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넌 또 뭐냐? 가만, 회색의 눈동자면…!”
회안검(灰眼劍).
만금당에 머무르던 설지굉이 운남의 혈사를 듣고 마른 비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율사기는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평생을 정처 없이 떠돌던 들개가 어쩐 일로 정착했나 싶었는데……. 네놈, 점창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나? 다시 구파의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 간 거냐?”
설지굉이 쓴웃음을 지었다.
가슴에 묻어두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른 비를 쫓았고, 십 년간 공들여 키운 설검대가 몰살했다.
쓰디쓴 배신과 처절한 좌절을 맛봤으며, 팔 한쪽을 잃었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모든 걸 잃은 후의 삶은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그 전환점은 마른 비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인생이란 게 참 묘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단 말이지.”
누가 알았을까?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원수가 몇 안 되는 가까운 사람이 될 줄이야.
적색분지의 소식을 들은 뒤에는 무얼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운남으로 달리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자문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
“파문당한 놈이 무슨 염치로 재입문한단 말이냐? 혼자 온 것이다. 너 같은 놈들이 비아를 괴롭힐까 봐.”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웃던 얼굴이 선하다.
진시황릉 탐사는 남은 생애에 다시는 겪지 못할 진귀한 경험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희한하지만, 설지굉은 마른 비가 보고 싶었다.
“회안검……. 네놈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잘 알고 있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어중간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부적응자. 참으로 어정쩡한 인생이 아닌가?”
율사기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호통을 쳤다.
“너 따위가 감히 내 앞을 가로막는단 말이냐?! 뭐라? 미친 늙은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해?!”
핏빛 살의가 끓어올랐다.
무공이 떨어진다지만, 그건 다른 칠문주들에 비해서다.
기라성 같은 사파의 방파들 중 일곱 번째 가는 세력을 구축한 자의 힘이 절대 약할 리 없었다.
율사기가 내공을 방출하자, 구역질 나는 불쾌함이 바람을 타고 번졌다.
평생토록 쌓은 살업이, 인간을 고문하고 유린했던 과거가 내공에 묻어나오는 듯했다.
“난 제학이의 복수를 할 것이다! 앞을 막는다면, 처참하게 죽여주마!”
율사기는 더 이상 뒤를 생각지 않았다.
그의 눈엔 찢어 죽여도 모자랄 원수만이 보일 뿐이었다.
“워워. 꼴에 사도칠문주라고 압박감이 장난 아닌데?”
철중구가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세월이 주는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
꼴도 보기 싫은 놈이지만, 율사기가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흥! 그래도 련주님의 일격만 할까?”
패군이 철중구를 보내준 조건.
도강이 아니라 수강이었고, 느낌상 마지막엔 슬쩍 힘을 뺀 것 같지만, 어쨌든 그는 받아냈다.
사파 지존의 일격을.
염우양이라면 모를까, 철중구는 율사기에게는 도무지 질 것 같지 않았다.
“덤벼라! 늙은이! 대갈통을 예쁘게 뽀사주마!”
철중구가 호기롭게 외치며 나설 때였다.
“빠져라, 애송아. 나를 모욕한 걸 못 들었나?”
설지굉이 검으로 그를 막아섰다.
철중구는 진심이냐는 눈으로 설지굉을 쳐다봤다.
“영감님. 내가 그쪽을 무시하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소? 비아랑 가까운 관계인 모양인데 괜히 나섰다가 후회하지 말고….”
스팟―!
설지굉은 검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앞머리가 잘려서 나풀대자, 철중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 영감 성깔하고는! 말로 하면 되지, 왜 다짜고짜 칼질이요, 칼질이?!”
철중구가 투덜대며 물러났다.
솜씨를 보고 깨달은 것이다.
설지굉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고수라는걸.
“거 노인네들이 힘도 좋네. 이럴 때마다 궁금하단 말이야. 할배들, 아침에 서쇼?”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함윤이 창피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설지굉이 다가서자, 골육파각문의 수뇌부가 앞으로 나섰다.
“문주님. 회안검은 저희가 정리할 테니, 해부단주의 복수를….”
설지굉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래도 그는 거침없이 걸어갔다.
“저, 저…! 뭔 노인네가 저렇게 막무가내야? 안 돼, 영감! 이리 오쇼! 선공만 양보하면 되니까 그다음에 우리랑 같이…!”
그때, 숲 너머에서 전음이 들려왔다.
「투견대주! 사도칠문을 돕지 않는 게 확실한가?」
“뭐여? 어떤 새끼가 숨어서 전음질을…?”
목소리는 답변을 재촉했다.
「빨리! 와족을 돕기 위해 온 게 맞느냔 말이다!」
“아, 보고도 몰라? 어떤 새끼길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꽁꽁 숨어서…!”
철중구가 대답한 순간, 우측 숲에서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호검대! 돌격하라! 골육파각문을 저지하고, 설 선배님을 지원햇…!”
호검대주 조광.
그 역시 사 년 전보다 한층 농익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점창은 와족을 돕기 위해 주력 검대 네 개를 전부 하산시켰다.
그중 세 개가 전장에 뛰어들고, 호검대는 매복 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마른 비와 친분이 있다는 건 알지만, 철중구는 사도련 소속의 무인이다.
점창 입장에서는 그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기에 견제할 병력을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지굉의 무모함이 그들을 뛰쳐나오게 했다.
율사기가 이를 갈며 외쳤다.
“병력이 또 있다고?! 이 정도면 총력전을 방불케 할 전력이 아니냐! 전쟁까지 치렀다면서 점창이 왜 야수족을 돕는 게야!”
너른 하늘이 씨앗을 심고, 마른 비가 싹을 틔웠다.
그리고 노을에 이르러 마침내 둘의 관계는 꽃을 피웠다.
누군가는 답답하다 욕했겠지만, 용서와 관용은 이렇듯 단단한 결속으로 돌아와 와족을 구원했다.
하지만…!
“카아악!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이…!”
갈고리가 인간의 육신을 꿰었다.
쇠톱이 갈지자(之)로 그어지며 피 분수를 뿜어 올렸다.
그그그극!
힘줄과 뼈가 갈리는 소리가 소름을 유발했다.
“아아악!”
“끄아아아…!”
율사기가 출수한 순간, 호검대의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잔거(殘鋸).
잔인한 톱날이자, 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일컫는 그것은 수십 년간 정파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별호였다.
“불나방 같은 것들이 누구에게 덤비는 것이냐! 봉검대나 운검대도 아니고, 네깟 것들이 노부를 감당할 성싶은가!”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엉망으로 훼손된 시신들이 바닥에 널렸다.
율사기는 발목이 잘리고 신음하는 호검대원의 목을 천천히 썰었다.
“끄, 끄아악…! 끄르륵!”
마인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모습.
도저히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잔혹함이었다.
“저, 저 미친….”
철중구조차 얼굴을 찌푸렸지만,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쩌어어엉―!
잿빛 강기가 활활 타올랐다.
수평으로 그은 회설검(灰雪劍) 일 초가 율사기의 톱을 밀어냈다.
놀랍도록 강인한 기파.
말년에 이르러 한계를 뛰어넘은 건 그믐만이 아니었다.
“심성이 비틀릴 대로 비틀렸구나. 부족한 자존감과 열등감이 잔인함을 더욱 부추겼겠지.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무시 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설지굉 본인의 과거 이야기였다.
율사기는 당연히 발작을 일으켰다.
“개소리 마라! 평생 어중간한 인생을 살아온 놈이 감히 누구에게 지껄이는 것이냐! 내가 바로 율사기다! 본문을 영광된 사도칠문의 일좌로 끌어올린…!”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
설지굉은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절대 너를 비아에게 보내지 않을 것이다.”
외팔이라는 결점.
한계를 넘었다지만, 그 정도로 칠문주의 무공을 넘볼 순 없다.
하지만 설지굉은 밀리지 않았다.
피가 튀고, 어깨뼈가 갈려 나간다.
그래도 잿빛 눈의 노인은 쉼 없이 전진할 뿐이었다.
“허! 뭐 저런 영감이…!”
그 투지는 철중구의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설 선배님을 지원하라! 목숨을 걸고 달려들엇! 파각문주를 절대 전장으로 보내선 안 된다!”
조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골육파각문의 고수들이 달려 나오며 호검대를 저지했다.
“어딜 가려 하느냐! 승부를 방해하지 마라!”
일장격돌이 벌어졌다.
골육파각문의 수뇌부는 강하지만, 그들은 십여 명에 불과했다.
당연히 승기는 팔십 명의 풍검대에게 있었다.
파각문이 자신 있게 나선 건 율사기가 설지굉을 금세 처리하고 합류하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커헉…!”
“미, 밀린다!”
“문주님은 아직인가!”
율사기는 오지 않았다.
뒤편에서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릴 뿐이었다.
“비켜라! 이놈들! 설 선배님을…!”
조광의 눈에 다급함이 깃들었다.
두 사람을 등지고 있는 파각문과 달리, 그는 싸움의 현장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호검대가 진형과 머릿수로 적을 누를 때,
푸아아아악―!
핏물이 터졌다.
시뻘건 갈고리가 설지굉의 가슴을 비집고 나왔다.
뒤이어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쇠톱이 배를 관통했다.
“끄, 끄르륵…!”
설지굉이 피거품을 토했다.
율사기는 거보라는 듯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다시 말해봐라. 뭐가 어쩌고 어째?”
“장로니임…!!”
조광이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는 자신이 설지굉을 장로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사이, 설지굉이 율사기를 막은 덕분에 호검대는 골육파각문의 고수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무, 문주님… 커헉!”
수하들의 비명이 들리자, 율사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이런! 안 된다…! 이놈이 하도 악착같이 달려드는 통에 정신이 팔려서…!”
그때, 꺼져 가던 회색 눈동자가 번쩍였다.
뻐어어억―!
박치기.
설지굉은 율사기가 주춤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피슛!
검강도 뭣도 아니었다.
완전한 탈력(脫力) 상태에서 그은 일검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설지굉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검격이었다.
“커… 허?”
율사기가 톱과 갈고리를 놓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깊이로 베였을 뿐이지만, 검은 목울대를 정확히 갈라놓았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울컥울컥 샘솟았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은 그때부터 벌어졌다.
배와 가슴이 뚫리고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설지굉은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스가각! 쩌억! 그극―!
베고, 베고, 또 벤다.
설검대를 조롱한 공유환을 처참하게 토막 낸 그때처럼.
설지굉은 힘이 다할 때까지 검을 휘두르다가 엎어져 버렸다.
“보내지… 않는다…….”
왜 이러는 걸까?
스스로도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 모르겠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처음으로 느낀 따스함 때문일까?
모르겠다.
그냥 마른 비에게 닥친 위험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다.
‘수지가 안 맞아….’
난생처음으로 들은 호칭, 할아버지.
그게 뭐라고 홀린 것처럼 이러고 있는지…….
‘희한해. 마음은 편하군….’
“설 장로님…!”
자신을 부르는 걸 들으며, 설지굉이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