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부끄러운 거야.”
볼이 벌겋게 물든 철중구가 말했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후후. 바로 넘어오면 재미없지.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다.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어.”
철중구는 뜨거운 눈으로 노을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노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눈으로 철중구를 노려봤다.
철중구는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노을은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위아래를 훑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함윤이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형님. 뭐라고 하신 겁니까?”
마음 같아선 처음부터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귀싸대기를 올려붙인 노을에게 따지지도 못했다.
철중구가 착각에 빠져서 실수를 저지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엉? 뭐라고 하긴 뭘 뭐라고 해? 귀왕문주를 살려달라고 했지.”
그건 알고 있다.
‘천생배필인 날 봐서~!’ 운운하며 달려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거기까진 큰소리로 외쳐서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철중구는 자신이 마른 비와 매우 가까운 사이이며, 와족을 돕기 위해 내려왔다는 걸 피력했다.
노을도 그 정도는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원래는 투견대가 귀왕문과 한편이고, 그들이 가세했다면 전투의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노을은 철중구의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에는 현재의 정세와 상황을 설명했지. 귀왕문주까지 죽여 버리면 사도련이 본격적으로 파병할 수도 있다고.”
율사기와 달리 염우양이 사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의 성품은 련주인 태호천조차 존중을 보낼 정도였으니까.
끝까지 항전했다면 모를까, 무릎을 꿇고 항복했음에도 목숨을 거두면 상황이 달라진다.
철중구는 또 다른 강적을 맞이해야 할 상황에서 그건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님을 강조했다.
염우양을 돌려보내면 최소한 사도련과 충돌할 일은 없을 것이며,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라고.
철중구가 그 정도 영향력이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상당히 조리 있고 그럴듯했다.
그 결과, 귀왕문을 정리하려던 노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진심으로 비아를, 그리고 저희를 걱정해주시는군요. 고마워요.’
노을은 철중구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리고 호의의 미소를 띠며 감사를 표했다.
상황이 틀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노을이 보여준 미소.
그게 철중구의 이성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형님! 천천히 매력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인이 마음을 열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너무 아름다웠다. 네가 그녀를 눈앞에서 봤어야 해. 도저히 참을 수 없었지.”
철중구가 몽롱한 눈으로 말했다.
함윤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그래서 덥석?”
하지만, 철중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난 예의와 존중을 아는 사나이다. 그전에 먼저 말을 건넸지.”
“뭐라고….”
“결혼하자고.”
함윤뿐만이 아니라 듣고 있던 투견대 전체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철중구는 그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부끄러워하더군. 그래서 내 마음을 보여주었지. 사내는 모름지기 여인이 따라올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법이니까!”
철중구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이란 싸움과 같다. 박력과 기세! 결정했다면, 행동에 나서는 거야!”
그래서 손목을 붙잡은 거다.
그리고 붙잡자마자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거다.
‘하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착각의 늪에 머리까지 잠겨서, 끌어안거나 입을 맞추려 했다면?
그랬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함윤은 염우양과 싸우며 펄펄 날던 노을을 떠올리곤 식은땀을 흘렸다.
“후후. 그렇게 된 거다. 아직은 부끄러운 모양이야. 그렇다면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지.”
철중구는 자기가 차였을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다.
아니, 아예 그런 걸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상황이….’
함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형님. 실례지만 혹시 여인과 만나신 적이?”
철중구는 뻔한 걸 왜 묻냐는 표정이었다.
“엉? 졸라 많지. 장사에서 내가 지나가면 여인들이 껌뻑 죽었다. 나랑 말이라도 섞기 위해 난리도 아녔어.”
장사의 쾌남.
철중구는 장사의 길거리를 휘어잡았다고 했고, 함윤이 보기에 그건 거짓이 아닐 듯했다.
야투에서도 손꼽히는 투사라고 했으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근데 왜….’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가 있지?
여자를 한 번도 못 만나본 채 망상만 부풀린 사람도 아니고, 많이 만나본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냔 말이다.
함윤과 투견대는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퍼뜩 함윤의 뇌리를 스쳤다.
“형님! 혹시 장사에서 만난 분들을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철중구는 그런 걸 왜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긴 어디냐. 기방, 주루, 홍루, 투기장, 도박장……. 아주 다양한 곳에서 만났지.”
“그럼… 길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보고 반했다거나, 먼저 고백을 했다거나, 술 없이 가까워졌다거나, 편지를 쓰고 밀어를 속삭인 경험은….”
“없는데? 뭐 하러 그런 답답한 짓을 해?”
함윤은 깨달았다.
투견대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동시에 탄식했다.
“아아…….”
‘우리 형님이 연애 고자라니!’
생략되었지만,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었다.
“……장사를 나오신 이후에 여인을 만나신 적은 없으실 테고. 맞죠?”
“그럴 겨를이 없었지. 비아를 따라… 아니, 함께 다니면서부터는 주구장창 싸움만 했다. 뭐, 사도련에 간 뒤로는 너희와 싸웠고.”
“아, 아아……. 형님…!”
이럴 수도 있구나.
여자 경험이 많은 인간이 연애는 아예 문외한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거구나.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보기 힘든 사례를 목도한 투견대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냐? 그 표정들은?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아니, 너무 잘 믿겨서 문제요, 형님.’
함윤은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고민할 때, 굉장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가 다가왔다.
와족 족장의 호위로 보이는 남자.
어스름을 마주하자, 투견대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뭐요? 우리에게 할 말이 있소?”
함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싹 바꾸며 앞으로 나섰다.
어스름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서 철중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곤 물었다.
“보자마자 난데없이 청혼이라니……. 뭐 하는 녀석이신가?”
함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
투견대도 마찬가지였다.
철중구만 뻔뻔했다.
“사랑이다. 그쪽이 사내라면 날 이해 못 할 리 없을 텐데?”
“이해하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그쪽이 말하는 사내와, 내가 아는 사내의 정의가 너무 달라서 혼란스럽군. 자네, 제정신은 맞는 거겠지?”
투견대는 십 할 동의한다는 표정이었고, 철중구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봐. 왜 다짜고짜 시비야? 싸우고 싶은 거면 그렇다고 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안 그래도 고민 중이다. 다짜고짜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그렇고, 족장님의 손목을 잡은 것도 그렇고. 원래라면 혼줄을 내야겠지만… 광인이라면 예외를 둘 수도 있으니까.”
눈과 눈이 마주치며 불꽃을 튀겼다.
함윤이 황급히 나서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중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내, 내가 대신 사과드리오. 우리 형님께서 뭘 모르셔서 한 실수이니 너그럽게….”
“넌 뒤로 빠져! 내가 뭘 모른단 말이냐!”
철중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어스름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철중구를 살폈다.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뒤돌았다.
척 봐도 철중구를 미친놈이라고 결론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반했다는 건 사실인 것 같군. 머리는 좀 이상해도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아.”
그리고 철중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덧붙였다.
“괜히 헛물 들이켜지 말게. 봐서 알겠지만, 자네가 넘볼 만한 분이 아니야.”
철중구가 울컥한 얼굴로 항변했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이래 봬도 험난한 삶을 살아온 남자요! 인생 풍파를 이겨낸 사나이의 매력으로 그녀의 마음을 녹여주지!”
“험난한 삶이라…….”
어스름은 피식 웃었다.
“강대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삼 년 내내 사선을 넘나들며 싸워봤나?”
“……?”
“잠깐 서 있기만 해도 몸이 얼어붙는 설산에서 맹수들을 사냥하며 생존해봤고?”
“으엉? 뭔 소릴 하는 거요?”
어스름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아…!’ 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살기 위해 사람 배를 가르고 들어가 본 적은?”
“이 인간이 뭔 미친 소리야? 돌았소?”
어스름이 단정적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족장님 앞에서 험난한 삶이니, 거친 사나이니 하는 말은 꺼내지도 말게. 우스워 보이기만 할 테니까.”
그 말만 남기고, 어스름은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철중구가 멍하게 있다가 중얼댔다.
“사람 배 속?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세상에 그런 미친 짓을 하는 놈이 어디 있어?”
그러다가 그는 알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옳거니! 저 인간도 족장을 좋아하는구만? 그래서 경쟁자를 떨구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릴 늘어놓는 거야!”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닌 결론이었다.
철중구는 자신의 천재적인 추리에 놀라워하다가 흠칫했다.
“잠깐만! 근데 진짜면?”
잠시 말을 잃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면… 그러면…… 존나 매력적이지! 아름답고 강한 데다 생존력까지 끝내주는 여자! 음… 최고야!”
함윤과 투견대는 포기했다.
천지가 뒤집혀도 자신들의 힘으로 철중구를 계도(?)하는 건 불가능하리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착각신공(錯覺神功)은 당사자에게 된통 까여봐야 파훼될 수준이었다.
‘그전에 허튼짓하다가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
염우양이 귀왕문의 생존자들을 데리고 철수하는 게 보였다.
그는 노을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서 고마움을 표했다.
함윤은 그것으로 당분간 사도련이 운남으로 내려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저쪽은….’
화통달과 여울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편엔 와족과 점창의 수뇌부가 모여 앉아서 다음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우리도 저기 껴야 하는데….’
마지막 남은 강대한 적.
정도맹의 주인이자, 하늘이 내린 검이라는 운종학과의 일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진영을 막론하고 하나로 뭉쳐야 할 때였다.
“흐흐흣.”
그런데 대주라는 작자는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하아…….”
함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아무 생각이 없던 철중구지만, 지금은 더욱 무념(無念)에 가까워진 듯하다.
그래서 함윤은 그를 놔두고, 자신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갔다.
공지량으로 인해 촉발된 금광쟁탈전.
수천 명의 침입자를 모조리 격퇴한 와족은 마침내 가장 강대한 적과의 일전만을 남겨놓았다.
노을이 귀주 방향으로 진입한 사도련을 물리치고 부상자를 추스를 때, 마른 비는 정도맹의 정예를 상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