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39화 (439/463)

439화

쏴아아아―!

비가 내린다.

대지에 스민 피가 옅어지고, 벌겋게 물든 숲이 본래의 색을 찾았다.

덧없이 스러진 생명들이 안타까운 걸까?

하늘은 멈출 줄 모르고 눈물을 쏟아냈다.

피가 쓸려나간 자리.

풍경을 메운 건 찢기고 부서진 시체들이었다.

“음…….”

은색에 가까운 백발을 말끔하게 빗어 넘긴 사내였다.

가슴까지 기른 수염과, 구김을 찾아볼 수 없는 무복.

왼쪽 가슴에 새겨진 하늘 천 자(天)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빗방울 하나 들지 않을 만큼 커다란 우산이 사내를 따라 움직였다.

우산을 든 여인을 포함하여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비들이 뒤를 따르니, 사내의 행보는 마치 천자의 나들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고약한 곳이로군.”

사내가 턱에서부터 수염을 쓸어내렸다.

수염도 머리칼처럼 은색이었는데,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사십 중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나이가 많다는 것.

자세히 보면 눈가와 입가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목소리 또한 노인의 그것이니, 지고한 공력으로 육신의 노화를 억누른 게 분명했다.

“중원과는 모든 게 다르구나. 이런 지형이라면 애를 먹을 수밖에 없겠어.”

천검 운종학.

정파의 하늘이라는 남자가 운남에 들어서자마자 내놓은 평이었다.

“네, 맹주님. 대기에 가득한 기운이 생물의 생장을 돕는 것이겠지요. 동식물이 규격 외로 거대한 이유를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삼십 중반.

가슴에 붉은 봉황의 문양을 단 여인이었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경장 무복도 특이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건 왼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다는 점이다.

여인에게는 아니, 무인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일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수백 명이 운집한 행렬 속에서도 발군의 존재감을 뽐냈다.

정도맹 주작대주(朱雀隊主) 유인화.

뛰어난 두뇌와 단창을 다루는 솜씨로 맹주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여걸이었다.

“그렇구나. 이처럼 태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있다니. 참으로 아름다워. 진작 내려와 볼 걸 그랬군.”

사방에 널린 시체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운종학은 숲을 넓게 둘러보더니 유인화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당사자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은근한 눈빛.

날카롭게 주변을 살피던 유인화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완전히 정리됐습니다, 맹주님.”

운종학이 유인화와 시비들에게 둘러싸여 경치 구경이나 할 때, 그가 나아갈 길을 뚫기 위해 분주한 자도 있었다.

거북과 뱀이 뭉친 짐승의 문양.

정도맹 현무대주(玄武隊主) 정청이 보고를 올렸다.

“역시 빠르군. 사파의 잡졸들이 육백 명은 모여 있었건만. 고생했네, 현무대주.”

정청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깨에 짊어진 흑색의 대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탁월한 궁술과 더불어 그를 중화십궁(中華十弓)의 자리에 올려놓은 현무주천궁(玄武周天弓)이었다.

운종학은 정청의 충직한 얼굴을 흐뭇하게 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눈에 거슬리는 게 있구나. 저걸 저대로 놔둘 건가?”

“……?”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흠칫하는 것도 잠시, 정청은 번개처럼 뒤돌며 현무주천궁의 시위를 당겼다.

콰아아앙―!

포탄이 작렬한 듯한 음향이 터졌다.

산산조각 난 비석의 파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놀라운 건 정청이 화살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공을 가다듬어 쏘아내는 시강(矢罡).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명궁의 솜씨는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 이제 좀 깨끗하군.”

운종학이 흡족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우산을 받치고 있던 시비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비석이 있던 자리에 다다른 운종학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출입자사라……. 참으로 광오하구나. 자, 이제 수왕이란 자의 대응을 보도록 할까?”

운종학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치는 건 누구도 보지 못했다.

“맹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오만방자한 녀석이지요!”

“맞습니다! 들어서면 죽는다니, 이 넓은 땅이 다 제 것인 양 구는데…!”

“맹주께서 직접 오셨으니 금광이 정파의 손에 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마른 비의 경고 때문에 비석 앞에 멈춰 있던 자들이 환호했다.

사파가 꼴 보기 싫어도 칼을 뽑지 못했던 그들과 달리, 정도맹은 도착하자마자 육백 명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석을 부쉈다.

현무대의 힘을 목격한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정도맹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절검문(切劍門)과 형산파(衡山派), 신가장에 정의문(正義門)까지…! 중견 문파들도 맹주님을 따라왔구나!”

“구파와 오대세가는? 그들은 오지 않았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

“에잉!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상황이 변했잖아! 야만인들에게 사천이 무너지고, 사파 놈들이 금광을 노리는데!”

정파의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맹주를 따라 운남의 경계를 넘으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누구도 와족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자는 없었다.

지금까지 철수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자명했다.

정도맹과 중견 문파들, 여기로 오는 중에 합류한 자들과 비석 앞에 죽치고 있던 무인들까지.

이날, 마른 비의 경고를 무시하고 경계를 넘은 정파인의 숫자는 자그마치 천오백 명에 육박했다.

* * *

어둠이 내린 운남의 밤.

풍성히 드리운 활엽수 밑에는 수십 개의 천막과, 노숙하는 수백 명의 인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위치한 대형 천막에서 숨죽인 비음이 터져 나왔다.

“하악, 학! 하아…!”

열락에 들뜬 여인의 목소리.

그건 막사를 두드리는 빗소리와 어우러지며 묘한 흥분을 선사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차단하는 건 운종학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는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나신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 아아…!”

정신없이 뒤엉키길 반 시진.

여인은 절정에 이른 듯 몸을 떨었다.

그리고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녀는 운종학의 탄탄한 가슴에 기댄 채 속삭였다.

“바깥에 수백 명이 있는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의미 없는 말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부름에 응하지도 않았겠지.

운종학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에 걸리는 안대의 촉감을 느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도 모를 테니.”

유인화는 하나뿐인 눈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맹주님과 제가 이런 관계라는 걸 알면 난리가 날 텐데.”

“난리라니? 누가 감히 내게 뭐라 할 수 있단 말이냐? 기껏해야 뒤에 숨어서 흉이나 보겠지.”

“그래도요. 정도맹의 맹주가, 심지어 손주도 있는 사람이 딸뻘의 대주와 내연관계라는 게 알려지면 치명적이지 않아요?”

운종학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누가 무얼 할 수 있지? 힘과 권력. 어떤 것도 날 능가할 자는 없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더욱 그렇지. 금광을 손에 넣는 순간, 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야.”

정도맹을 실질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건 기부금이다.

자체적인 사업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기에 정도 문파들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중 칠 할에 달하는 자금이 구파와 오대세가로부터 나온다.

정파의 하늘이라 불리지만, 운종학이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였다.

‘빛 좋은 개살구. 권력과 무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체적인 금력까지 확보해야 진정한 패자가 될 수 있느니.’

운종학이 금광에 매달리는 까닭이었다.

원래라면 이토록 많은 병력을 끌고 오진 못했을 것이다.

한데 기가 막힌 시점에 련주가 부상을 입었다.

마맹산과 초패가 쓰러졌고, 그로 인해 녹림과 수로맹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건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금광을 안겨주려는 것 같지 않은가.

운종학이 장밋빛 미래를 그릴 때, 유인화의 목소리가 그의 상상을 깨뜨렸다.

“분명 그렇게 될 거예요. 다만, 사도칠문이 걸리네요. 귀주 방향으로 진입했다고 했죠? 그들이 우리보다 빠를 텐데….”

운종학은 염려 말라는 듯 유인화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창룡대주가 수백 명의 지휘권을 쥐었다지 않느냐? 그는 대단히 뛰어나다. 창룡검대와 백호대면 충분해. 제아무리 귀왕문주라도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그들을 몰아내진 못할 것이다.”

개방을 포위했던 백호대는 운종학의 지시로 한발 먼저 운남으로 떠났다.

그들은 지금쯤 금광을 향해 남하하고 있을 것이다.

운종학은 금광 앞에 모인 병력과 창룡검대, 그리고 백호대면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왜, 정인(情人)이 걱정되느냐?”

운종학의 물음에 유인화가 눈을 흘겼다.

“둘만 있을 때 그런 이야기는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운종학이 가정이 있듯 유인화 또한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

바로 창룡검대의 대주 혁운상이었다.

이 관계가 알려지면 난처해지는 건 운종학만이 아닌 것이다.

“골치 아픈 소린 그만하고, 안아주세요. 모처럼의 시간을 제대로 즐길….”

“맹주님…!!”

“헛?!”

난데없는 외침에 두 사람이 기겁했다.

유인화는 황급히 옷을 입으며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각도에 몸을 숨겼다.

운종학은 들어오지 말라고 명을 내린 뒤 옷가지를 챙기며 물었다.

“이 야밤에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이어진 보고에 운종학과 유인화는 넋을 놓았다.

* * *

적진의 건너편이 소란스럽다.

횃불이 켜지고, 잠들었던 자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놓친 놈들이 도착했구나…!’

마른 비는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러곤 눈을 가늘게 뜨며 중앙에 위치한 대형 막사를 바라봤다.

누군가가 달려 들어가고, 곧이어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이 흘러나오는 걸 확인했다.

‘예상보다 빨라!’

장오의 계획을 듣자마자 북쪽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여기로 오는 내내 눈에 띄는 놈들을 전부 죽였다.

그들은 영묘에서 도망친 패잔병이었고, 못해도 백이 넘는 숫자를 처리했다.

하지만 당연히 놓친 놈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보고가 들어갔어.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지면 좋았을 텐데.’

반 시진 전, 숙영 중인 정파인들을 발견했다.

마른 비는 곧장 은신을 펼치며 적진에 침투했다.

익숙한 지형, 그리고 비와 어둠.

외곽을 지키는 경계병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가슴이 꿰뚫렸다.

‘창룡검대가 전멸했단 걸 알게 됐으니 이제 전속력으로 남하할 거야.’

시간이 좀 더 주어졌다면 편하게 숫자를 줄였으리라.

하지만 적들이 깨어난 이상 이제는 속도전이다.

시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른 비가 은신을 풀고 뛰쳐나왔다.

“합!”

빗방울을 튕겨버리는 권격.

이제 막 눈을 뜬 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휩쓸렸다.

뻐억! 빠각! 우드드득―!

마른 비는 질풍처럼 내달리며 팔다리를 내뻗었다.

피가 튀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고요하던 밤을 뒤흔들었다.

“뭐, 뭐냐?!”

“적습…? 컥!”

불을 켤 겨를도 없었다.

수십 명이 꿈나라에서 현실로 돌아오다 말고 저승으로 직행했다.

마른 비가 모습을 드러내자, 별비도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커허허헝!”

새하얀 빛줄기가 지나치자, 인간의 몸이 조각나서 나뒹굴었다.

검을 입에 문 별비는 전속력으로 적진을 누비며 닥치는 대로 베어 넘겼다.

“백호…!”

“수, 수왕! 수왕의 습격이다!”

“맙소사! 어떻게 여기에?!”

마른 비가 비석을 꽂는 걸 목격한 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공포는 빠르게 전염됐고, 생명이 꺼지는 속도는 그보다도 빨랐다.

“뭣들 하고 있나! 횃불을 올렷!”

“당황하지 마라! 둘 뿐이다! 침착하게 대응해! 놈은 절대로 우릴 이길 수 없어!”

정예들이 나서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여기저기서 횃불이 켜지고,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살기가 일어났다.

적들의 눈길이 마른 비에게 쏟아지는 순간!

후우욱―!

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광포하게 날뛰던 별비도 삽시간에 모습을 감췄다.

반격에 나서려던 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은신이다! 수왕은 살수비기에도 능하다고 했어! 기감을 끌어올려서 위치를 찾앗…!”

감각의 그물이 일대를 뒤덮었다.

하지만 마른 비와 별비의 은신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잡아낼 수준이 아니었으니….

우드득!

남서쪽 십 장 거리에 서 있던 자의 목뼈가 부러졌다.

부아악―!

동쪽으로 스무 걸음.

여섯 명의 무인이 맹수의 발톱에 찢겨서 절명했다.

퍼억! 으지직! 푸화악―!

“잡을 수가 없어! 공격하자마자 사라진다!”

“어, 어떻게 이런…!”

횃불이 켜졌고, 수백 명이 지켜보고 있는데 왜 위치를 잡을 수 없단 말이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암습은 눈으로 쫓기도 힘들 정도였다.

은신 중에 이런 기동이 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러나라! 너희가 잡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급기야 각파의 수장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기감을 퍼뜨릴 때, 울음 섞인 비명이 들렸다.

“죽여 버리겠다, 수왕! 그이, 그이를…!”

비보를 전해 들은 유인화였다.

방금 전까지 맹주와 밀회를 즐기던 그는 연인의 죽음을 듣고는 통곡했다.

그러곤 단창을 든 채 마른 비를 잡으러 나온 거였다.

빗방울마저 사를 듯한 살기.

범인(凡人)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심리 구조였다.

『여기까지. 별비야, 빠져.』

위험을 감지한 마른 비가 후퇴를 지시했다.

전격적인 기습으로 적진을 휘저은 둘은 들어올 때보다 빠르게 빠져나갔다.

“수풀에 인접한 나무 위!”

“덤불이다! 이, 이런 벌써 바위 뒤로…!”

“쫓아! 절대 놓치지 마라!”

차라리 수장들만 있는 게 나을 뻔했다.

그들은 인파에 치여서 위치를 감지하고도 따라붙지 못했다.

마른 비와 별비가 그들의 탐지 범위에서 벗어나는 순간!

후우욱―!

지금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이 사위를 뒤덮었다.

파라라락―!

동, 서, 남, 북.

노란 바탕에 붉은 문양이 새겨진 종이가 하늘을 날았다.

네 방위를 점하며 날아간 그것은 마른 비의 머리 위에 이르러 신묘한 기운을 뿜었다.

“……!”

마른 비가 흠칫하며 멈췄다.

우왕좌왕하던 자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당황하지 마시게. 노부가 그대들의 눈이 되어줄 것이니.”

양손을 합장하듯 맞댄 노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