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29화 (429/463)

429화

쩌저저정―!

열 자루의 조도와 한 자루의 검이 충돌한다.

혁운상이 마른 비에게 향하려는 찰나, 전후좌우에서 내리긋는 맹공이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이…! 까불지 마랏! 내가 바로 비류무정검이다!”

노을이 압박이 거세지자, 혁운상의 검이 어지러운 궤적을 그렸다.

공방일체.

노을의 공격을 차단한 강기 다발이 두 개의 구(球)로 응집됐다.

그것은 지고한 경지를 개척한 검사의 전유물이었다.

“죽어랏! 비류수룡탄(飛流水龍彈)!”

검환(劍丸).

검강을 고도로 응축시킨 집약체.

혁운상 필생의 절기가 노을에게 쇄도했다.

강기를 흩뿌리며 날아드는 검격은 척 봐도 맞받기 힘든 거력을 품고 있었다.

재차 달려들려던 노을이 주춤했다.

‘이건…!’

만만치가 않다.

섣불리 맞섰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가루가 되리라.

하지만 노을은 여유를 잃지 않았고, 안력을 끌어올리며 검환을 살폈다.

“……기운이 풀려나가? 힘을 쓸데없이 낭비하네?”

검의 궤적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 나가는 기운.

보기엔 멋지지만, 저건 내공을 완벽히 갈무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검환엔 도달했으나 그 경지가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사정없이 헤집어 줄게.”

노을이 두 발을 대지에 붙이며 단단히 버티고 섰다.

정면 돌파.

그녀의 손이 위아래로 교차하는 순간, 열 자루의 조도가 검환에 빨려들었다.

“하아앗!”

독수리 사냥.

칼바람의 발톱에 자연기가 깃들자, 새파란 기운이 예기를 뿌렸다.

서늘하게 번뜩이는 조도가 검환의 내부를 파고들었다.

‘흐름을 놓치지 마! 바람의 결을 헤치듯이…!’

압축에 압축을 거듭하여 만들어낸 검환.

허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을 모아 만든 실타래처럼 강기의 뭉텅이일 뿐이다.

노을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검환의 틈새를 헤집었다.

그리고 거문고를 연주하듯 열 손가락을 부드럽게 놀렸다.

유형화된 기운을 낱낱이 해체하는 손길!

어지럽게 휘돌던 양손이 검환을 빠져나왔다.

스팟―!

그 순간, 혁운상을 경악하게 할 일이 벌어졌다.

연기가 증발하듯 검환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혁운상은 눈을 부릅뜬 채 말을 더듬었다.

“비, 비류수룡탄이 와해가 돼?! 이게 무슨 사술이냐?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상상이나 했을까?

정밀한 손놀림과 극에 이른 제어로 검환을 풀어헤치는 괴물이 존재하리란걸.

너른 하늘이 지금껏 와족에 없던 전투방식이라 극찬했던 노을의 기예는 실전을 거듭하며 완연한 꽃을 피웠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럼 날 이길 줄 알았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적어도 노을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녀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혁운상에게 말했다.

“다행인 줄 알아. 비아라면 힘으로 부숴버렸을 테니까. 차라리 이게 덜 충격적일걸?”

절대 그렇지 않다.

더 큰 힘에 깨지는 건 차라리 납득이라도 가니까.

노을의 기예는 직접 당하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웠다.

“네가 정파의 대가리지? 비아가 기껏 저쪽을 뭉개놨는데 수습하려 들면 곤란해.”

그녀는 혁운상을 향해 사박사박 걸어가며 조도를 들어 올렸다.

“너와 네 부하들만 없으면 우리가 이겨. 그러니 이만 죽자.”

콰앙―!

말이 끝남과 동시에 터진 번갯불.

혁운상이 기겁을 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쩡! 쩌정! 쩌저저정―!

고양이를 흉내낸 기동이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노을의 몸을 이끌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이던 그녀가 바람에 이끌리듯 떠올랐다.

노을은 검격의 충돌만으로 체공 상태를 유지했고, 허공에서 맹공을 퍼부었다.

족장 결정전에서 마른 비와 싸울 때 썼던 비기.

수리 날개는 수천의 엽주 옥예린의 공중 살법을 몇 단계는 진화시킨 형태였다.

“큭! 컥…! 흐읍…!”

‘내가 바로 비류무정검이다!’ 운운하며 호기롭게 외치던 모습은 온데 간데없다.

혁운상은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정신없이 뒤로 밀렸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정파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비, 비류무정검이…!’

‘저 여인은 누구냐?!’

‘대체 누구길래 창룡검대주를…!’

만만치 않을 거란 건 예상했다.

진형을 파죽지세로 깨부수는 것에서 여인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혁운상이 수왕도 아니고 이십 대 초반의 여인에게 밀릴 거라고 생각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정사대전에서 사파의 거두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기며, 자신의 힘을 증명한 검사였다.

“안 돼!!”

“대주님…!”

창룡검대가 비명을 지르며 난입했다.

일대일 결전이고 나발이고, 이 시점에서 혁운상을 잃을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족의 전사들이 그걸 두고 볼 리 없었다.

“족장님 말씀 못 들었냐?”

근육을 갑옷처럼 두른 거한.

산이 적진을 파고들며 오른 주먹을 장전했다.

“어딜 대장전에 끼어들어? 너흰 우리랑 놀아야지.”

곰 발.

크게 휘두른 권격이 창룡검대의 전열을 휩쓸었다.

산사태처럼 덮쳐오는 자연기는 혁운상의 검환에 못지않았다.

“아무 데도 못 간다. 너흰 여기서 죽는 거야.”

섬표.

극속의 각법이 적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안개걸음의 속도는 정도맹 최정예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쿠어어엉!”

“크아앙!”

별비와 칼바람이 워낙 강해서 눈에 띄지 않을 뿐, 큰 발과 검은 밤 역시 한 지역을 제패했던 맹수들이다.

회색곰과 흑표범이 발톱을 드러내자, 인간의 팔다리가 허공에 날아올랐다.

“요란한 게 시선끌기로는 딱이로군. 검은 수리, 적의 심장을 잡아채라.”

들릴 듯 말 듯 한 중저음의 목소리.

어스름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전장에 녹아든 채 기회를 엿보던 그림자들이 솟구쳤다.

퍽! 퍼억! 퍼퍼퍼퍽!

일수에 한 명씩.

완벽한 시점을 포착한 암습이다.

검은 수리들의 손에는 창룡검대의 펄떡이는 심장이 들려 있었다.

“이 비열한 놈들이…! 무인이라면 정면에서 승부해라!”

창룡검대가 당황하여 소리 질렀다.

힘과 속도, 암습까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삼박자에 기가 질린 것이다.

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무인이라니? 우린 그런 거 아닌데?”

“…….”

무인이 아니란다.

아니라는데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 그럼 전사의 명예를 걸고…!”

“전장에 나와서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럼 병력 물리고 너희만 싸우던가.”

표정을 보니 저놈도 안다.

자기가 헛소릴 하고 있다는걸.

밀리니 말도 안 되는 소릴 늘어놓는 것이다.

얼굴이 벌게진 동료들이 그를 타박했다.

“준용! 그만 닥쳐라!”

“무슨 창피한 소릴…!”

“뒤로 물러나 암습에 대비햇! 부대주급이 나선다!”

산과 안개걸음, 어스름이 전면에 나섰듯 적들도 그에 준하는 자들이 앞으로 나왔다.

창룡검대를 통솔하는 다섯 명의 부대주.

그들이 하나로 뭉치니 막강한 기파가 뭉클댔다.

“드디어 지휘자급이 한곳에 모였군! 물러나라, 꼬맹이들.”

와족 진형 뒤편에서 바람이 휙 불었다.

하늘에선 난데없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창룡검대의 부대주들을 휘감는 어둠.

창공에서 하강한 어둔 날개와 그믐의 올빼미 사냥이 포개졌다.

“똑똑히 보거라. 이것이 흑야‘호렵’수니라.”

그믐은 유독 호렵을 힘주어 발음했다.

아미파 복호전주와 항마팔수를 쓰러뜨렸던 절기가 작렬하자, 그곳엔 시체만이 남았다.

“뭐, 뭐야, 저건…!”

“할아범? 또 새로운 걸 만드신 건가?!”

그믐의 신기술을 본 전사들이 경악했다.

어둠의 막이 환영처럼 나타나고, 부대주들이 몰살했다.

술렁이던 정파 진영이 침묵에 휩싸였다.

“누, 누구냐! 저 노인은?!”

“방금 그 힘…! 십좌에 버금가는?!”

“믿을 수 없다……. 일개 야만부족에 저런 괴물이 셋씩이나 있다니…!”

그믐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름과 얼굴을 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때, 우렁찬 기합이 들렸다.

“하아앗!”

푸른 전광이 명멸하고, 하늘의 창이 원시림을 헤치며 내리꽂힌다.

뢰창이 전장에 당도한 순간, 사파 무인 수십 명이 폭발에 휘말려 가루가 됐다.

꽈르르릉―!

음파가 번지자, 이백에 가까운 무인이 귀를 막으며 거꾸러졌다.

그들은 얼굴에 난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냈다.

“힘을 빌려줘. 칼이빨.”

쩌렁쩌렁 울리는 야수의 포효.

입자까지 소멸시키는 광파가 백열갑으로부터 뿜어졌다.

밀집해 있던 적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먼지가 돼서 스러졌다.

“수왕…!”

“더 강해졌다! 저, 저런 걸 누가 쓰러뜨릴 수 있단 말이냐…!”

“경고를 따랐어야 했어. 운남에 오는 게 아니었다. 우린… 다 죽을 거야….”

정파 무인들의 이목이 마른 비에게 쏠렸다.

전장을 일거에 찍어 누르는 무력.

그믐의 활약을 머리에서 지워버리는 광경이었다.

“…….”

그믐은 입을 꾹 다문 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른 비가 잘해주고 있어서 흡족한데, 혼신의 일격이 초라해지니 뭔가 억울하다.

“에잉…!”

그의 반응을 보면 나이가 들수록 도로 어려진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뿌오오오!”

“시아아악―!”

“푸르륵, 푹…!”

마른 비의 곁에선 각성수들이 광포하게 날뛰며 사파 진영을 휩쓸었다.

그쪽은 이제 지휘자급이라고 할 만한 자들이 몽땅 쓸려나간 뒤였다.

그때, 결착을 알리는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

올빼미 사냥이 쇄골을 부수고, 독수리 사냥이 어깨의 살점을 잡아챘다.

공중에서 물구나무를 선 채 공격을 퍼붓던 노을이 사형 선고를 내렸다.

“잘 싸웠어. 이만 가도록 해.”

하늘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연격.

급소를 거꾸로 되짚은 중선오격이 혁운상의 숨통을 끊었다.

“커허….”

혁운상이 머리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의 이마가 땅에 닿는 순간, 정파와 사파 생존자들의 투지도 꺼졌다.

창룡검대는 여전히 저항했지만, 그들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후우……. 지독하네, 이놈들. 강해.”

정파 진영을 가로지를 때보다 백 수십 명의 창룡검대가 더 큰 피해를 입혔다.

수장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꽤 많은 식구를 잃었으리라.

“도, 도망치자. 이건 승산이 없어….”

전의를 상실한 정파의 무인 하나가 중얼거렸다.

포위를 당했다지만, 야수족의 숫자는 수십에 불과하다.

그쪽은 포기하더라도 야수들이 둘러싼 세 방향은 어떻게든 뚫는 게 가능해 보였다.

“싸우지 않고? 등을 보이면 맥없이 무너질 텐데?”

누군가가 되물었다.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싸울 의지가 없단 뜻이었다.

“싸워도 죽어. 저런 놈들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이냐?”

도주를 제의한 자가 사파 쪽을 돌아봤다.

“저놈들을 두고 내빼는 거야. 사파 놈들이 죽을 동안 거리를 벌리는 거다.”

“하, 하지만….”

“고민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조금 전까지 적이었던 놈들이다! 사파의 쓰레기들에게 지킬 의리 따윈 없어!”

사내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사파의 진영과 반대쪽으로.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뛰어! 뛰란 말이다! 동서쪽으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라!”

“어엇! 저놈들이…! 젠장! 정의문도 합류하라! 야수족이 없는 쪽으로 달렷!”

“여기 있다간 몰살한다! 어떻게든 헐거운 쪽을 뚫어라!”

사파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정파와 사파 연합군은 와족과 야수들이 없는 방향으로 우르르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렸던 반응이다. 전투화장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적들을 참살하도록.』

노을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머리가 떨어지고, 전의를 상실한 적.

이걸 위해 전신화장과 술력을 퍼부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적은 여전히 천오백이 넘는 숫자가 남아 있었고, 장기전으로 가서 전투화장이 풀리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적들은 싸움을 포기했다.

남은 건 이삭줍기나 다름없었다.

“크아악!”

“아악…!”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중원인들은 등을 보인 채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옆에 있는 자가 쓰러져도 운 좋게 살아남길 기대하며 달릴 뿐이었다.

“끝났나?”

마른 비가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적들을 패퇴시키기 위해 아낌없이 힘을 쏟아부은 것이다.

“한 놈이라도 더….”

그가 다시 움직이려 할 때, 난데없는 전음이 그를 멈춰 세웠다.

「그만! 멈추십시오! 대협! 지금 저들을 쫓을 때가 아닙니다!」

고개를 돌리니 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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