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어린진(魚鱗陣)! 적들을 뭉개라!”
낭랑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화광이 충천하듯 야생의 살기가 번졌다.
숲이 열리며 육십 명의 와족 전사들과, 같은 숫자의 반려수가 튀어나왔다.
돌파의 핵이 되는 최전방엔 그믐이 있었다.
산과 안개걸음이 좌우에 서고, 어스름이 뒤를 받친다.
반려수까지 함께하는 수장들의 돌격이 사도련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뭐, 뭐냐!”
“야수족! 야수족의 기습이다…!”
예상할 수 없는 습격이었다.
이틀 전의 전투로 몸을 추스르기도 바쁠 텐데 선공이라니?
실제로 와족 전사들의 얼굴에선 피로함이 묻어났다.
육신에도 미처 치유하지 못한 상흔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걸 이겨내고 왔기 때문에 와족의 기습은 치명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허를 찔렸다! 뒤로 물러서며 진형을 수습하라! 반전해서 방어를 구축해!”
염우양의 대응은 신속했다.
그는 무공만큼이나 지휘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여긴 중원이 아니라 운남이었다.
“무, 문주님! 제자들의 반응이 느립니다! 나무가 많아서 거치적거려요!”
“땅이…! 덤불과 나무뿌리 때문에 움직임이 방해를 받습니다!”
물러날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맞서야 했다.
명령에 따라 뒤로 물러서던 자들이 어깨를 부딪치고, 장애물에 걸려서 휘청거렸다.
와족이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좌우로 갈라버려!!!”
야수의 포효가 메아리치고, 발톱과 이빨이 적을 난자했다.
자연기를 두른 신병이 인간의 육신과 병장기를 일격에 바스러뜨렸다.
“크아악!”
“아악…!”
사도련의 후위가 손도 못 쓰고 무너져 내렸다.
“이, 이런…!”
다급하게 내린 명령이 독이 됐다.
사도칠문의 뒤를 받치던 사파인들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물고기의 비늘이 벌어지듯 진형이 살아 움직이며, 그들을 갈아엎었다.
하지만 염우양은 금세 평정을 찾고 병력을 움직였다.
“당황하지 마라! 짐승까지 합쳐봐야 백이십이 안 된다! 돌격로를 트고, 좌우 협격으로 대응하라!”
어디서 배웠는지는 몰라도, 야수족의 수장은 중원의 군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형을 잘못 선택했다.
어린진은 비슷하거나 적은 숫자를 압살할 때 쓰는 것이지, 몇 배나 많은 적에게 달려들기 위한 진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병력의 대부분이 부상자며, 이쪽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사파를 대표하는 정예들이다.
염우양이 낙승을 예상할 때, 노을의 명령이 떨어졌다.
“변진(變陣)! 방원진(防圓陣)을 구축하라!”
“……?!”
호쾌하게 돌격하던 전사들이 우뚝 멈췄다.
와족은 사파 진영의 한복판에서 둥글게 뭉치며 방어진을 짰다.
그건 병법을 아는 자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행동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돌파를 하다 말고 수비라니? 저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
염우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형의 중앙, 지휘를 내리는 여인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반쪽짜리 병법서를 주워서 독학을 했나 보오. 파고들다가 안 되겠다 싶으니 수비로 전환한 거지. 염 문주의 지휘와 아군의 전력에 혼비백산한 게 틀림없소!”
율사기가 킬킬댔다.
저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우양은 쉽게 단정 짓지 않았다.
‘분명 병법에는 어긋나는 행동이다. 허나 놀라서 저러는 거라고 보기에는….’
너무 침착하다.
인간은 물론이고 짐승도 당황하거나 힘에 부친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수비를 펼친 채 이쪽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탐색? 기습에 성공하고, 교전을 펼치던 와중에? 이해가 가지 않아. 저건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귀왕문과 골육파각문이 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거북이처럼 웅크린 와족을 비웃으며 좌우로 넓게 펼쳤다.
그러곤 방원진을 집어삼킬 기세로 달려들었다.
‘기다려? 무엇을? ……설마?!’
염우양이 고개를 홱 돌렸다.
혹시나 했지만, 투견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과 야수족이 내통하지 않았다는 건 철중구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놀란 얼굴로 입을 헤 벌린 채 와족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때, 사도칠문을 기겁하게 할 일이 벌어졌다.
“적이 미끼를 물었다! 전군, 돌격하라!”
좌측 숲이 열리며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백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가슴에 봉우리와 구름의 문양을 단 검사들이 와족을 둘러싼 칠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럴 수가! 저놈들이 왜?!”
염우양이 비명을 질렀다.
적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정사대전에서 지긋지긋하게 싸웠던 앙숙.
숲을 뚫고 뛰쳐나온 건 점창의 봉검대와 운검대였다.
“와족에게 두 번이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모두, 이 자리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싸워라!”
결의를 다지는 외침이 점창파 무인들을 독려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화려한 무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숭의검(崇義劍)?! 한데 저 복장은…!”
공유립.
공지량이 천대하던 서자가 드높은 의기로 세간의 명망을 얻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장로원의 만장일치로 장문의 자리에 올랐다.
이례적이고도 파격적인 결정.
하지만 제 옷인 것마냥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마치 원래 이렇게 되기로 예정되었던 것처럼.
몰라보게 달라진 건 공유립만이 아니었다.
“봉검대! 장사진(長蛇陣)을 펼쳐라! 적들의 후위를 두드린다!”
고검(高劍).
힘겨운 어린 시절을 견뎌내고 비상한 남자의 별호였다.
공유립의 뒤를 이어 봉검대주가 된 여규는 몸도 마음도 훌쩍 커 있었다.
“운검대! 봉검대의 뒤를 따라라! 쉴 틈을 주지 말고 적을 압박하라!”
눈여겨볼 자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유협(遊俠) 원승.
천하를 떠돌며 협의를 행하다가, 여휘를 흠모하여 점창에 들어온 그는 운검대주가 돼 있었다.
여담이지만, 정사대전이 벌어진 강남에서 과거 자신이 구한 여인과 재회한 원승은 얼마 전 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여휘가 심은 세 개의 씨앗이 마침내 사문을 떠받치는 거목으로 성장한 것이다.
“크아아악!”
“점창파! 빌어먹을 놈들이 여기서도…!”
사도칠문의 무인들이 저주를 퍼부었다.
이강사중삼약?
웃기는 소리! 그건 오래전 구파 힘의 서열일 뿐이다.
와족과의 전쟁과 정사대전을 치른 점창은 중원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을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공지량을 막지 못하는 바람에 와족이 피해를 입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검을 들어라!”
풍검대주 주상이 붉어진 눈으로 외쳤다.
숫자가 적은 봉검대와 운검대를 뒷받침하는 전력이다.
후개가 와족을 위해 준비한 패는 바로 점창이었다.
“호오~ 뭐야, 여규 아냐? 소문은 들었는데, 엄청 강해졌는걸?”
운남에 올 때부터 한 번쯤 마주치리란 생각은 했었다.
철중구는 휘파람을 불며 더욱 날카로워진 사일검을 감상했다.
그가 전장으로부터 거리를 둘 때, 여인의 외침이 들렸다.
“딱 좋아! 정확히 맞물렸다! 변진(變陣)! 수장들이 톱니바퀴가 된다! 방원진, 회전하라!”
점창의 인물들도 뛰어나지만, 그들의 역량을 뛰어넘는 자가 있으니, 바로 노을이다.
족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또 한번 와족의 진형이 변모했다.
그믐, 산, 안개걸음, 어스름이 원진에서 뛰쳐나갔다.
최정예가 그들을 뒤따르자, 방원진이 네 개의 날을 지닌 톱니바퀴로 변화했다.
“점창파와 호응하라! 싹 다 갈아버려!”
콰가가가각―!
밖에서는 점창이, 안에서는 와족이 한 방향으로 회전하며 사이에 낀 적들을 짓이겼다.
이 순간을 위해 방원진을 구축하여 적들을 유인한 것이다.
귀왕문과 골육파각문은 와족을 포위했던 게 치명적인 실책이 돼 버렸다.
“아아아악!”
“크아악…!”
칠문의 정예들이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염우양조차 손쓸 방법을 찾지 못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진형이란 말이냐? 저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럴 수밖에.
이건 노을이 창안한 독창적인 군진이었으니까.
타고난 군략가가 아닌 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형의 대응책이 곧바로 떠오를 리 없다.
심지어 앞뒤로 포위가 된 지금 칠문에게 승산은 없었다.
“이…! 귀왕십검(鬼王十劍)은 나를 따르라! 제자들을 구하러 간다!”
결국, 와족과 점창을 저지할 방법은 수뇌부의 무력뿐이다.
아군을 학살하는 진형을 힘으로 부순다.
염우양이 귀왕문을 대표하는 열 명의 검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설 때였다.
노을은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할아범!”
“알고 있다!”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두 마리의 거조를 불러들였다.
칼바람과 어둔 날개가 하강해서 각자의 벗을 전장에서 끌어올렸다.
노을과 그믐이 노리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염우양이었다.
“저들만 저지하면 돼요! 이대로만 가면 무조건 우리가 이겨!”
앞뒤로 적을 포위한 상황.
하지만 여기서 점창이 뒤를 잡히면 전세는 뒤집힌다.
노을과 그믐은 그들의 반려수와 함께 귀왕문의 수뇌부를 요격하러 나섰다.
“보고만 있을 것이냐?! 네놈도 사파가 아니더냐!”
율사기가 이를 갈며 외쳤다.
그의 시선 끝에는 멀리 떨어져서 팔짱을 낀 채 구경하는 철중구가 있었다.
“사파이기 전에 비아의 친구지. 말했잖아? 와족과 싸우면 안 도와준다고. 난 원래 니들을 막으러 온 거야. 련주께서 그건 안 된다고 하셔서 방관하는 거지.”
철중구는 도리어 율사기에게 살기를 드러냈다.
“아까 그 지랄을 떨고도 도와달라는 말이 나오냐? 침 뱉은 거 사과하고, 애원해 봐. 그러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
율사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주저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
“미, 미안하네. 투견대주. 내가 잘못했네. 아군이 위태로운 상황이니 부디 힘을 빌려주게나.”
철중구는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싫어. 이 새끼야. 네가 알아서 해. 귀왕문은 몰라도 내가 니들을 도와줄 거 같냐?”
“이, 이놈이이!!”
율사기는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달려들지 못했다.
여기서 내분을 일으켰다간 자멸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철중구는 박장대소하며 약을 올렸다.
“카아하하! 그러게 착하게 좀 살지 그랬냐?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크하하!”
물론, 철중구도 몰랐다.
그냥 밀림을 헤매다가 인기척이 느껴져서 다가왔는데, 이렇게 됐을 뿐이다.
어찌 됐든 철중구는 율사기가 부르르 떠는 꼴이 통쾌했다.
“두고 보자! 살아나가면, 내 절대로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힘내쇼! 열심히 살아남아 봐! 내가 보기엔 힘들 것 같지만.”
더 말을 섞다간 혈압으로 쓰러지겠다.
율사기는 골육파각문의 수뇌부를 데리고 전장으로 몸을 돌렸다.
반면, 여전히 철중구를 노려보는 놈이 있었다.
“너… 투도, 네놈이…!”
“뭐, 인마. 아직 안 갔냐? 그만 야리고 얼른 네 할아버지 따라가라. 시벌 놈이 눈으로 검강을 뿜겠네.”
철중구는 ‘걸렸어.’라는 눈빛이었다.
그러곤 율제학이 부들거리자, 쐐기를 박았다.
“백날 눈에 힘줘봐라. 그걸로 사람이 죽나. 왜, 전설 속의 심검(心劍)이라도 터득하셨어?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 센 척은?”
무공은 제법일지 몰라도, 정신 수양은 아직 멀었다.
율제학은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철중구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 분명히 네가 먼저 뽑았다?”
부아아악―!
깔끔한 직도참격이 율제학의 머리를 갈랐다.
강해졌다고는 해도, 이토록 수준 차가 날 줄이야.
과연 패군의 진전을 이을 만한 실력이었다.
“제, 제학아…!”
전장으로 향하던 율사기가 비명을 질렀다.
손 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다.
문파의 희망이나 다름없던 손자.
아들보다도 아끼던 그를 잃자, 율사기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커흐흑! 투도 이놈! 너와, 네가 지키려는 수왕…! 너희의 내장을 끄집어내고, 그 몸을 조각해서 본문에 걸어둘 것이다!”
바라던 바다.
지금 철중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마른 비를 돕고 있었다.
「늙은이도 걸렸어! 온다. 준비해라, 투견대!」
철중구가 도를 움켜쥘 때였다.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율사기와 골육파각문의 수뇌부를 멈춰 세웠다.
“누구를 조각해? 미친 늙은이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휑한 왼팔과 잿빛의 눈동자.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노인이었다.
무지막지한 살기를 흘리며, 점창의 전(前) 인간 조각가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