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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36화 (436/463)

436화

“괴의?! 괴의 어르신 아니십니까?!”

조광이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터뜨렸다.

대번에 화통달을 알아본 것이다.

설지굉을 끌어안고 울먹이던 여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괴의라고요?! 천하제일신의?!”

북벌에서 활약한 전의(戰醫) 부대를 만든 사람이자, 화타의 재림이라고까지 불리는 의원이 아닌가!

그의 아들인 화인걸과 손녀인 화수연.

여규는 마른 비, 철중구와 함께 그들과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두 사람이 몸속에 쌓인 탁기와 불순물을 빼준 덕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한데 그들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이 시점에 나타나다니,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르신! 정말로 설 선배님을 살릴 수 있으신가요?”

화통달이 왜 여기 있는지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설지굉이 살아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게 중요할 뿐.

여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어쩐 일인지 화통달은 침울해 보였다.

걸쭉한 욕설과 기행으로 유명한 사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슬픈 눈으로 와족이 있는 쪽을 흘깃거렸다.

“그래…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화통달이 설지굉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화통달이 걸인처럼 꾀죄죄한 데 반해, 하얀 천에 쌓인 그것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거기서 비켜. 그리고 깨끗한 물을 두 바가지 준비해라.”

화통달이 지시를 내리며 천을 풀었다.

그 안에는 단단한 재질의 목곽이 있었다.

따각.

덮개를 열자, 예리한 철제 도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개를 위한 칼과 전도(剪刀 : 가위), 조직이나 피부를 집거나 고정할 때 쓰는 집게, 특수 제작한 봉합용 실까지.

수술(手術)의 개념조차 모르는 여규지만, 그것이 치료를 위한 도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화통달은 능숙한 솜씨로 수술 도구를 늘어놓더니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곤 하얀빛을 담은 손으로 도구들을 쓰다듬었다.

“아…! 그게 그 유명한…!”

여규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탄성을 흘렸다.

방금 그게 무엇을 위한 행동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백원약수공(白原藥手功).

화가 비전의 기공은 적을 격살하는 용도뿐 아니라 소독과 멸균의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의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을 리 없다.

전장에서 일일이 물을 끓이며 도구를 소독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화가의 무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원의 본분을 다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찢긴 장기를 봉합하고, 제자리에 돌려놓을 거다. 내 반드시 명줄을 붙여놓을 테니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

화통달은 신음하는 설지굉에게 말했다.

그러곤 약봉지 하나를 열어서 상처에 뿌리고, 백원약수공을 깃들였다.

마비산. 와족 전사들을 쓰러뜨렸던 그것이 본래의 용도대로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고 있었다.

화통달은 마취와 소독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처치에 들어갔다.

재질을 짐작하기 힘든 수투를 끼더니, 양손을 현란하게 움직여서 지혈과 봉합을 반복했다.

그러자 너덜너덜해진 장기가 원형을 찾았다.

어긋나고 뒤틀린 장기를 원위치시키고,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비전의 약제로 명맥을 붙든다.

울컥울컥 샘솟는 핏물은 보는 이까지 아프게 만들었으나, 설지굉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비산의 약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건드리는 걸 느꼈는지, 설지굉이 힘겹게 눈을 뜰 때였다.

짜악―!

화통달이 갑자기 설지굉의 뺨을 후려쳤다.

모두가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설지굉도 눈을 부릅뜨며 화통달을 노려봤다.

“이, 이게 뭔…?”

“정신 차리라고 했다! 목 위로는 감각이 있을 게야! 잠들면 죽는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의식을 붙들어!”

설지굉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갈고리와 톱에 꿰뚫리고 생사를 오가는 중이었는데, 웬 늙은이 하나가 나타나서 뱃속을 휘젓고 있다.

어차피 죽을 몸이니 뭘 하든 상관은 없는데, 뺨을 맞았다는 게 분했다.

설지굉은 당장 죽는 것보다 그게 더 열이 받았다.

“이… 미친 늙은이가… 감히 누구 뺨을…!”

짜악―!

“누구긴 누구야! 다 죽어가는 회색 눈깔 외팔이지! 입 열 힘이 있으면 그걸로 정신을 붙들어라!”

“너… 뭐 하는 새낀데 내 몸을 멋대로…!”

짜악―!

“이 육시랄 놈이 닥치라니까 계속 주둥이를 놀리네! 살고 싶으면 이 꾹 깨물고 자빠져 있어!”

“이놈이…! 내 몸만 움직이면 네놈을 조각내서 그걸로 탑을 쌓아줄 것이다!”

다 죽어가던 인간이 어디서 저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다.

설지굉은 핏발 선 눈으로 오금이 저릴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화통달이 됐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아. 늙어빠진 노인네가 깡다구가 있어. 그러니 율사기를 베었겠지.”

“……!”

설지굉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려서 옆을 바라봤다.

거기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조각이 난 율사기의 시체가 있었다.

“대단했어. 전율이 이는 광경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순간의 틈을 잡아채는 집념이라니.”

화통달은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그러면서 계속 설지굉에게 말을 걸었다.

응급 처치에 들어가기 전까지 갈고리와 톱을 뽑지 않아서 출혈로 죽는 건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빠져나간 피가 너무 많다.

수혈할 방법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설지굉의 기력과 생명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화통달은 그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내가… 저놈을 잡은 건가…….”

반 정도는 의식이 날아간 상태에서 검을 휘둘렀다.

놈이 한눈을 팔 때 박치기를 한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처참한 광경이지만, 율사기의 시체를 보고서야 설지굉은 비로소 자신이 승리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칠문의 문주를 일대일로 꺾었으니 회안검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시키겠지.”

화통달이 장하다는 듯 말했다.

“흥! 잔인해서 이름을 떨친 거지, 저놈의 무공은 원래 별 볼일 없었어.”

설지굉이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런가?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화통달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지굉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래도 칠문의 문주다. 아무나 저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냐? 이랬다저랬다 뭐라는 거야, 이놈이?”

뭘 어쩌라는 건지.

칭찬을 해줘도 지랄이다.

화통달은 설지굉의 복부를 봉합하다 말고 툭 내뱉었다.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알겠다. 너, 친구 없지?”

“…….”

아픈 곳을 찔린 모양이다.

설지굉은 입을 꾹 다문 채 하늘만 바라봤다.

“큭큭. 알기 쉬운 성격이군. 고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끝났어.”

화통달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을 진행하랴, 설지굉에게 말을 걸랴, 보조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홀로 모든 걸 해낸 그는 지쳐 보였다.

“어, 어르신. 그럼 설 장로님께서 살 수 있는 겁니까?”

여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봉제 인형처럼 흉한 상처가 남았지만, 복부와 가슴이 꿰뚫리고 내장이 밖으로 튀어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설지굉은 훨씬 좋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뜨기도 힘든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화통달이 설지굉을 힐끗 보며 말했다.

“이대로는 힘들다. 모든 게 갖추어진 의원에서라면 모를까, 여기선 소생 확률이 반의반도 안 될 거야.”

“그, 그럴 수가…!”

화통달은 암담한 전망을 내놓으면서도 태연하게 수술 도구를 정리했다.

그러곤 점창의 제자들이 준비한 물에 도구를 씻고, 백원약수공을 일으켜서 그것들을 소독했다.

“나밖에 없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아까 네가 말한 그것. 치유의 능을 이야기한 게 아닌가?”

화통달이 고개를 돌려서 뒤에 서 있는 여울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 시대 의술의 정점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을 받고서야 여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이 뒤는 제게 맡겨주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어르신! 정말 대단하시네요!”

여울은 즉각 술력을 발동했다.

연녹색의 기운이 내려앉자, 할딱이던 설지굉의 호흡이 점차 길고 편안해졌다.

화통달의 의술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능력의 끝을 보여줬다면, 여울의 술법은 문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설지굉의 맥을 짚어본 화통달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허…! 벌써 안정세에 접어들었어? 어떻게 이럴 수가…!”

화통달은 여울이 자신을 보던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비슷한 능력을 지닌 자들을 몇 번 보았지. 볼 때마다 놀랐지만, 소저의 실력은 그중에서도 발군이군. 한데… 뭔가 미묘하게 느낌이 달라. 설마 그것, 타고난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갈고닦은 건가?”

과연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자다운 안목이었다.

심지어 화통달은 천인회나 영령이 지닌 초능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듯했다.

엄밀히 따지면 와족의 술사는 대자연의 점지를 받은 이후에 후천적인 노력으로 술력을 증강시킨다.

해서 단순한 술법으로만 분류하기엔 조금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

어찌 됐든 화통달은 슬쩍 보는 것만으로 그 미묘한 차이를 짚어낸 것이다.

반면 초능이 무엇인지 모르는 여울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으음……. 정말 대단한 능력이야. 초능이든 술법이든 이토록 뛰어난 경지에 오른 자는 드물지. 덕분에 이 친구는 살겠구먼.”

여규와 점창의 제자들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수년 만에 보았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설지굉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그들은 설지굉의 과거와 성격을 알고 있었고, 그가 돌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또한 율사기를 쓰러뜨렸다는 게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마비산의 약효가 풀리면 끔찍한 통증에 시달릴 게야. 가끔은 고통을 못 이기고 절명하기도 하지만… 이 소저 덕분에 그럴 일은 없겠군.”

화통달은 수술 도구를 챙기곤 일어서며 말했다.

“도구를 씻은 바가지는 새로 물을 길어. 그리고 날 따라와. 이쪽 바가지에 든 깨끗한 물은 환자에게 먹이고.”

화통달은 와족이 있는 방향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눈을 꾹 감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마비산이고, 그것으로 셀 수 없는 생명을 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와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남겼다.

화통달은 그 점이 너무나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공지량…….’

‘사람을 살리는 데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 것이며, 어떠한 판단도 배제하라.’

의원이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정한 원칙이다.

아니,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내려오던 가훈이다.

의원은 환자를 살리는 사람이다.

아픈 사람이 오면, 최선을 다해 살리고 본다.

그것이 의원의 본분이며, 그 뒤에 벌어질 일은 그때 가서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껏 잘해왔거늘. 이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이야…….’

어찌 모를까.

그게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이라는걸.

하지만 환자를 가려 받기 시작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되는 순간, 본분은 점차 흐려질 수밖에 없다.

악한 자와 선한 자, 죽일 자와 살릴 자를 나누게 된다.

그 판단이 항상 옳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시간이 흐르다 보면 돈이 되는 환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게 된다.

힘이 있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게 되며, 활인을 위한 의술을 권력처럼 휘두르게 된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에.

세상 대부분의 의원이 그런 것처럼.

그래서 처음 정한 신념을 허물어선 안 되는 것이다.

‘본원을 위해서도 그리해야 했지.’

앞선 화두가 백원 의원 내부의 문제라면, 외부의 반응은 더욱 즉각적이다.

환자를 가리기 시작하는 순간, 세상이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독보적이란 말이 부족하지 않은, 당대 최고의 의술.

그런 걸 지니고도 지금껏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모두를 공평하게 치료하기 때문이었다.

환자의 적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았던 것도, 세간의 명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협검 같은 이가 온 힘을 다해 도와주었던 것도 선조들이 세운 철칙을 지킨 덕분이었다.

‘허나 이번만큼은….’

회한이 휘몰아친다.

적색 분지에서 벌어진 사건과, 생명의 은인인 마른 비가 울부짖는 걸 보며, 화통달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두고두고 갚으리라. 내 모든 걸 다해서…!’

화통달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러곤 부상으로 신음하는 와족 전사들에게 걸음을 옮겼다.

온 마음을 다해 사죄하리라고, 저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편안한 일상을 되찾을 때까지 종군(從軍)하리라 결심하며.

짜악―!

화통달이 비장하게 나아갈 때, 찰진 소리가 울렸다.

와족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인.

그녀의 앞에는 뺨을 얻어맞은 철중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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