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죽여라! 전부 죽여 버려!”
“정사대전이 찜찜하게 끝난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여기서 제대로 붙어보자!”
“누가 할 소릴! 모가질 내밀어라!”
살의가 충천한다.
꾹꾹 눌러놓은 적대감과 켜켜이 쌓인 증오가 재갈을 풀고 내달린다.
대치하는 기간 동안, 아니 일생에 걸쳐 누적된 혐오와 앙심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정파와 사파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를 죽이기 위해 내달렸다.
검과 도가 부딪히고, 악다구니 섞인 고함이 메아리쳤다.
머나먼 변방의 끝, 탐욕에서 시작된 불길이 삼천하고도 수백의 인간을 집어삼켰다.
“크아악!”
“죽어! 죽어어!!”
“아악! 내 눈…!”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이 병장기의 충돌음을 뒤덮었다.
폭죽처럼 비산하는 핏물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던 자들조차 살육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멈춰! 멈추란 말이다!”
미쳐 돌아가는 전장에서 이성을 붙잡은 자는 드물었다.
정파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다고 확신한 사내.
혁운상은 그것이 심각한 오판이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이 멍청한 놈들이…! 적의 계략임을 모르겠나?! 정신 차리란 말이다!”
고함을 치고, 윽박질러도 아무 소용이 없다.
눈이 돌아간 자들은 지금까지의 긴장과 초조, 허기를 적의 탓으로 돌리며 살육의 향연에 가담했다.
결국 혁운상도 피의 축제에 몸을 담글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젠장…! 창룡검대! 검진을 개방하라!”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서 사파 놈들을 물러서게 하고, 진형을 수습한다.
야수족 놈들이 개입하기 전에 양측을 뜯어말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전황이 유리하게 흐른다면, 사파를 전부 쓸어버리는 것까지 염두에 둔다.
혁운상은 검을 뽑아 들고 창룡검대의 선두에 섰다.
“적의 수장들을 요격한다! 일점타격진(一點打擊陣)! 나를 따르라!”
푸른 용이 전장을 헤집었다.
백오십 명에 불과하지만, 창룡검대는 정도맹을 대표하는 무력 집단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사파의 진영이 바다가 갈리듯 쪼개졌다.
검격이 휘날릴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일점 돌파를 행하고, 목표로 한 자의 머리를 날린다.
그러곤 곧바로 다음 표적에게 향한다.
전장에 흩어져 있던 사파의 수장들이 용의 먹이가 되어 쓰러졌다.
창룡담수(蒼龍嘾首).
입을 쩍 벌린 푸른 용이 적의 머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좋아! 이대로면…!’
전황이 뜻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광분해서 날뛰던 적들이 주춤대며 물러선다.
사파 무인들의 눈에 공포가 깃들자, 혁운상은 쾌감을 느꼈다.
‘싸움을 멈출 것인가, 이대로 쓸어버릴 것인가.’
전황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리.
힘을 가진 자의 특권이다.
이것이 바로 전장 한복판에서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쾌락이었다.
적들의 겁먹은 표정을 보며, 혁운상은 희열에 젖었다.
『지금이야. 뭉개버려.』
절정에서 나락으로.
혁운상의 기분을 바닥까지 추락시킬 음성이 들렸다.
혁운상만이 아니라 금광 앞에 모인 모든 이에게 절망을 안길 목소리였다.
“뿌오오오!”
거수의 울부짖음이 밀림을 뒤흔들었다.
서쪽 숲에서 튀어나온 건 야생곡의 지배자, 전상이었다.
날카로운 상아와 태산 같은 몸체.
전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코끼리 무리가 지축을 울리며 돌진했다.
“시아아아악!”
금광이 있는 산맥에서 출현한 건 남방 밀림의 패자, 대망이었다.
이무기라고 해도 믿을 만한 뱀은 등장만으로 중원인들의 전의를 꺾어버렸다.
파충류 특유의 습성 때문에 혼자 지낼 뿐, 대망은 운남을 살피는 눈들을 거느리고 있다.
마른 비의 요청을 받은 대망은 이번 전투에 자신의 입김이 닿는 금수를 모조리 집결시켰다.
“푸이익! 푸익!”
마른 비의 친구라면 이 녀석을 빼놓을 수 없다.
머리는 조금 모자라지만, 문산 일대의 폭군이라 불리는 코뿔소.
동쪽에서 나타난 광서우는 자랑하는 뿔을 세운 채 좌충우돌 날뛰었다.
“삐아아악!”
친구들을 부른 건 마른 비만이 아니다.
노을 역시 흰 수리들을 불러들였다.
설산 창공의 지배자들이 광서우를 지원하며 내리꽂혔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이것 설마, 수왕의…!”
정파와 사파가 일제히 싸움을 멈췄다.
그들은 동, 서, 남쪽에서 출현한 짐승들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괴수라 불러도 무방한 동물들.
운남의 야수 군단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들이닥치며 진형을 허물고 있었다.
“이익! 어디 금수 따위가 인간의 싸움에 끼어드느냐!”
사도련의 무인들이 검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하지만 검은 박히지도 않았고, 광서우의 뿔에 받혀서 하늘 멀리 날아갔다.
대망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전상이 이끄는 코끼리 무리에게는 감히 달려드는 무인도 없었다.
“조심해라! 평범한 짐승이 아니다!”
“조장! 이것들, 영수입니다! 기를 사용한다고요!”
사 년 전보다 월등히 강해진 각성수들.
전상, 대망, 광서우는 푸른 기운을 흩뿌리며 포효했다.
그러자 일대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광경.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물러나기 바빴다.
“에잇! 비켜라! 그래 봤자 짐승이 아니냐!”
녹전단과 사도련의 정예들이 나섰다.
정파 쪽도 검강을 다룰 줄 아는 고수들이 나서자, 야수들의 돌진이 주춤했다.
“봤느냐! 수왕과 야수족이 우리를 계략에 빠뜨린 것이다! 지금 우리끼리 싸웠다간 전멸할 뿐이야!”
휴전.
혁운상이 내린 결정이었다.
몇 달째 극한 대치를 벌이던 자들이 등을 맞댔다.
그건 북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원 내부에서는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여도, 강대한 이민족이 나타나면 똘똘 뭉친다.
하지만 혁운상은 또다시 오판을 했으니, 그가 결정을 내린 게 아니었다.
정파와 사파가 힘을 합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자.
중원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는 따로 있었다.
“와족! 돌격하라! 우리의 땅을 넘보는 침략자들을 섬멸해!”
마른 비의 외침은 본격적인 전투를 알리는 전고(戰鼓)였다.
북쪽 밀림이 열리며 운남 최후의 전사들이 밀어닥쳤다.
『오오오오!』
돌풍처럼 치솟는 광기!
전신화장이 빛나는 순간, 구십 명의 광전사들이 전투 함성을 토했다.
“크아아앙!”
“커허헝!”
“푸르르륵…!”
호랑이, 곰, 코뿔소, 멧돼지, 늑대와 승냥이부터 뿔을 앞세운 초식동물까지.
반려수들의 육신에서도 다채로운 무늬들이 번쩍였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영묘를 노리는 놈들에게 피의 대가를!”
노을이 선두에 서자, 산과 안개걸음, 어스름이 그녀를 보좌한다.
바위 곰, 나무표범, 검은 수리 전사들이 단단하게 뭉쳐서 뒤를 받치니, 와족의 진형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 금강석과 같았다.
“들이쳐라!”
투콰카카캉―!
마치 성문을 일격에 때려 부수는 공성추 같다.
중원인들이 밀집하여 대항했지만, 누구도 와족의 돌진을 늦추지 못했다.
휘돌아 나가는 등판이 강격을 쏟아내고, 폭우처럼 쏟아지는 다리가 적들의 전열을 뭉갰다.
수십 개의 손이 올빼미의 낙하 궤적을 그리니, 급소가 꿰뚫린 적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적 이백여 명이 목숨을 잃을 동안 쓰러진 와족 전사는 한 명도 없었다.
“무, 물러나라! 아예 상대가 안 돼…!”
“진형을 갖춰라! 다시 전열을 짜! 머릿수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사방을 에워싸고 야만인 놈들을 압박해!”
적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숫자로 밀어붙일 때쯤, 낭랑한 외침이 울렸다.
“아버지 하늘이시여. 끝 모를 투지에 어울리는 대자연의 힘을…!”
“어머니 대지시여. 이 땅을 수호하는 전사들을 굽어살피소서!”
광범위 술력.
푸르고 노란 기운이 내려앉자, 와족의 돌격은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더욱 날카롭고 단단해졌다.
와족은 산마저 뚫어버릴 기세로 적진을 돌파했다.
“별비야! 저쪽으로!”
“크하앙!”
여울은 별비의 등에 올라탄 채 적색분지에서의 한을 토해내듯 술력을 발산했다.
전사들과 따로 떨어져 있음에도 여울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별비는 물론이고, 그믐과 어둔 날개까지 그녀를 밀착 호위했으니까.
“일점타격진이라고 했지?”
전사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
노을이 있기에 마른 비는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백열갑을 두른 채 가장 먼저 적진에 난입한 그는 벌써 백 명에 가까운 적을 도륙한 뒤였다.
“괜찮은 전술이야.”
배울 만한 건 곧바로 흡수한다.
그건 타고난 재능이자, 마른 비의 최대 장점이었다.
창룡검대의 기동을 떠올린 그는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전상! 대망! 광서우! 이리 와!”
적들의 관심이 와족에게 쏠린 사이, 야수 군단은 파죽지세로 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짐승들을 통솔하던 각성수들이 마른 비의 부름을 듣고 진로를 틀었다.
“비켜! 이것들아!”
누구도 막지 못한다.
마른 비는 뻥 뚫린 대로를 달리듯 적진을 가로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원 기마대를 일직선으로 돌파한 경험이 있다.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전투마에 올라탄 초원의 전사들에 비하면, 정파와 사파 연합군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타앗!”
힘으로 뚫는 게 시간이 걸리자, 마른 비는 날아올랐다.
적들의 정수리를 밟아서 머리통을 으깨며 전진한다.
뻔히 달려오는 걸 보면서도 누구도 그의 다리를 피하지 못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신기.
마른 비는 적진을 뭉개며 그에게 다가오는 각성수들과 합류했다.
“잘 들어! 우리 넷이 적의 머리를 치는 거야!”
‘머리’에 해당하는 자들에게는 기겁할 만한 소식이었다.
크고 작은 세력을 이끄는 자들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수왕, 전상, 대망, 광서우.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괴물들이 한곳에 모이자, 기파가 흐르다 못해 끓어 넘쳤다.
“가자!!”
마른 비가 가장 먼저 지목한 건 녹전단이었다.
녹림을 대표하는 정예들이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밀집한 채 사방이 포위된 그들은 어디로도 갈 수 없었으니.
“뿌오오오―!”
해를 가려버리는 코끼리의 앞발은 헛웃음이 날 만큼 엄청난 광경이었다.
“자, 잠깐….”
콰지지직―!
인간에게 짓밟힌 개미 떼가 이러할까?
자연기가 실린 발 구르기에 녹전단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후속타가 날아왔으니, 단단한 비늘에 휩싸인 꼬리가 지면을 휩쓸었다.
“샤아아악!”
대망은 입을 쩍 벌리더니 녹전단을 쓸어 담았다.
그러곤 꿀꺽 삼켰다.
광서우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뿔을 세운 코뿔소가 사방팔방을 들이받자, 진형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아아악!”
“누, 누가 어떻게 좀…!”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세 마리의 거수를 부리는 마른 비는 중원인들에게 그의 별호가 왜 수왕인지를 똑똑히 각인시켰다.
각성수들이 힘을 합쳐 녹전단을 치웠다면, 마른 비는 곳곳에 틀어박힌 사파 수장들의 머리를 비틀었다.
콰지직! 우득! 빠득―!
빛이 번쩍이면, 어김없이 하나의 생명이 꺼졌다.
기운이 제법 강하다 싶으면 마른 비는 곧장 달려들어서 목을 뽑아버렸다.
사방에서 검날이 날아왔지만, 어느 것도 그의 육신을 해하지 못했다.
도리어 백열갑과 부딪힌 병장기들이 모조리 부러져 하늘을 날았다.
“저, 저런 걸 어찌 당한단 말이냐…!”
병력은 아직 충분했다.
제대로 된 지휘자나, 마른 비를 막을 만한 무인이 있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누구 하나 진형을 추스르려는 시도도, 사기를 북돋는 고함도 치지 못했다.
눈에 띄는 순간 목이 뽑혀버렸으니까.
“사파 연합군이라며? 고작 이 정도야?”
심지어 이들 중 상당수는 와족에게 깨졌던 전례가 있었다.
그때도 비키라는 말 한마디에 얼어붙어서 길을 내주지 않았던가.
“으, 으으….”
마른 비는 그와 맞섰던 사파인들에게 꿈에서도 떨칠 수 없는 공포를 새겨 넣었다.
“저런 멍청한 놈들! 비켜라!”
보다 못한 혁운상이 직접 나섰다.
그는 호통을 치며 창룡검대를 이끌고 사파 진영으로 난입했다.
이대로 두면 사파 연합군이 모래알처럼 흩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도 끝장이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수왕의 목을 따고, 미친 듯이 날뛰는 거수들을 잡아야 했다.
혁운상이 다시금 일점타격진을 준비할 때였다.
“어디가? 너는 우리랑 놀아야지.”
야생의 전사들을 이끄는 여인.
설산 흰 수리의 광격이 혁운상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