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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31화 (431/463)

431화

「네, 대협! 일단 들어보시고, 어떤지 판단하시면 됩니다!」

장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른 비는 웃음이 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러곤 말해보라고 눈짓했다.

「최선은 맹주와 사도칠문을 충돌시키는 거겠죠.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들은 뻔한 계책에 걸릴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이번 전투에 대한 정보가 머지않아 둘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맹주와 사도칠문은 경각심을 끌어 올릴 테고, 마른 비와 와족을 없애지 않는 한 금광을 손에 넣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거다.

이제 그들은 최우선 순위로 와족을 노릴 게 틀림없었다.

「대협과 대협의 식구들을 제거한 뒤에야 그들끼리 자웅을 가리겠죠. 그전까지는 마주치더라도 싸우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뒤통수를 맞으면 위험하다는 걸 아니까요.」

결국 그들을 격퇴하려면 힘으로 누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중원 최강을 다투는 자와 구파에 필적하는 문파 둘을 말이다.

‘난감한데……. 너무 불리해.’

마른 비가 속으로 침음할 때, 장오가 말했다.

「문제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점입니다. 지형에 적응하고, 포진을 마친 뒤엔 건드리기 어려울 거예요.」

마른 비가 조급한 이유였다.

천천히 기회를 노리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시간이 갈수록 승산은 떨어진다.

적들은 이쪽의 전력을 알고 있고, 탄탄한 방어를 갖출 테니까.

금광에 당도하여 진형을 갖춘 뒤엔 정면 힘 싸움이 불가능하며, 암습이나 기습도 통하지 않을 거다.

더 큰 문제는 지원 병력이 내려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의 비중이 높아 전사를 충원할 수 없는 와족과 달리, 적들은 예비 병력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지금 공격해야 해! 낯선 지형을 헤치며 이동 중인 이때!’

하지만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절망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한단 말인가?

마른 비가 머리를 굴릴 때, 장오가 물었다.

「대협. 혼자서 맹주 쪽을 묶어두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

무슨 말이냐고 눈으로 묻자, 장오가 얼른 대답했다.

「만약 대협께서 맹주 쪽을 묶어두고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사도칠문 쪽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도칠문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네, 대협.」

장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실은… 여기로 오기 전에 미리 손을 써두었습니다. 부상 때문에 힘들겠지만, 대협의 식구들을 사도칠문 쪽으로 보내주세요.」

마른 비가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미리 손을 썼다니? 뭔가 준비를 한 거야?』

「네. 저희가 준비한 패와 대협의 식구들이면 귀왕문과 골육파각문을 상대로 붙어볼 만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마른 비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장오가 덧붙였다.

『염려스러운 건 그 뒤입니다. 전투가 끝난 직후가 가장 위험해요. 그때 맹주의 세력이 나타나면 전멸할 테니까요. 대협께서 맹주 쪽으로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얼굴을 보여서 그들을 유인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세요.』

어려운 주문이었다.

하지만 장오의 말대로만 된다면 희망이 보인다.

마른 비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준비한 패라는 게 뭐야?』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장오가 자신 있게 대꾸했다.

그러곤 조심스레 되물었다.

「이제 대협께서 준비한 대책을 들어봐도 될까요? 절충해서 최선의 방안을 강구하면….」

마른 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안 알려줄 거야. 비밀이거든』

맹주와 사도칠문이 개입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준비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금광 앞에 모인 자들을 무너뜨리는 데도 전력을 쏟아야만 했다.

‘하지만….’

맹주가 내려오는 방향.

그리고 운남의 지형.

그 둘을 짜맞추니 시도할 만한 방법이 떠올랐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할 수 있어. 맹주는 내가 묶어둘게. 사도칠문 쪽은 믿어도 되겠지?』

장오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음…….”

강인한 눈빛과 다부진 체격.

발을 디딜 때마다 탄탄한 기파가 흘러나오니, 수백 명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사내였다.

사도칠문 중에서도 정통의 검문으로 유명한 귀왕문.

그 수장인 염우양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과묵하다는 세간의 평처럼 그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불평을 토한 건 옆에 있는 노인이었다.

“문주! 빌어먹게도 더러운 지형이 아닙니까? 칠십 평생 이토록 커다란 나무와 짐승들은 처음 보오! 날씨도 후덥지근하고, 짜증이 나는군!”

염우양과는 정반대의 외형을 지닌 인물이다.

좁은 어깨와 오 척의 단신.

노인은 목소리까지 가늘었다.

허나 그를 만만히 볼 수 없게 하는 게 있으니, 바로 눈이었다.

서늘한 살기가 깃든 눈동자는 스쳐보는 것만으로도 섬찟했다.

셀 수 없이 사람을 죽여본 살인마의 눈.

죽인 숫자보다 살인을 저지른 방법이 저런 눈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골육파각문의 문주 율사기가 가래침을 퉤 뱉었다.

“그렇구려. 확실히 중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오.”

염우양이 대꾸하며 고개를 들었다.

뒤통수가 목덜미에 닿도록 꺾어야 나무의 꼭대기를 볼 수 있다.

밀림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품안에 든 자를 겸허하게 만드는 대자연.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염우양과 율사기가 느끼는 건 달랐다.

“카악, 퉤! 녹림이 그려놓은 지도가 없었다면 엄청나게 헤맸을 것이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율사기는 진저리나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주기적으로 침을 뱉는 건 그의 습관인 듯했다.

염우양은 익숙한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뒤따르는 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율사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이야! 이쪽이 맞느냐? 아까 봤던 나무가 또 나오는 것 같은데?”

인상을 썼던 자들이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율사기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정사대전에서 그의 손에 걸린 적들이 갈가리 찢기는 걸 봤다면.

이틀 전, 비석 앞에 머물던 정파가 쓸려나가는 걸 봤다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지도를 보며 길을 안내하던 청년이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화, 확실합니다, 문주님! 저기 저 나무를 보시면 녹림의 표식이….”

수백 년은 됐음 직한 고목에는 칼로 새긴 글자가 있었다.

수풀 림(林).

암호가 아니라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것은 금광으로 향하는 자들을 위한 표시나 다름없었다.

“칵, 퉤! 그래, 맞구먼. 집중하는 게 좋을 거야. 망할 놈의 기후와 지형 때문에 노부가 영 기분이 좋지 않거든. 한 번이라도 길을 잘못 드는 날에는….”

율사기가 허리춤에 찬 도구들을 매만졌다.

끌과 정, 갈고리부터 단도와 쇠톱에 이르기까지.

섬뜩한 상상을 하게 하는 그것들은 인간을 고문하기 위한 도구이자, 전투를 위한 병기였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테니 믿어 주시길….”

청년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꾸했다.

율사기가 만족스런 웃음을 흘릴 때, 염우양이 말했다.

“율 문주. 너무 겁주지 마시구려. 젊은 청년이 우릴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소이까?”

지도를 든 사내가 헛바람을 삼켰다.

그러곤 율사기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점잖은 염우양보다 율사기가 몇 배는 무서웠다.

핀잔을 들었으니 율사기가 가만있지 않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율사기는 움찔하더니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노, 노부가 괜히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나 보오. 커흠! 혹여 염 문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그런 건 아니오. 그저 저 청년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 말을 꺼낸 것이라오.”

율사기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야. 내가 겁을 주었더냐? 그렇다면 미안하구나. 내 사과하마.”

“아, 아닙니다! 문주님! 괘념치 마십시오!”

청년은 동그래진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조금 전의 대화로 누가 우위에 있는지가 판가름 난 것이다.

‘구파일방과 달리 사도칠문은 서열이 확실하다더니……. 귀왕문과 골육파각문의 전력 차가 큰가 보구나!’

청년의 짐작이 옳았다.

십여 년째 칠문 서열 삼 위를 유지하고 있는 귀왕문과, 칠 위에 갓 진입한 골육파각문 사이엔 커다란 격차가 존재했다.

무공도 마찬가지라 율사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염우양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율사기가 자신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 염우양 앞에서 얌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긴장을 풀게. 여기까지 온 것도 자네의 독도법(讀圖法) 덕분이 아닌가. 길을 잘못 들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 하던 대로만 하게.”

염우양의 목소리는 묵직하지만 부드러웠다.

청년이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가, 감사합니다! 문주님! 꼭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청년은 눈을 부릅뜨고 지도를 살폈다.

그러곤 자신 있게 말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하루! 앞으로 하루면 금광에 당도할 겁니다!”

“그래. 믿음직스럽군. 하루만 더 고생해주게나.”

염우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표정이 굳더니 정면을 바라봤다.

“……인기척이다. 전열을 갖추도록.”

염우양이 엄지로 검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주변에 있던 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산새 우는 소리와 짐승의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 염 문주의 말씀대로요! 사람이 다가온다! 기습에 대비하라!”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율사기도 인기척을 느꼈다.

칠문의 문주들이 무기를 쥐자, 사파의 무인들도 싸울 태세를 갖췄다.

차 서너 모금 들이켤 시간이 흐르고, 숲이 들썩였다.

“멈췃! 거기 서서 정체를 밝혀라!”

눈이 표독스런 청년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골육파각문이 자랑하는 해부단(解剖團)의 단주, 율제학이었다.

율서기의 손자인 그는 이번 정사대전을 통해 악명을 떨쳤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골육파각문의 후계자다운 잔인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그 결과 율제학은 사파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사호(四虎)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의 악명이 자자할 때, 마침 한자리가 공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특한 녀석! 그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앞으로 나서서 얼굴을 알려라! 네가 이대로만 큰다면 본문은 비상할 것이야.’

율서기는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손자가 기꺼웠다.

그는 이번 원정이 염우양에게 눈도장을 찍을 기회라고 여겼다.

그래서 율제학을 바라보는 율서기의 눈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어엇! 우, 우리는…!”

“잠깐만! 그 문양은… 사도칠문?!”

“칠문이라고? 정말 그들이 온 거야?!”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자들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안도하는 얼굴로 주저앉았다.

“사, 살았다…!”

“사도칠문과 만나다니! 우린 살았어!”

백 명도 안 되는 자들은 옷이 피에 물들어 있었다.

부상을 입은 자들도 수두룩했다.

“뭐냐, 그 반응은? 사파인가?”

율제학이 긴장을 풀지 않으며 물었다.

그들은 와족에게 패하고 금광에서 도망쳐 나온 사파의 생존자였다.

사방팔방으로 도망친 자들은 대부분 길을 잃었지만, 일부는 처음 왔던 길을 찾아냈다.

그렇게 운남을 빠져나가다가 녹림이 낸 길을 따르는 사도칠문과 만난 것이다.

“……전쟁이 벌어졌다고? ……뭣이라? 전멸?!”

사도칠문은 그들을 통해 이틀 전에 벌어진 전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곤 아연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야수 군단? ……정파 놈들과 손을 잡아? 그러고도 백 명이 안 되는 야만인에게 패했다고?”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율서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아무리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삼천 명이 백 명도 안 되는 놈들에게 패해? 뭐 이런 병신 같은 놈들이…!”

율서기의 분노는 당연했다.

애초에 그들은 금광 앞에 모여 있는 녹림과 사도련의 병력을 믿고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지휘하여 창룡검대와 정파를 쓸어버리고, 금광을 접수할 계획이었다.

탄탄하게 수비를 굳히고 나면, 맹주의 할아비가 온다고 해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한데 그 계획이 뿌리부터 무너져 내렸다.

이번만큼은 염우양도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본문이 백오십. 골육파각문이 이백. 나머진 여기로 오며 흡수한 병력이다. 이것만으로 맹주를 상대해야 한다는 건가…….”

정도맹 군사회의에서 파병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수왕이 당가와 청성, 아미를 박살 내서 맹주가 움직일 명분을 얻은 모양이지만, 아마 많은 병력을 끌고 오진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듯 정파도 정사대전의 후유증을 겪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천검의 존재만으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난감하군. 이렇게 되면 철수를 고려해야겠어….”

염우양이 중얼대자, 율사기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염 문주! 여기까지 와서 금광을 구경하지도 않고 발을 뺀단 말이오? 온 천하가 우릴 비웃을 것이외다! 빠질 때 빠지더라도 한판 붙어보기라도 해야…!”

열변을 토하던 율사기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사파의 생존자들에게 소리쳤다.

“이런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염 문주와 노부가 땅끝까지 지원을 왔거늘, 고작 야만인 놈들에게 패해서 도망을 쳐?!”

율사기가 갈고리를 빼들며 살기를 끌어 올렸다.

“만약 금광을 빼앗긴다면 네놈들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그는 가래가 끓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카악~ 퉤!’ 하며 침을 뱉었다.

누런 타액이 허공에 쏘아졌다.

땅이나 풀숲에 떨어졌어야 할 그것은 본래의 착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갑자기 숲을 헤치며 나온 사내 때문이었다.

“사람이다! 옌장 맞을 밀림에서 드디어 인간을…… 엇?”

정적이 흘렀다.

사내는 튀어나오자마자 가래침에 얻어맞고 멍하니 서 있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진득한 액체.

그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코를 킁킁댔다.

“이게 뭔……. 내, 냄새…! 누구냐?! 어떤 씨벌 놈이 썩은 물을…!”

마른 비를 위해 강남에서부터 달려온 남자.

몇 날 며칠을 밀림에서 헤매다가, 난데없이 가래침을 맞은 철중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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