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38화 (438/463)

438화

남천제

《저벅, 저벅.

거미줄 무성한 복도에 발소리가 메아리친다.

서늘한 한기와 쥐죽은 듯한 침묵.

들리는 건 오로지 발을 내디디는 소리뿐이었다.

뚜벅, 터벅, 뚜벅, 저벅….

발자국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음들이 겹치는 걸로 볼 때, 최소 두 명 이상.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그곳에 햇살 한 줄기가 흘러들어 왔다.

벽의 틈새를 파고든 빛이 선두에서 선 사내를 비췄다.

간편한 경장 차림의 사내는 얼굴을 굳힌 채 어두운 복도를 쭉쭉 나아갈 뿐이었다.

“후우….”

금세 목적지에 다다른 그는 숨을 들이켜고서, 얼마나 방치된 건지 짐작하기 힘든 돌문을 밀었다.

그그긍―.

촛불이 일렁거리는 석실.

최근 가져다 놓은 게 분명한 탁자 건너편에서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왔군.”

오십 중반쯤 될까?

금빛 무늬가 새겨진 흑색의 장포가 눈길을 끌었다.

대외적으로는 친군도위부(親軍都尉府)로 알려져 있지만, 황제가 친히 이름을 내린 비밀 조직.

복장의 화려함으로 짐작건대 중년인은 그 집단의 수장으로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가 눈을 빛냈다.

“거기 앉게.”

중년인이 손가락을 깍지 끼며 탁자 위에 얹었다.

그러곤 턱을 까딱이며 명령했다.

사내는 심유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없이 지시에 따랐다.

“일단 고생했다는 말을 해야겠군. 갑자기 불러서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을 텐데, 서두른 모양이야.”

사내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중년인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한데… 복장이 그게 뭔가? 첫 대면인데 경장 차림이라니. 내가 우습게 보였나?”

중년인의 눈썹은 굵었다.

그리고 심중을 파헤칠 것만 같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는 본 사람이 없다는 남자.

가까이서 관찰하니 확신이 들었다.

대역이 아닌 진짜라는 걸.

이자의 얼굴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위험을 무릅쓴 보람이 있다.

그래서 백강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우습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금의위(錦衣衛)의 대영반(大領班) 나리를 일개 야인에 불과한 제가 어찌……. 급히 달려오느라 의복에 신경 쓰지 못한 점, 양해해 주시길.”

상대가 진짜라는 걸 확인한 뒤에야 백강은 공손히 포권을 올렸다.

중년인은 ‘금의위’라는 단어에서 움찔했지만, 금세 평정을 찾았다.

그러곤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야인이라……. 개방과 하오문으로 대변되는 중원 무림의 정보 단체. 백 년이 넘도록 흔들리지 않던 양강 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장본인이 할 소린가?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군.”

황제 직속의 정보 보안 기관.

황제의 시위(侍衛)와 궁정의 수호뿐만 아니라 정보의 수집, 죄인의 체포 및 신문까지도 도맡는 친군도위부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집단이다.

하지만 그건 껍질일 뿐 진짜 힘은 금의위에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아는 자도 드물지만, 백강은 언젠가 이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서리라 확신했다.

그 정점에 자리한 자가 바로 대영반이니, 백강은 지금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거나 마찬가지였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그리됐을 뿐. 식구들을 건사할 능력도 모자란 저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삭월의 총력을 기울이고도 지금껏 대영반의 정체를 캐지 못했다.

소환 명령에 불응하기도 어려웠지만, 백강은 두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했다.

황실대무림총책(皇室對武林總責).

그 장본인의 성향과 의중을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뭐, 좋아. 쓸데없는 잡설은 집어치우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가 맞지?”

앞뒤를 전부 잘라먹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알아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난데없이 그리 물으시면……. 무엇이 맞느냐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럼에도 백강은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대영반의 뒤에 서 있던 자들이 눈가를 씰룩였다.

“어디서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냐! 당장 말씀 올리지 못할까!”

“네 이놈! 지금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으렷다!”

금의위 위사들이 엄포를 놓을 때였다.

백강의 뒤에서 묵직한 저음이 들렸다.

“갑자기 기한에 맞춰 달려오라질 않나, 알아먹지도 못할 질문을 던지질 않나……. 최소한 알아듣게는 물어야 말씀을 올릴 것 아닙니까? 원래 황실의 행사란 게 이런 것이오?”

존대를 쓰고 있을 뿐 오만불손한 태도였다.

위사들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건방진! 누구 앞에서 그따위 태도를…! 목숨이 열 개라도 된단 말이냐!”

“대영반! 명만 내려주십시오! 저 불손한 놈의 목을 바치겠나이다!”

위사들이 날뛰는 데 반해, 대영반은 태연했다.

그는 손을 들어서 위사들을 진정시키고, 입을 연 사내를 바라봤다.

“그 얼굴……. 기억에 있어. 자네가 그 유명한 월검대주로군.”

삭월을 수호하는 검.

월검대주 육강패가 진하게 웃었다.

“뭘 저 같은 놈까지 기억해 주시고. 영광이오, 대영반 나리.”

그는 포권을 취한 뒤에 위사들을 바라봤다.

“방금 소리친 놈들은 이따 회담이 끝나고 따라 나와라. 자신이 있으니 꿱꿱 떠든 거겠지?”

‘대영반에게는 어쩔 수 없이 숙이지만, 너희에겐 아니다.’

육강패는 눈으로 그리 말하고 있었다.

금의위 위사들이 분노하며 부들거렸다.

대영반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삭월주에 월검대주. 쟁쟁한 인물들이로군. 자, 그러면 이쪽은 누구신가?”

육강패와 함께 월주를 따라온 사내.

그는 지금껏 입을 열지도 않고, 기운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내가 대꾸하려는 찰나, 탄성이 터졌다.

“도와 철창! 등에 멘 여섯 자루의 단창…! 대, 대영반! 이놈, 수라입니다…!”

명성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존재감이었다.

하지만 대영반은 알고 있었다.

사내가 일부러 기운을 갈무리했다는 걸.

오히려 이토록 눈에 띄는 무기를 들고도 이목을 끌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출중함이 엿보였다.

“전룡이오.”

전룡은 고개만 까닥였다.

꼴도 보기 싫지만, 억지로 인사를 한다는 느낌.

앞선 둘과 달리, 그는 적대감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라…! 수라를 데려왔단 말인가? 허허! 이러고도 모른 척을 할 셈인가, 월주?”

대영반은 딱 걸렸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수라는 사도련주가 불러도 내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남자라고 들었다. 한데 그사이에 불러들여서 여기까지 데려왔단 말이지? 이러고도 시치미를 뗄 셈이냐!”

대영반은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커져만 갔다.

“엇?!”

“으음…!”

육강패와 전룡이 침음을 흘렸다.

백강 또한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놀랍구나!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월검대주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이라니!’

진면목을 드러낸 대영반은 지금 당장 중원에 나가도 손꼽힐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자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게 놀라울 따름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백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던 자가 얼굴은 물론이고 무공까지 드러낸다는 건…!’

생존 감각이 맹렬하게 위험 신호를 보냈다.

월검대주와 수라, 그리고 자신이면 전면전이 벌어져도 문제가 없으리라 예상했는데, 금의위의 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놀랐느냐? 무림인이란 결국 칼 찬 무법자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까지 너희 같은 불온한 놈들이 설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자, 선택해라. 여기서 전부 죽을 것인지, 무릎을 꿇고 아는 걸 전부 실토할 것인지!”

금의위 위사들이 석실을 둘러쌌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지만, 군데군데 껴 있는 놈들은 놀랄 정도로 강하다.

이놈들에 대영반까지 합세한다면 큰소리를 칠 만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백강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이리 강경하게 나오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저희’가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까? 천하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황실을 위협하는 건 ‘그놈들’입니다.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설마….”

대영반은 일말의 여지도 없는 단호함으로 백강의 말을 잘랐다.

“갈(喝)!! 무슨 소릴 늘어놓으려는 것이냐! 순순히 따르지 않을 줄 알았다! 힘으로 무릎 꿇리고, 주리를 틀어서라도 네놈들의 목적을 밝혀내고 말 것이야!”

그그그긍―.

불길한 소음이 울렸다.

석실의 벽면이 돌아가며 출구를 없애버렸다.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이런 곳으로 부른 줄 알았는데, 여긴 금의위가 설치한 함정이었다.

두쿵―!

육중한 압력이 세 사람의 어깨를 짓눌렀다.

기관과 결합된 고위 진법.

영령의 초능을 연상시키는 중력이 백강 일행을 덮쳤다.

나름 철저히 알아보고 왔건만, 폐사찰에 덩그러니 놓인 석실은 금의위의 적을 제압하기 위한 덫이었다.

“자, 말해라! 진영도, 소속도 제각각인 놈들이 모여서 무얼 꾸미는 것이냐!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는 너희들을 뭉치게 한 목적이 있을 터! 그 끈이 네놈이라는 걸 모를 것 같은가!”

백강은 억울했다.

회(會)가 뜻을 같이하게 된 건 ‘그놈들’ 때문이다.

그리고 설립 과정에서 자신이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개성 강한 자들을 한데 뭉칠 수 있게 만든 건 다른 사람이었다.

“피를 보아야만 입을 열 놈이로군.”

대영반이 검을 빼 들었다.

분위기로 보건대 팔다리 하나쯤은 자르고 시작할 기세였다.

“으윽! 빌어먹을! 누가 이 진법만 부숴주면…!”

육강패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외쳤다.

황실과 충돌하는 건 피해야 하지만,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문제는 제대로 싸워볼 수도 없다는 것.

금의위가 작심하고 돈과 인력을 쏟아부어서 만든 함정은 엄청났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너희 같은 강자들을 잡기 위해 특수 제작한 덫이니라.”

대영반이 웃음을 흘릴 때였다.

투콰앙―!

벽면 한쪽이 통째로 날아갔다.

촛불이 꺼지고, 햇살과 함께 맑은 공기가 훅 밀려들어 왔다.

“아, 아니?!”

뻥 뚫린 벽면엔 햇살을 후광처럼 두른 사내가 서 있었다.

“음……. 여기가 아닌가?”

자연스러운 척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목소리.

재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삼류 경극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 같다.

석실로 어정대며 걸어 들어온 사내가 백강에게 말했다.

“우, 우와~ 월주 아냐? 세상에 이런 우연이…! 어, 음… 나는 아내한테 줄 수태선(受胎蘚)을 찾으러 왔어.”

멍하게 있던 대영반이 소리를 빽 질렀다.

“뭐 하는 놈이냐! 순산을 돕는 이끼를 여기서 찾는다고? 어떤 미친놈이길래 감히 금의위의 행사를 방해하는…!”

“크르르…….”

난데없는 맹수의 울음이 그의 말을 끊었다.

석실로 들어오는 햇살을 가로막는 거체.

새파란 야수의 안광이 금의위 위사들의 육신을 옥좼다.

“배, 백아…!”

누군가가 신음을 흘리자, 위사들이 경악했다.

“남제(南帝)?!”

비명을 터뜨렸던 누군가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세간에 널리 쓰이는 별호라 해도 금의위 소속인 그가 황제 이외의 인간에게 ‘제’의 칭호를 붙이는 건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수왕이라니?! 수왕이 왜 여기에…!”

결국 그들은 한 단계 격하시킨 칭호로써 놀라움을 대신했다.

대영반이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이놈이 진법을…! 확실하구나! 이 역적 놈들이 전부 한통속이었어!”

볼 것도 없다.

우연 어쩌고 하지만, 백강이 부른 것이리라.

대영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살기를 흘렸다.

“음? 살기?”

마른 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영반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가 반응하기 전에 포효가 먼저 터져 나왔다.

“커허허헝!”

별비의 울음은 대영반에게 현실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진법이 깨진 이상 기존의 세 명을 감당하는 것도 벅차다.

여기에 수왕과 백아가 더해지면….

“빌어먹을 야만족 놈! 네가 왜 한족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마른 비는 여전히 어색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이야? 난 수태선을 찾다가 우·연·히 여기에 온 거라고.”

“어디서 개수작이냐!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은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역시 네놈은 운남 혈사 때 죽어버렸어야…!”

“뭐라고?”

마른 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입에 올릴 게 따로 있지……. 너 지금 선 넘은 거 알지?”

금의위의 대영반에게 ‘너’라고 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후우우욱―.

자연기가 절정까지 치닫는 건 한순간이었다.

무지막지한 기파가 석실에 가득 찬 순간!

“커, 커헉…!”

“우으음…….”

금의위 위사들이 일시에 주저앉았다.

버티고 서 있는 건 대영반뿐이었다.

“시끄럽고. 난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으니 회포를 풀어야겠어.”

동의나 허락을 구하는 말투가 아니다.

마른 비는 일방적인 통보만 남긴 채 뒤돌았다.

“네 말대로 난 한족이 아니야. 금의위의 이름 따위 내겐 무의미한 거 알지?”

막을 생각이면 덤비라는 뜻이었다.

대영반은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 뿐, 움직이지 못했다.

“뭐 해, 다들? 나와! 별비가 고기 썰어놨어. 밥 먹으러 가자.”

등장만으로 금의위 전체를 침묵시켰을 뿐 아니라, 대영반을 동네 개 보듯 한다.

심지어 밥까지 미리 준비해 놨단다.

“크으…! 크으으……! 역시 최고!!”

육강패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과장되게 양손 엄지를 추켜세웠다.

전룡도 피식 웃더니 엄지를 내밀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친구의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가봐야겠군요. 대영반 나리, 그럼 다음 기회에….”

비밀에 쌓인 대영반의 얼굴과 무공 수위를 확인했다.

그리고 금의위의 칼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알게 됐다.

얻을 것을 모두 얻은 백강은 만족스러웠다.

“이, 이…!”

권력과 금력, 무력까지 동원하고도 백강을 놓친 대영반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햇살을 받으며 멀어지는 네 명의 사내와 영수 한 마리를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혼세록 금의위 회담 편

「최고존엄 남제 마란 바 마른 비」

삭월 월검대주 육강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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