와야 구할 수 있으며, 그것만으로 삼천 명이 넘는 사람의 배를 채우는 건 요원한 일이다.

와족은 교란책을 펴는 한편, 적들을 굶기기로 작심했다.

일을 마친 와족은 처음 모였던 밀림에서 다시 만났다.

“머지않아 반응이 올 거야. 준비한 건 어떻게 됐어, 비아야?”

노을이 묻자, 마른 비가 대꾸했다.

“언제든지. 다만 예정보다 서둘러야 할 것 같아. 막강한 적이 내려오고 있어.”

“막강한 적?”

마른 비는 새로 입수한 정보를 공유했다.

정도맹주가 운남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그게 사실이라면 금광 앞에서 고착된 힘의 균형이 깨진다.

아울러 비석으로 막아놓은 적들까지 줄줄이 내려올 확률이 높았다.

“중원 최고를 다투는 자라고? 산 넘어 산이라더니….”

답답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백 명도 안 되는 전력으로 막아내기엔 너무나 많은 적들이 모이고 있다.

정말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분위기를 쇄신한 건 마른 비였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아니, 해내야만 해. 병기의 활용은 익숙해졌어?”

전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무기.

쓰면 쓸수록 굉장한 선물을 받았다는 게 실감된다.

전사들이 얻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영약도 전부 흡수했지?”

흑상의 비밀창고에서 챙겨온 영초.

마른 비나 노을, 그믐 같은 강자들에게는 별 효용이 없지만, 일반 전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약재다.

아창족의 보금자리에 머물 때 섭취한 그것들은 크고 작은 전투를 거치며 완전히 녹아서 전사들의 전투력을 상승시켜 주었다.

“좋아. 머지않아 기회가 올 거야. 틈이 보이면 곧바로 치고 들어가자.”

와족의 전사들이 분분히 몸을 일으켰다.

* * *

독랑채의 부채주 장우칠은 죽을 맛이었다.

독고길이 죽는 바람에 얼떨결에 녹림의 지휘자가 되었는데, 그에겐 다양한 산채에서 긁어모은 병력을 통솔할 능력이 없었다.

녹전단만 해도 그와 비슷한 실력을 지닌 자들이 수두룩했으며, 각 산채에서 파견 나온 부채주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무공도 지위도 어정쩡한 그의 말이 제대로 먹힐 리 없었다.

급기야 식량난이 가시화되고 정파와의 대치가 길어지자, 녹림도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들은 자리를 지키라는 장우칠의 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식량을 구하러 나섰다.

그건 사도련 또한 마찬가지여서 통제를 벗어나는 자들이 속출했다.

‘빌어먹을. 확실한 지휘자가 없으니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정파 놈들이 부러워질 줄이야.’

장우칠이 눈을 들어 건너편을 바라봤다.

정파도 온갖 세력이 모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에겐 확고한 구심점이 존재했다.

비류무정검 혁운상.

그는 의자에 앉아 꼿꼿이 허리를 편 채 장우칠을 노려보고 있었다.

백오십 명의 창룡검대가 그를 보좌하니, 정파는 혁운상을 중심으로 엄밀한 진형을 구축했다.

아군의 진형이 엉망이 될수록 장우칠은 안절부절못했고, 혁운상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랐다.

‘저놈… 우리가 지리멸렬하길 기다리고 있다! 이대로 가면 답이 안 나와! 철수해야 하나?’

천만다행인 건 후퇴가 가능할 거라는 점이다.

지휘 체계가 엉망일 뿐 병력은 여전히 사파가 더 많았다.

유혈 충돌 없이 금광을 접수할 수 있다면 괜히 싸움을 걸진 않을 터.

련주와 총채주의 부상 소식으로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사파는 악재가 겹쳤다.

‘제길. 조금만 더 버텨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장우칠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때였다.

사파의 진영을 가르며 전령이 뛰어왔다.

“부채주! 희소식이오! 지원군이 귀주의 경계를 넘어 운남에 진입했소!”

“뭣이라?! 지원군이라니? 누가 온단 말이냐?”

“사도칠문! 정사대전의 뒤처리가 끝나자마자 귀왕문(鬼王門)과 골육파각문(骨肉破却門)에서 병력을 파견했다 하오!”

불리한 형세를 뒤집는 소식이었다.

귀왕문은 정통의 검사들로 구성된 강골들이며, 골육파각문은 이름 그대로 인체를 부수고 깨뜨리는 데 특화된 자들이었다.

특히 골육파각문은 사로잡은 첩자를 고문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집단이다.

사도련에 소속돼 있지 않았다면 마인으로 낙인찍혔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들의 손속은 잔인했다.

“오오오오!”

“빌어먹을! 그래, 진작 이랬어야지!”

사도칠문이 합류한다면 힘의 균형은 확실하게 기운다.

무엇보다 더 이상 분수에 맞지 않는 지휘자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장우칠은 누구보다 안도하고 기뻐했다.

“귀왕문과 골육파각문이 야수족이 세운 비석을 부숴버렸다고 하오! 그리고 귀주 쪽에 모여 있던 정파 놈들을 쓸어버렸지!”

전령은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정파에 동요를 일으키려는 수작이었다.

“수왕의 경고 때문에 경계를 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사파 무인들이 전부 따라나섰소! 며칠 안으로 수백의 정예가 도착할 거란 말이외다!”

구파에 비견되는 사파의 거대 문파 둘이 금광을 집어삼키기 위해 남하 중이었다.

금광 앞에 자리 잡은 이후 한 번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혁운상이 침음했다.

“음…….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언젠간 사파의 정예가 움직이리라 생각했지만, 설마 맹주보다 빠를 줄이야.

‘군사회의에서 파병이 부결된 게 컸다……. 당가를 부추겨서 움직일 명분을 만들려 했는데, 그것마저 무산되는 통에…!’

야수족이 당가를 박살 낸 건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만만치 않던 전대 가주와 달리 당건휘는 이용하기 쉬운 자였고, 맹주는 비밀리에 서신을 띄웠다.

한데 뭘 해보기도 전에 초토화가 될 줄이야.

심지어 야수족은 아미와 청성까지 무너뜨렸다.

맹주는 그걸 빌미로 겨우 맹을 나섰지만, 명분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사도련에게 뒤처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도칠문이 도착하기 전에 승부를….’

혁운상이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숫자만 많을 뿐 구심점이 없고, 진형도 엉망진창인 놈들.

제법 피해를 입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다.

혁운상이 고민을 거듭할 때였다.

정파와 사파 양 진영이 동시에 술렁였다.

“아아… 아아아! 사형! 이게 무슨 일입니까!”

“으아아아! 아우야! 어떤 쳐 죽일 놈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

식량을 구하러 간 자들이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지인들이 그들을 찾으러 나섰다.

결과는 참담했다.

원시림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

살아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더러운 사파 새끼들아! 웬일로 얌전히 있나 했더니 역시 본성은 변하지가 않는구나! 언제 뒤로 돌아와서 암습을 한 것이냐!”

사형을 잃은 정파의 제자가 절규했다.

녹림으로 보이는 산적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개소리 하지 마라! 기습은 네놈들이 한 것이겠지! 봐라! 이 무복을! 정의문의 표식이 아니더냐!”

정파 진영에 섞여 있던 정의문의 제자들이 움찔했다.

그러나 곧 죽어 있는 게 자파의 제자임을 확인하고 눈이 뒤집혔다.

“무, 문승…! 그럴 리가 없다! 승이가 왜 그쪽에 넘어가 있단 말이냐! 분명 이 뒤로 식량을 구하러…!”

“명백한 증거가 있거늘 어디서 발뺌이냐! 우리를 기습하러 왔다가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죽은 게 아니냐! 이놈이 떨어뜨린 검도 찾았거늘, 어디서 연기를…!”

“웃기지 마라! 그건 우리가 할 말이다! 쇠도리깨를 휘두르는 머저리가 녹림 말고 또 있더냐! 이쪽에서 너희의 무기가 나왔단 말이다!”

난장판이었다.

사형제와 동료를 잃은 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악을 썼다.

그들은 검을 뽑은 채 당장이라도 상대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한 건 혁운상이었다.

‘내 명령 없이 적진으로 넘어갔다고?’

절대 그럴 리 없다.

혁운상은 그 부분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지휘 체계가 개판인 사파와 달리, 정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창룡검대가 정파에서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자신의 힘과 명성을 믿었다.

자신의 영향력이 건재한 이상 이런 돌발 행동을 벌일 자는 없으리라 확신한 것이다.

‘그럼 이건…!’

정파와 사파를 이간질하려는 계책.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었다.

사천을 무너뜨리고, 운남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한 자들.

수왕과 그의 부족이 벌인 짓이 틀림없었다.

“소란을 멈춰라! 이건 사파와 우리를 충돌시키려는 수왕의…!”

그때, 정파 진영 뒤쪽에서 빛이 번쩍였다.

혁운상조차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간 검은 형제를 잃고 비통해하는 녹림도의 머리를 꿰뚫었다.

“상칠! 이 개새끼들이…!”

눈이 뒤집힌 녹림도가 정파에게 달려들었다.

사형제를 잃은 정파의 무인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았다.

“네놈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전부 죽여주마!”

“아우의 원수를 갚겠다! 녹령채(綠靈寨)는 나를 따라라!”

말싸움이 전투로 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고함이 터지고, 육신이 으깨진 자들이 땅을 나뒹굴었다.

배고픔과 초조함, 긴장감에 짓눌린 채 몇 달을 보낸 자들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아, 안 돼! 멈춰라! 적의 계략이란 말이다!”

혁운상이 고함을 질렀지만, 상황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난 뒤였다.

정파 진영의 뒤편.

지형에 녹아든 마른 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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