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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32화 (432/463)

432화

“엇? 이것… 치, 침? 심지어 십 년은 묵은 듯한 가래…!”

얼굴에 묻은 액체의 실상을 알게 된 철중구가 육두문자를 뱉었다.

그러곤 토악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떤 새끼냐? 누가 뒈지려고 이딴 짓을…!”

자기가 부주의하게 튀어나왔다는 건 생각지도 않는다.

철중구에게는 그저 얼굴에 침을 맞았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욕을 들었다는 것만이 중요한 사람도 있었다.

“시벌 놈? 뒈져? 새파랗게 어린놈의 입이 시궁창이구나!”

율사기도 마침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불쾌한 기후를 견디며 변방의 끝까지 내려왔는데, 금광을 손에 넣기는커녕 철수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염우양 때문에 성질을 누르고 있던 그에게 철중구는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침을 뱉은 게 당신이요? 정중히 사과하쇼, 노인장! 그러면 노인 공경 차원에서 없던 일로 해줄 테니!”

철중구로서는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한 거였다.

하지만 율사기는 그 말투조차 거슬렸다.

“누가 무엇을 없던 일로 한다는 것이냐! 감히 내게 욕을 싸지른 대가는 네놈의 목으로도 부족하다!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사죄해라! 그러면 혀를 자르는 걸로 용서해주마!”

철중구가 ‘허!’ 하며 혀를 찼다.

그러곤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뭐 이런 개차반 같은 늙은이가……. 넌 좋게 끝낼 기회를 날렸다. 딱 말해. 너, 뭐 하는 새끼냐?”

정사대전에서 몸담았던 전선이 다른 탓에 철중구는 골육파각문을 알아보지 못했다.

설령 알았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기준에서 율사기는, 그리고 골육파각문은 기억할 가치가 없는 존재였으니까.

“이 방자한 놈이 감히 문주님께…!”

“죗값은 네놈의 육신으로 갚아라!”

해부단의 무인들이 날아올랐다.

악명에 걸맞게 시비가 붙자마자 살수를 쓰는 걸 주저치 않는다.

살벌한 고문 도구를 양손에 쥔 그들은 하나같이 칙칙한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해부단원들은 철중구를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어라? 살기? 이 새끼들, 이거. 인간 망종들이구만?”

철중구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대번에 간파한 것이다.

지금 달려드는 놈들이 어떤 인간인지를.

척 봐도 사파지만, 그는 죽이려고 달려드는 놈들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부아아악―!

사선으로 그어진 참격.

시뻘건 도기(刀氣)가 번쩍였다 사라졌다.

여덟 명이 달려들었지만, 남은 건 열여섯 조각의 시체였다.

붉은 피가 피처럼 후드득 내리는 가운데, 철중구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어때, 늙은이? 대충 견적 나오지? 숨지 말고 앞으로 나와. 애새끼들 내세우다간 니들 오늘 멸문한다?”

자신감과 투지로 점철된 모습.

정사대전을 거치고, 패군의 가르침을 받은 철중구에게서 과거의 미숙함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철중구와 싸워보고 싶은 자가 있었으니…….

“이게 누구신가? 전(前) 사호였던 투도 나리 아니요?”

율제학이었다.

그는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철중구는 정사대전에서 좌충우돌 날뛰며 자신의 힘을 증명했고, 세인들은 그가 더 이상 후기지수의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철중구가 빠진 사호의 자리에 후임으로 들어간 게 율제학이었다.

이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듯이,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율제학은 철중구가 비살검 악교익을 쓰러뜨리고 사호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화려하게 등장하길 바랐다.

허나 계획과 다르게 얼떨결에 사호가 돼버렸으니, 그는 언제고 철중구를 꺾어서 명성을 떨치리라 벼르고 있었다.

‘패군의 제자? 흥! 그래 봤자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하류 인생이다!’

철중구의 명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율제학의 심기도 뒤틀렸다.

그가 빠진 자리에 자신이 들어갔다는 건 결국 철중구가 더 위라는 소리가 아닌가?

율제학은 그걸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뭐야, 이 음침한 새끼는?”

하지만, 철중구는 율제학이 안중에도 없었다.

“흘리는 기운을 보니 늙은이의 혈육이나 제자쯤 되겠구만. 빼다 박은 걸 보니 손주인가?”

철중구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가야. 술래잡기 하면서 깔깔거릴 나이에 어른들 일에 끼는 거 아니다. 괜히 처맞고서 질질 짜지 말고 빠져.”

숨 쉬듯이 술술 흘러나오는 도발이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 차이밖에 안 날 거 같은데 애 취급이라니?

율제학은 철중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날 모르는가! 내가 바로 새롭게 사호에 등극한 율…!”

“율 씨냐? 그럼 이름은 무차야? 사호에 뽑힐 정도면 제법이긴 하네. 뭐, 그래 봤자 애들 소꿉장난이지만.”

백원 의원에서 탁기를 빼내고, 적사자기를 제대로 전수받았다.

뼈를 깎는 고련을 거쳤고, 사선을 넘었다.

마른 비와 헤어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철중구에게 ‘사호’라는 호칭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율제학이 무기를 뽑을 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까지. 지나치게 흥분했군. 감정을 다스리게, 단주.”

염우양이었다.

그가 끼어들자 율제학이 주춤거렸다.

도를 움켜쥐었던 철중구가 속으로 투덜댔다.

‘칫! 눈치챘나?’

염우양은 눈길을 돌려서 철중구를 바라봤다.

“오랜만이군, 투견대주. 련주를 뵐 때 마지막으로 봤던가?”

부드러운 건 여전했다.

하지만 그의 눈초리는 추궁의 빛을 띠고 있었다.

“엇! 문주께서도 계셨소? 오랜만에 뵙소이다.”

철중구는 염우양을 이제 본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고개를 까닥였다.

염우양은 가만있었지만, 율사기가 폭발했다.

“이런 건방진 놈이! 똑바로 예를 갖추지 못할까! 귀왕문주를 뵙고도 그따위 방자한 태도라니!”

철중구는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난 원래 이래, 늙은이. 인사했으면 됐지, 뭘 더 하라고? 오체투지라도 할까? 황제라도 납셨어?”

오만방자한 태도였다.

율사기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반면, 염우양은 침착했다.

“자네는 여전하군. 흥분하실 것 없소, 율 문주. 그의 말처럼 인사면 충분하니까. 과례는 필요 없소이다.”

“그, 그래도 염 문주! 저놈이…!”

염우양이 표정을 굳힌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자, 이만하면 충분히 기다려주었네. 슬슬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서슬 퍼런 눈빛.

여유만만하던 철중구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무형의 압력에 저항하듯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러곤 기세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거참, 눈치도 빠르시오. 맞습니다. 난 비아 아니, 수왕을 돕기 위해 왔소.”

숲이 침묵에 휩싸였다.

사파 무인들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투도가 수왕과 가깝다는 걸 기억해냈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찢어 죽여도 모자랄 원수 놈을 돕는다고?!”

“투도! 미친 것이오?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도망을 친 게 그놈 때문이오!”

“수왕과 야수족에게 이천에 가까운 숫자가 목숨을 잃었다! 네가 련주의 비호를 믿고 까부는 거라면…!”

“닥쳐어어어!!!”

철중구는 왁!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곤 좌중을 둘러보며 으르렁댔다.

“니들이 욕심 때문에 가만히 있는 비아를 건드린 것 아니냐? 거기가 와족의 공동묘라는 건 들었지? 어느 누가 선조의 안식을 방해하는 놈들을 두고 본단 말이야?”

철중구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염우양을 바라봤다.

“난 그래도 귀왕문주께선 도의가 있는 분이라 생각했소. 한데 피 냄새 풀풀 나는 쓰레기들과 어울릴 줄이야.”

“뭐라고? 쓰, 쓰레기?!”

율 씨들이 거품을 물건 말건 철중구는 또박또박 말했다.

“실망했소. 내가 문주께 계속 예우를 다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 이 말이오.”

철중구는 율사기를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어이, 늙은이. 보아하니 칠문의 하나인 모양인데, 말 잘 듣는 개새끼마냥 쩔쩔매지 말고 꼬우면 덤벼.”

“이런 사지를 뜯어내도 모자랄 새끼가…!”

살의가 치솟고, 율사기의 성명병기인 갈고리와 쇠톱이 튀어나왔다.

그가 날아오르려는 순간!

“멈추라 하지 않았소!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인가!”

산악 같은 기운이 밀림을 뒤덮었다.

이 정도면 청운진인이나 금정신니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는 기파다.

순수한 무력으로 칠문에 오른 염우양은 잔혹함으로 이름을 떨친 율사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여, 염 문주. 그것이….”

왈왈 짖던 개가 꼬리를 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염우양은 추상같은 기세로 율사기를 억누른 뒤에 철중구에게 말했다.

“자네도 그만하게. 어떻게든 싸울 구실을 만들려는 모양인데, 이 이상의 도발은 용납지 않을 것이야.”

염우양이 철중구의 뒤편, 그늘에 덮인 숲을 바라봤다.

“나와라. 언제까지 숨어 있을 셈이냐?”

동요가 번지고, 숲이 흔들렸다.

막강한 투기가 기지개를 켜며, 거친 기운을 뿜는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

“……!”

사도련 최고의 무투파 집단.

철중구는 운남에 혼자 내려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패군은 투견대를 전부 딸려 보낸 것이다.

“투견대주. 정확히 해명해야 할 것이야. 자네가 혼자 왔다면 난 개인적인 의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네. 허나….”

염우양의 음성에선 분노가 묻어났다.

“투견대를 동행시킨 건 무슨 의미인가? 설마 련주께서 아군과의 충돌을 허락한 건가?”

썩 내키진 않지만, 염우양은 사도련의 부흥을 바라며 여기까지 왔다.

금광을 욕심낸 건 사실이다.

허나 귀속의 주체와 욕망의 목적이 달랐다.

그는 다른 자들처럼 사리사욕 때문에 내려온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련주가 모를 리 없다.

한데 그의 제자나 다름없는 철중구가 시비를 건다는 건….

“만약 이게 련주의 뜻이라면… 난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네.”

눈앞에 패군이 있다면 충돌도 불사할 기세였다.

분노가 깃든 투기는 철중구조차 감당하기 버거웠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투견대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귀왕문주께 아룁니다! 오해십니다! 련주께선 정파와 마주칠 걸 염려하여 저희를 동행시켰을 뿐, 아군과의 충돌은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절강성의 사내들을 모아서 북벌에 참여한 청년.

내기 비무에서 패하고, 철중구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 함윤은 투견대의 조장이 돼 있었다.

“지금 그 말, 확실한가?”

염우양은 재차 물었고, 철중구는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아, 뭘 또 물으시오? 그렇다지 않습니까? 사부 아니, 련주께선 그런 걸 허락한 적 없소.”

염우양의 투기가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철중구를 바라봤다.

“자네가 내게 실망했더라도 어쩔 수 없네. 잘 알고 있어. 우리가 침략자에 불과하다는 것. 허나 련을 위해서라면 난 그보다 더한 오명도 뒤집어쓸 준비가 되어 있네.”

“비겁한 변명이오. 난 무식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해선 안 된다 배웠소.”

철중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문주께서 비아와 싸우더라도 난 돕지 않을 것이오. 누가 잘못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니까.”

마음 같아선 다 때려 부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책임질 사람들이 있으며, 무엇보다 련주의 입장을 곤란하게 할 순 없었다.

염우양은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자네, 어지간히 수왕을 돕고 싶은가 보군. 그래서 그토록 과하게 행동한 건가?”

골육파각문을 도발해서 달려들게 만든다.

대주를 지키는 건 수하들의 의무이니, 투견대가 개입할 명분이 생긴다.

얼굴에 침을 뱉고, 저쪽이 먼저 칼까지 뽑았다면 책잡힐 건더기가 없는 것이다.

침을 맞은 순간, 철중구는 마른 비를 도울 계책을 떠올렸지만, 염우양이 그걸 간파해 버렸다.

그래서 그의 말투는 뾰로통했다.

“과하긴 뭐가 과합니까? 난 아직 사과도 못 받았소. 그리고 저것들은 보자마자 마음에 안 들었어. 변태 새끼들도 아니고, 고문 도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꼴이라니.”

“카아악! 사과를 받아야 할 건 우리 쪽이다! 네놈이 본문의 제자들을 도륙 내지 않았더냐!”

철중구와 율사기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율제학도 핏발 선 눈으로 살기를 뿜어냈다.

함윤이 철중구에게 향하는 살기를 차단하며 말했다.

“눈 깔아라. 사호는 개뿔. 어디서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가 형님께 살기를 뿜어?”

“이건 또 웬…?!”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사도칠문과 련주 직속의 전투단.

지위의 고하를 논하기 애매한 관계였고, 서로가 상대보다 강하다고 자부했다.

염우양이 없었다면 한참 전에 칼부림이 났을 터.

“다들 그만하게.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한 식구가 아닌가. 련주의 의중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

염우양이 한숨을 쉬며 양측을 말릴 때였다.

『내분이 일어났다. 지금이야! 뒤통수를 갈겨버려!』

사파 진형의 후방.

살기 자욱한 언령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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