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장로님! 아아…! 이, 이걸 어떻게…!”
조광이 무릎을 꿇고 설지굉의 상세를 살폈다.
갈고리가 오른쪽 가슴을 깊숙이 꿰었고, 쇠톱이 배를 관통하며 장기를 긁어 놓았다.
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회생 불가능한 상처였다.
설지굉은 눈을 감은 채 숨만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금창약을 가져와라! 비상시에 대비한 약들을 전부 꺼내!”
덧없는 명령이었다.
내상을 치유하거나 원기를 북돋고, 간단한 외상을 돌볼 순 있지만, 이토록 중한 상처를 다스릴 약이 있을 리 없다.
기적을 구현하는 전설상의 영약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환단이나 가루약 따위로 어쩔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쩡! 쩌저정! 치지징―!
조광의 정신을 들게 한 건 충돌음이었다.
날카로운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시선이 향한 곳에선 양측의 최고수들이 맞붙고 있었다.
“하압!”
열 자루의 조도가 서늘한 빛을 뿜는다.
설산의 한기를 품은 조공(爪功)이 공간을 헤치자, 귀기 어린 검격이 검음(劍音)을 토한다.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다리가 빈틈을 노리고, 묵직한 정권이 투로를 차단했다.
노을 대 염우양.
푸른 자연기와 자줏빛 귀기가 서로를 집어삼킬 듯이 충돌했다.
“흠!”
귀왕칠연격(鬼王七連擊).
북두칠성의 방위를 점하는 검공이 눈부신 속도로 허공을 오갔다.
검이 일곱 번째 위치에 도달한 순간!
키아아아악―!
귀곡성이 뿜어져 나왔다.
마른 비의 뢰창과 달리, 그건 검술과 내공이 어우러져 토해내는 순수한 검음이었다.
『이야아아아!』
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이다.
노을은 언령을 끌어올려 귀곡성을 흩었고, 양손을 번갈아 내쳤다.
투콰아앙―!
다섯 번의 일점집중타.
발로 펼치는 걸 손으로 대신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올빼미 사냥으로 구현한 중선오격이 귀왕칠연격에 맞섰지만, 내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큭…!”
밀린다.
회전의 묘에, 결을 따르며 반격을 꽂았지만, 염우양의 내력은 노을보다 월등했다.
조도와 검이 부딪칠 때마다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렸다.
“삐아아악―!”
창공을 배회하던 거조가 내리꽂혔다.
설산의 바람을 가르던 날갯짓이 극속의 영역을 파고든다.
눈 벼락.
공간을 압축한 칼바람이 염우양의 어깨를 낚아챘다.
“흐읍!”
쩌어어엉―!
칼바람의 자연기와 무게를 검 한 자루로 감당한다.
슬쩍 궤도를 비틀자, 검이 직각으로 솟구쳤다.
“위험해!!”
노을이 끼어들며 검격을 받아냈다.
검의 옆면을 때리자, 투로가 어긋났다.
다행히도 염우양의 공격은 칼바람의 발목에 생채기를 내는 데 그쳤다.
“차앗!”
공중 살법, 수리 날개.
혼신을 다한 연격이 허공으로부터 쏟아졌다.
염우양은 검을 가슴 앞에 세우더니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흠!”
고도로 응축된 검강이 귀면(鬼面)의 형상을 띠었다.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검환.
힘과 속도, 변화를 일수에 녹여낸 절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왕멸절세(鬼王滅絶勢)!”
염우양 필생의 절기가 밀림을 자줏빛으로 물들였다.
노을 또한 속성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자신이 아는 투술을 일격에 담았다.
“하아압!!”
올빼미 사냥, 중선오격, 바위 부수기와 산 허물기까지.
손과 어깨로 가동하는 모든 기예를 일수에 녹여낸다.
너무나 빨라서 도리어 느리게 보이는 독수리 사냥이 염우양의 검과 격돌했다.
번쩌어억―!
충돌음은 없었다.
흰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빛이 명멸하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공간을 엎어버릴 듯한 거력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저, 저럴 수가…!”
신음은 전장에 있는 귀왕문도들의 것이었다.
염우양이 제자리를 지킨 반면, 노을은 허공을 훨훨 날아서 착지했다.
뒤로 밀려났을 뿐 멀쩡하게 내려앉는 노을을 본 순간, 그들은 패배를 예감했다.
“후욱, 훅….”
강하다.
전투화장을 쓸 수 없다지만, 칼바람과 둘이 달려드는 데도 도무지 공략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순수한 무력으로 칠문 서열 삼 위를 지키고 있는 불세출의 검사.
염우양의 무위는 율사기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허허… 허허허…….”
그래서 염우양은 기가 막혔다.
중원 어디를 가도 상석을 양보 받는 자신이 갓 스무 살을 넘긴 여인에게 발이 묶일 줄이야.
초조한 마음과 달리, 염우양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투콰악!
“끄아아아…!”
쇄골이 부서진 귀왕십검 중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귀신같은 무위를 선보이는 노인.
슬쩍 봐도 십좌에 필적하는 괴물이다.
집채만 한 올빼미와 함께 기동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제압은커녕 귀왕십검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저쪽이….’
염우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력은 분명 노인이 여인보다 강하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희한하게 저쪽이 더 상대하기 편할 것 같았다.
올빼미를 빼고 일대일로 붙어도 이길 자신이 없지만, 묘하게 시선이 자꾸만 저리로 간다.
귀왕십검이 세 명째 쓰러진 순간, 염우양은 노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항복하겠네.”
와족과 점창의 합공을 받은 사파는 괴멸 직전이었다.
여기로 오는 중에 거둔 자들은 일찌감치 땅에 누웠고, 골육파각문의 마지막 생존자도 방금 척추가 부서지며 숨이 끊겼다.
남은 건 사십 여명의 귀왕문도뿐.
염우양은 그들과 귀왕십검을 살리기 위해 검을 내려놓았다.
“항복한다고?”
노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염우양은 죽으면 죽었지 항복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염우양의 시선을 쫓은 뒤에야 노을은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네. 완벽한 패배……. 정사대전에서도 이런 무력감을 느끼진 못했거늘. 난 단시간에 그대를 뚫을 자신이 없네. 설령 뚫는다 해도 제자들을 살릴 순 없겠지.”
염우양은 저항 의지가 없다는 걸 보이기 위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관용을 구할 만큼 염치없진 않네. 귀왕문주의 목. 그거면 전리품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노을이 좀 더 시간을 끌면 결국 모두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쳐달라는 부탁이었다.
허나 노을이 내놓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안 돼. 운남에 들어선 이상 살려 보낼 순 없지. 검을 들고 싸워. 후회가 없도록.”
노을은 느끼고 있었다.
염우양과 귀왕문이 톱 들고 설치는 살인마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걸.
이들은 순수하게 무력을 추구한다.
특히 눈앞에 있는 중년인은 명예와 희생을 아는 남자였다.
엄청난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진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는 점이 그랬다.
그건 마치….
‘청운진인. 금정신니. 그들과 흡사해.’
금광을 손에 넣기 위해 내려왔지만, 이자에게선 탐욕을 찾아볼 수 없다.
나름의 대의를 위해 움직였다는 느낌.
죽여야 할 자이지만, 죽이고 싶지 않은 자이기도 했다.
“정녕… 전부 죽여야만 하겠나?”
염우양의 눈은 간절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정리되어가는 전장에서 공유립이 그쪽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노을을 보고 있었다.
‘족장…….’
그의 눈은 아련했다.
애뢰산에서 맹수들을 토벌한 이후 처음이다.
애타게 보고 싶었던 얼굴이 아닌가.
공유립이 홀로 연모의 마음을 녹인 반면,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자도 있었다.
“……윤아.”
“네, 형님.”
철중구는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결심했다. 나, 장가간다.”
함윤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네? 갑자기 뭔 소립니까, 그게?”
철중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외쳤다.
“얘들아!”
“네, 형님!”
“앞으로 나를 대하듯 저분을 모셔라! 너희의 형수가 될 분이니까!”
싸한 침묵이 흘렀다.
대충 눈치를 보니 와족의 수장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럼 첫눈에 반했단 말인데…….
투견대원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원래 아는 사이십니까?”
“아니. 처음 봤다.”
“이름도 모르죠?”
“지금 처음 봤다니까?”
뭐라 대꾸할 말이 없다.
여염집 처자 같으면 정중히(?) 모셔서 맞선의 기회라도 만들어 보겠는데, 저 여인 아니, 저분께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
모두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귀왕문주와 맞장을 뜨고도 밀리지 않는걸.
“그… 형님. 저분은 좀… 뭐랄까?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뭐하지만, 형님보다 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요. 그리고 사도련이 있는 강남과 운남은 거리가 너무 멀….”
“멍청한 녀석!”
철중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중요한 건 사랑이다! 난 지금 사랑에 빠졌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냐?”
노을을 바라보는 철중구의 눈은 몽롱했다.
“저 자신감 있는 눈빛을 봐라. 거친 사내들을 따르게 하는 능력은 또 어떻고? 활력이 충만한 데다, 귀왕문주를 상대할 만큼 강하기까지 해!”
생기 넘치는 얼굴과 탄탄한 몸매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철중구는 딱 잘라 말했다.
“여신이다! 장사의 쾌남인 이 몸과 맺어지기 위해 하늘이 내린 여자야! 련주님께 개처럼 얻어맞으면서도 운남에 내려온 건 저 여자를 만나기 위함이었어!”
“그… 수왕 형님을 돕기 위해서 내려온 게….”
눈치 없는 누군가가 중얼대자, 함윤이 닥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상관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을 때는 건드리지 않고 모르는 척하는 게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똑똑히 지켜봐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 하늘이 내린 짝이라도 서둘러선 안 돼. 무릇 남자는 여인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법! 시간을 두고 내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겠다.”
철중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노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몇 발짝 못 가고 멈춰 섰다.
“으엉? 귀왕문주는 왜 저러고 있냐? 왜 벌 서는 애새끼마냥 무릎을 꿇었어?”
노을에게 반해서 전투는 뒷전이었나 보다.
빛이 번쩍이고, 대지를 뒤흔드는 거력이 충돌했는데 그걸 못 봤다는 것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염우양과 대화를 나누던 노을이 살기를 끌어올리자, 철중구가 황급히 외쳤다.
“자, 잠깐! 여자! 아니, 여신이여! 잠깐만 기다리시게! 그분은 죽여선 안 돼! 천생배필인 나를 봐서라도…!”
묵직하던 전장의 공기가 한없이 가벼워졌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다만 부끄러움은 함께 온 자들의 몫이었다.
“우리가 진 건가…….”
귀왕십검의 한 명이 중얼거렸다.
어느 순간 싸움은 끝나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귀왕문의 제자들도 염우양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패배.
장오의 장담처럼 개방이 준비한 패는 귀주 쪽에서 침입한 사도칠문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설 장로님…!”
여규가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는 철중구도 본체만체하며 지나쳤다.
대체 여기 왜 온 건지를 알 수 없는 친구보다는 죽어가는 어른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방법이…!”
여규는 붉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와족을 향해 소리쳤다.
“주술…! 그 신비한 공능을 이분을 위해 써주시면…!”
대답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왔다.
지친 표정의 여울이 은신처에서 나오며 안타까운 어조로 대꾸했다.
“어려워요. 지난 이틀간 전사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술력을 남발했습니다. 약간의 술력은 남아 있지만,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에요.”
신체의 자가 치유력을 북돋는 치유의 술.
단순한 자상이나 장기의 일부가 잘려나간 거라면 수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설지굉은 갈고리에 꿰이고, 톱날이 관통하며 장기가 제자리를 이탈한 상태였다.
이건 전문적인 솜씨를 지닌 의원의 영역이지, 술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선 장기를 제 위치로 돌려놓은 뒤에나 술력을 써서 회복을….
“내가… 내가 할 수 있네.”
떨리는 목소리가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넝마조각이나 다름없는 옷과 봉두난발을 한 노인.
적색분지에서부터 와족의 흔적을 따라온 화통달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