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
마른 비는 당황하고 말았다.
성년식 때 터득한 일체화는 힘이 강해질수록 끊임없이 발전했다.
빠른 기동을 위해 은신의 경지를 낮췄을 뿐, 작심하고 숨는다면 적진 한복판에서도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기감이 예민한 소수의 고수들만 조심하면 말이다.
그런데…….
‘발각됐어…!’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는 네 장의 종이.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진 그것들은 독특한 기운을 내뿜었다.
적에게 들킨 건 분명 저것들 때문이었다.
‘기운을… 밀어내고 있어?’
종이들은 서로 연계하며 힘의 순환과 증폭을 거듭했다.
그러면서 자연물이 흘리는 기운뿐만 아니라 대기에 함유된 자연기까지 밖으로 밀어냈다.
결국 남은 건 자체적으로 기운을 다스리는 존재뿐.
범위 안에 든 생물체의 위치를 낱낱이 까발리는 술수였다.
“저, 저것…! 탐지부(探知符)다!”
‘탐지부라고?’
정파인들의 탄성을 들으며, 마른 비는 오래전 여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 떠 있는 종이의 정체를 알아챘다.
‘부적…!’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도구.
붉은색의 글씨나 그림이 그려진 종이는 초현실적인 힘을 구현하기 위한 매개체라 했다.
민간에서도 널리 쓰이지만, 정파의 괴짜 문파 하나가 부적술(符籍術)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무공과는 전혀 다른 힘을 전투에 접목했고, 천하에 이름을 날리기에 이르렀다.
‘술력…! 저 노인, 모산파(茅山派)의 도사구나!’
독보적인 술법으로 정도맹의 한자리를 차지한 문파.
부적술을 펼친 노인은 모산파의 장문인 융중진인이었다.
도가에 뿌리를 두고 있어 진인이라 불리지만, 그는 무당, 청성의 장문인보다 훨씬 세속적이다.
융중진인은 자파의 비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그런 성향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모산파는 운종학이 와족을 잡기 위해 준비한 비밀 병기였다.
“뭣들 하는가? 설마 탐지부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보고만 있는 건 아니겠지?”
융중진인이 아군을 독촉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부적에 불이 붙은 것처럼 아래에서부터 사그라들고 있었다.
‘시간제한이 있는 모양인데….’
그동안 적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마른 비는 자연기를 끌어올려서 일체화의 경지를 더욱 높였다.
‘……!’
마른 비는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공과는 궤가 다른 힘, 술력.
전력으로 은신을 펼쳐도 도화지에 뿌려진 먹처럼 위치가 드러난다.
적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흐흐! 야수의 왕이란 놈이 숨바꼭질하는 어린애처럼 웅크리고 있구나!”
“뻔히 보인다! 진인이 계시면 은신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
“쳐라! 동료들의 복수를 갚는 거다!”
의기양양해진 적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들은 마른 비의 당황한 표정을 즐겼고, 다 잡은 것처럼 굴었다.
마른 비는 그게 어이가 없었다.
“니들,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은신을 파훼하면 끝인가?
위치가 드러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선을 넘으며 쌓아올린 힘.
무림 역사상 최연소로 왕의 칭호를 획득한 무력은 건재했다.
“저 멍청한 놈들이…!”
“물러나라! 무작정 달려든다고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냐!”
수장들이 비명을 질렀으나, 너무 늦었다.
“전부 죽어.”
근거리 백병전.
전선을 허무는 데는 이만한 기술이 없다.
등판이 돌아가자, 선대 전사들 중 강렬한 힘으로 전장을 누볐던 남자의 기예가 작렬했다.
푸콰아앙―!
보고도 막을 수 없는 힘.
천둥바위는 수십 명이 밀집한 전선을 통째로 갈아엎었다.
탓!
경쾌한 도약음이 후속타를 알렸다.
이번엔 속도로 이름을 떨쳤던 남자의 기술이다.
저공에서 펼친 수평 소낙비가 주제를 모르는 생쥐들의 육신을 저몄다.
“크아악!”
“마, 막을 수가…!”
“물러나라! 진형을 짜고 덤벼!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물러나?
누구 마음대로 물러난단 말이냐.
마른 비는 발을 거둬들이는 즉시 몸을 뉘었고, 곧게 뻗은 손에 자연기를 응집했다.
우우웅―!
중원을 여행하며 깨달은 건 와족의 기예에는 가르기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른 비는 하늘을 두 쪽 낼 듯 떨어져 내리던 궁극의 참격을 경험했다.
스팟―!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마른 비가 수도(手刀)를 휘두르자,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숲이 잘리고, 낙하하던 빗방울이 쪼개졌다.
침 한 번 삼킬 시간이 흐른 뒤, 적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깔끔하게 분리됐다.
“후우우…….”
패문강의 비기, 참마(斬魔).
그것을 모방한 횡참.
마른 비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던 적들 중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푸화아아악―!
중력을 거스르며 솟구치는 피 분수가 빗줄기를 집어삼켰다.
어둠을 배경으로 몸을 세우는 마른 비는 명부(冥府)에서 내려온 사신처럼 보였다.
“이, 이이…!”
수왕, 수왕, 말로는 들었다.
여기 있는 자들 중 상당수는 북벌에서 그의 위용을 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이 아니었어…. 그때 이자는 우리 편이었다…!’
원의 기마대를 파죽지세로 돌파하는 모습에서 경외심을 느꼈다.
수십 년간 무적이라고 불렸던 초원의 악몽, 바투와 무칼리.
그들이 쓰러졌을 때,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며 환호했다.
허나 그건 두려움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같은 편이기 때문에.
저 무지막지한 체술이 자신을 향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비, 빌어먹을…!”
뒤늦게 몸이 떨려온다.
어쩌자고 이런 자를 적으로 돌린 걸까.
숨 몇 번 들이켤 사이에 백 명이 쓰러지자, 정파인들은 그제야 자신이 누구를 잡겠다고 설친 건지를 깨달았다.
“잠깐만! 나, 나는…!”
앞에 있던 동료들이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전멸했다.
그 결과 마른 비를 코앞에서 마주한 자가 하얗게 질렸다.
그가 뒷걸음질 치며 중얼거렸다.
“안 돼.”
마른 비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머리를 날려버렸다.
뭐라고 할지는 뻔했으니까.
“히이익!”
“사, 살려…!”
일격도 받아내는 자가 없었다.
여기까지 내려올 정도면 나름대로 무공에 자신이 있는 놈들일 텐데,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다.
성년식을 마친 지 사 년.
중원의 절반을 횡단하고 돌아온 마른 비는 천하를 논할 만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푸화아아악―!
허나 세상은 넓고, 영광된 무(武)의 길을 걸어온 건 그만이 아니었으니.
수십 년은 앞서 이름을 날렸던 남자가 진신전력을 개방했다.
“드디어 보는구나. 네가 수왕인가?”
태산도 밀어낼 철벽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듯하다.
농밀한 기파가 대기를 짓누르니, 일대가 그의 색으로 물들어버렸다.
천검(天劍).
하늘에 닿을 무력으로 천하를 양분한 남자가 새 시대의 물결을 가로막았다.
‘저자가… 맹주!’
강하다.
놀라울 만큼.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오한이 들고,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선다.
휘몰아치는 투기에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숱한 사선을 넘어온 감각이 맹렬한 경고를 보냈다.
저자는 진실로 위험하다고.
마른 비는 순간 운종학에게서 발톱을 드러낸 용의 환상을 보았다.
“왜 말이 없지?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처럼 내 앞에서도 떠들어 보거라.”
운종학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눈치챈 것이다.
마른 비의 상태를.
자신의 기세가 상대를 압도했음을.
그가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릴 때였다.
마른 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분명 엄청나게 강해. 하지만…!’
그뿐이다.
아버지와 대련할 때는 도무지 이길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패문강과 싸울 때는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압박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전룡과는 붙어보지 않았지만, 그가 싸우는 걸 봤다.
그에게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초원의 혼, 오스트갈.
그는 또 어땠나.
기마에 올라타 참마도를 휘두르는 걸 보고 있노라면 전신(戰神)이란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함이 있었다.
인간으로서 타고난 기질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없어. 맹주에게선 그런 특별함이 보이지 않아. 그냥 강할 뿐.’
그걸 인식한 순간, 마른 비는 평정을 되찾았다.
감당할 수 없는 용처럼 비쳐졌던 사내가 승천에 실패한 이무기로 보였다.
물론 만만치 않겠지만, 자신이 누군가.
전설 속의 생물이 아닌 이무기 따위는 야수의 왕을 당할 수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른 비는 팽팽하게 긴장했던 몸을 이완시킬 수 있었다.
‘이놈이?’
맹주가 그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마른 비가 자신이 발산한 무형의 압력을 떨쳐냈다는 걸 깨달았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그건 맹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십좌라고 싸잡아 부를 뿐, 상위의 세 명과 그 외의 무인들 사이엔 엄연한 격차가 존재한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는지 운종학은 묻지도 않은 걸 주절대기 시작했다.
“나와 패군, 그리고 협검. 뭘 모르는 것들이 협검이 천하제일이었느니 어쩌니 떠들지만, 그는 황성 침공 때문에 우상시됐을 뿐.”
운종학이 혼자서 떠들 때, 마른 비가 깜빡했다는 얼굴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아…! 그 아저씨가 있었네! 맞아, 정말 대단했어. 흐음….”
마른 비는 운종학을 위아래로 훑더니 툭 내뱉었다.
“당신은 악 아저씨 절대 못 이겨. 너무 평범하거든.”
운종학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평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항상 누구보다 뛰어났고, 언제나 최고였다.
그런 자신에게 평범이라니?
운종학을 더욱 미치게 만드는 건 군중의 수군거림이었다.
“격장지계다! 저놈이 맹주님의 평정심을 흔들려고 수를 쓰는 거야!”
“가만있어 봐! 항상 궁금했잖아. 셋 중에 누가 제일 센지. 역시 악 대협이 맹주님보다 강했던 건가?”
“수왕도 십좌급의 강자인데, 직접 보고 비교하는 거라면 믿을 만하지 않겠어?”
“그럼 패군은? 패군과는 어떻게 되는 거야?”
운종학은 체면이고 뭐고 닥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악경의 위상 때문이다.
그는 정파의 표상이자, 민족의 영웅이다.
심지어 황성으로 쳐들어갔다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가 돼버렸다.
그래서 운종학은 머리가 터질 듯한 분노를 전부 마른 비에게 쏟았다.
“……격의 차이를 보여주리라. 너는 오늘 그 평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야.”
운종학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둠에 잠긴 숲속에서 들불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단창을 장비한 이백 명의 무인들.
운종학이 마른 비의 시선을 붙드는 동안 숲을 우회한 주작대였다.
“이런…!”
파라라락―!
마른 비가 고개를 돌릴 때, 부적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육중한 압력이 어깨를 짓눌렀다.
쿠우웅!
중압부(重壓符).
특정 대상에게 압력을 가해 묶어두는 술법이다.
융중진인의 부적술이 발동됨과 동시에 강맹한 파공음이 들렸다.
쾌애애액―!
나선으로 회전하며 쇄도하는 화살.
현무대주 정청이 쏜 나선시(螺線矢)가 마른 비를 노렸다.
『까불지 마!』
술법이라는 걸 알았는데 또 당할쏘냐.
자연기를 실은 언령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야수 제어는 술법을 상쇄하는 걸로도 모자라 부적들을 짓이겨버렸다.
중압부를 파훼한 마른 비가 방어를 준비할 때였다.
“커허헝!”
별비가 훌쩍 뛰어올라 화살을 후려쳤다.
녀석의 앞발은 정청이 준비한 회심의 일격을 어렵지 않게 분질러 버렸다.
어지간한 수로는 마른 비를 잡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 짐승을 떼어놔라! 내 오늘 저놈에게 천하가 넓다는 걸 알려주리라!”
협검과의 비교는 차치하더라도, 창룡검대의 전멸은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그로 인해 앞으로의 계획이 틀어져 버렸으니까.
여러모로 운종학은 마른 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각파의 수장들이여! 병력을 우회시켜 포위를 굳히시게! 내 직접 저놈을 상대할 것이야!”
운종학이 마른 비를 향해 다가갈 때였다.
후방에서 변수가 일었다.
제자리를 지킨 채 증원 병력이 오기를 기다려야 할 주작대가 마른 비에게 달려든 것이다.
“돌격하랏! 저 야만인 놈을 죽여버려!”
병력을 움직인 건 유인화였다.
그녀는 마른 비의 등을 잡았고, 벌게진 눈으로 날아올랐다.
대주가 달려들자 주작대도 가만있지 못하고 뒤를 따랐다.
“뭐야? 왜 이렇게 흥분을 해? 가까운 사람이라도 죽었어? 일을 쉽게 만들어주네?”
돌입할 때 퇴로를 확보하지 않았을 리 없다.
마른 비는 본인에겐 쉽지만, 적들이 따라붙기 힘들 만한 길을 몇 개 봐두었고, 그리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와주면….
“나야 고맙지.”
마른 비는 즉각적으로 기동했다.
여기서 계속 싸우는 건 자살 행위였고, 식구들이 사도련을 막고 부상을 회복할 동안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러려면….
『계획대로 가자! 포위를 뚫는 즉시 ‘거기’로 달려, 별비야!』
충분히 약을 올렸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쯤 되면 적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으리라.
운종학이 나서고, 자신이 도망치려는 조짐을 보이자 겁먹었던 조무래기들도 사기를 되찾고 있었다.
“비켜!”
백열갑과 앞발이 교차하는 순간, 유인화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