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30화 (430/463)

430화

「겨우 시간을 맞췄군요.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대협. 개방의 장오입니다. 화음에서 뵀던….」

『장오? 개방이라고?』

마른 비가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다.

얼굴 또한 낯이 익었다.

흑상이 소규모 거래를 하는 항구에서 상인에게 너스레를 떨던 자.

마른 비를 안내하고, 헤어지기 전엔 노을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알려줬던 요원이었다.

『오랜만이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철수한 거 아니었어?』

섬서 지역을 담당하던 자가 운남까지 내려온 건 그럴 수 있다 치자.

마른 비와 안면이 있는 데다, 실력이 뛰어나면 얼마든지 파견을 나올 수 있으니까.

의외인 건 발을 뺐던 개방이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마른 비로서는 후개가 자신의 폭주를 염려했다는 것과, 맹주로 인해 압박을 받았던 걸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발이 묶였었죠.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달려왔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힘이 되어드리지 못한 점, 양해해 주시길.」

장오는 정중했다.

그리고 마른 비에게 일어난 일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는 와족이 당가와 청성, 아미를 무너뜨린 일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사정이 어찌 됐든 그건 모두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고,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으니까.

「잠시 엎드리겠습니다. 전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장오가 개방을 상징하는 누더기를 벗어 던졌다는 점에서 은밀히 접선해 왔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정체가 발각되는 걸 염려한 듯 시체가 널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곤 신음을 흘렸다.

「으음…. 멀리서 볼 땐 이 정도인 줄 몰랐는데…… 엄청나군요. 입과 코로 핏물이 들어옵니다….」

시체로 위장한 장오.

그의 말처럼 바닥에는 피가 고여서 찰랑였다.

정파와 사파의 상잔부터, 와족의 급습과 일방적인 학살까지.

영묘의 앞에는 못해도 이천오백 구에 달하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짙푸른 생명력을 뽐내던 밀림이 붉게 채색됐다.

「도,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잠시만…!」

이대로 있다간 정말 익사할지도 모른다.

장오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그러곤 근처에 있는 시체에 머리를 기대서 숨길을 확보했다.

『……괜찮아?』

「후우… 이제 좀 살 만하군요. 보고 있는 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상당히 곤란해지거든요.」

장오는 몸 전체에 피를 묻힌 채로 말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본인이 괜찮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용건은?』

후개 아니, 개방에 대한 심정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른 비는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웃질 않았다.

은혜와 보은이 청산됐으니 그걸로 끝.

인간적인 차원의 정리(情理)는 없다.

후개가 먼저 바랐던 관계지만, 맹주와의 사건을 겪으며 그의 심정은 변화했다.

그걸 아는 장오로서는 마른 비가 딱딱하게 용건만을 묻자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음… 실은 도움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그는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가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얼른 수정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죠. 후개 님께서는 대협과 돈독한 관계가 되길 원하십니다.」

후개가 지시한 바였다.

마른 비가 반기질 않는다면 곧바로 이 말을 꺼내라고.

사람을 좋아하고, 악인이 아니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른 비의 성품을 고려한 처사였다.

하지만 마른 비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 이게 아닌데….’

마른 비의 반응이 예상과 다르자, 장오는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노련한 요원답게 티를 내지 않으며 계속 말했다.

「금광에 모인 자들을 정리했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앞으로 다가올 자들에 비하면 이들은 잔챙이일 뿐이에요. 그래서 도움을 드리러….」

『맹주. 그리고 사도칠문을 말하는 거겠지?』

「아, 알고 계셨습니까?」

맹주에 대한 건 식량을 구하던 사내에게서, 사도칠문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들었다.

장오는 마른 비가 나름의 정보망을 운용한다고 착각했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흐트러진 표정을 수습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방책은 있는지요?」

『글쎄. 내가 그걸 말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나와 개방이 그럴 만한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침착하게 가라앉은 표정.

냉정하게까지 보이는 태도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장오지만, 그는 마른 비에게서 어떤 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기간이 짧을 뿐, 마른 비는 여느 무림인들이 평생에 걸쳐 겪을까 말까 한 일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간 축적한 경험을 통해 직감했다.

지금의 대화가 와족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다는걸.

자연기까지 곁들여서 속내를 감추자, 장오는 마른 비의 의중을 간파할 수 없었다.

‘변했다! 전보다 훨씬 무거워졌어! 적색분지에서의 일 때문인가?’

장오는 간단할 거라고 생각했던 임무가 쉽지 않겠다는 걸 예감했다.

수왕에게 도움을 주고,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후개의 복심을 성사시키리라 자신했다.

한데 마른 비와 말을 섞을수록 점점 위축감이 들었다.

그래서 마른 비를 떠보는 걸 중단하고,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 물론 생사가 걸린 비책을 제게 말씀하실 이유는 없지요……. 지금까지 보여주신 행보만으로도 나름의 자구책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허나 맹주와 사도칠문은 대협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고? 고작 그 말을 하러 온 거야?』

마른 비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장오를 내려다봤다.

그건 곧 경멸로 변했다.

『말을 빙빙 돌리네. 내가 후개를 꺼리는 이유, 궁금하지? 간단해.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씀….」

『천하의 개방이 움직이지 못할 만한 사정. 전과 달리 소속이 드러나는 걸 꺼리는 행동. 현재의 정황……. 종합해보면 결론이 나오네. 맹주와 마찰이 생긴 거지? 내 말이 틀려?』

장오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표정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그, 그게….」

『좀 더 말해볼까?』

끝이 아니었다.

마른 비는 주어진 몇 가지 단서만으로 후개의 의중을 대번에 간파했다.

『어부지리. 일거양득. 그게 후개가 노리는 바겠지. 뭐?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도움을 준다고? 웃기지 마. 너희, 나와 맹주를 충돌시킬 생각이지?』

장오는 침묵했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핏물에 잠긴 채 마른 비를 멍하니 바라봤다.

『정사대전도 끝났겠다, 맹주는 전처럼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 거야. 이번 전쟁을 통해 그의 입지가 커졌을 수도 있겠네. 그럼 구파의 입장에서는 그가 매우 껄끄럽겠지.』

맹주가 좋은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렇지 않다는 데 목을 걸 수도 있었다.

정파의 하늘이라는 자가 금광을 욕심내서 내려온 것도 그렇지만, 좀 더 직접적인 단서가 있었다.

진시황릉에서 살막주가 죽기 전에 남긴 말.

맹주가 자신의 목숨을 살린 화통달을 죽이라고 청부한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세간의 평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는 음흉하고 냉혹한 자일 확률이 높았다.

『껄끄러운 관계가 된 맹주를 내가 없애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당한 타격을 입힐 테니 개방은 당분간 숨통이 트이겠지. 』

장오는 이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전과 달리 마른 비가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걸 보았고, 개방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이용하려 했다는 게 발각됐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싶으면서도, 장오는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왜 떨지? 내가 무서워?』

장오의 반응이 마른 비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래서 일부러 살기를 끌어올리며 장오를 내려다봤다.

『불순한 목적으로 침입한 자, 즉참한다고 했어. 그건 금광에 국한되는 말이 아니야.』

자신과 부족을 이용하려 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죽여 마땅하다.

마른 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장오를 직시했다.

『지금 죽여줄까?』

작심하고 살기를 뿜어내자, 장오는 사시나무 떨듯 떨어댔다.

그러다가 초점이 나간 눈으로 겨우 대꾸했다.

「저, 저는….」

장오가 공포에 질린 걸 확인한 순간, 마른 비는 살기를 거뒀다.

적절한 완급 조절이 가해져야 바라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후개가 나와 친교를 다지고 싶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아.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뿐, 아마 진심으로 날 도울 생각이겠지.』

「그, 그렇습니다!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후개 님께선 지금 대협을 친구로 여기고 계십니다!」

장오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 부분만은 꼭 믿어주길 바란다는 얼굴로.

마른 비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뗐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됐어.』

장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뒷말을 기다리는데, 마른 비가 휙 돌아서 버렸다.

장오는 ‘어, 어?’ 하며 당황했다.

『나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솔직했어야 해. 만날 때마다 떠보고, 이용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후개의 전령에게, 마른 비는 선언했다.

『가.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마. 그간의 정리(情理)는 여기까지야. 이제부터는 개방도 적으로 간주할 거야.』

‘……적? 적이라고?!’

분명 적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후개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었다.

장오는 혼비백산하여 주절댔다.

「자, 잠시만…! 죄송합니다, 대협! 제가 불민하여 후개 님의 말씀을 잘못 전했습니다! 후개께서는 진심으로 대협과 우의를 다지길 원하십니다!」

마른 비가 아무 말이 없자, 장오는 그가 알고 있는 걸 횡설수설 꺼내 놨다.

「대협의 말씀이 맞습니다! 솔직했어야 합니다! 맹주가 운남에 들어선 이상, 대협과 부딪히는 건 기정사실이에요! 허나 후개께서 대협과 그를 충돌시킬 생각이라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될 텐데, 굳이 저를 파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까진 알고 있다.

중요한 건 그다음.

마른 비는 계속해보라는 듯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맹주는 대협을 도왔다는 빌미로 본방을 핍박했습니다! 그로 인해 관계가 틀어졌고, 그가 타격을 입기를 바라는 것도 맞아요! 허나 후개께선 대협을 살리고자 저를 파견하신 겁니다! 이대로면 승산이 없으니까요!」

이거다.

이걸 듣기 위해 마른 비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거였다.

장오는 ‘솔직하라.’는 말에 세뇌된 것처럼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사도칠문의 두 문파가 사흘 안에 당도합니다! 대전을 치른 현 상태로는 그들도 감당할 수 없어요! 하물며 맹주가 이끄는 병력은 말할 것도 없지요!」

일리 있는 말이다.

마른 비가 슬쩍 눈을 들어서 전장을 둘러봤다.

적을 쫓던 와족의 전사들은 전투화장의 시간이 다하자 땅에 쓰러져서 씩씩대고 있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수장들이 최전선에 섰음에도 대다수가 중경상을 입고, 십여 명이 고혼이 됐다.

각성수를 따라온 야수들은 칠 할 가까이가 죽었으며, 전상과 대망, 광서우조차 당분간 전투가 힘들 만한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개방의 협력이 필요해.’

티를 내지 않을 뿐, 장오가 나타났을 때 마른 비는 쾌재를 불렀다.

후개의 성격상 아무 대책 없이 접선을 시도했을 리 없으니까.

순간적인 기지로 입장을 역전시켰지만, 지금 마른 비는 개방의 도움이 절실했다.

『승산이 없다?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우리끼리도 지금까지 잘해왔거든. 쓸데없는 소릴 하려거든 돌아가.』

하지만, 한 번 더 튕긴다.

말뿐만이 아니라 마른 비는 걸음을 옮겨서 멀어졌다.

장오가 속이 탄다는 듯이 외쳤다.

「이런 제기랄! 생각하시는 것처럼 상황이 만만치가…! 아, 실언입니다…. 무, 물론 대협이 이길 거라고 믿지만, 저희가 준비한 대책도 들어주십시오!」

도움을 주러온 자가 제발 내 도움을 받아들여달라고 간청하는 형국이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심리전에 휘말린 장오는 깨닫지 못했다.

『흠……. 별로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성의를 봐서 한번 들어나 볼까?』

마른 비가 씨익 웃었다.

그러곤 미소를 싹 지우며 새침하게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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