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아악…!”
‘어?!’
마른 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정하고 내친 한 수가 적의 숨통을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급하게 휘둘렀다고는 해도 무려 별비와의 합공이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리라.
한데 단창을 든 여인은 별비의 앞발을 흘리는 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주먹까지 받아냈다.
심지어 그녀는 뒤로 날아가며 반격을 쏟아냈다.
“망할 자식! 죽어!”
주홍빛 창강(槍罡)이 시야를 뒤덮었다.
주작연환창(朱雀連環槍).
유인화를 주작대주에 올려놓은 절기였다.
여규의 찌르기를 방불케 하는 창격 앞에서, 마른 비는 움찔했다.
하지만 곧바로 따라붙으며 두 주먹을 뻗었다.
“비키랬지!”
권막(拳膜).
백열갑이 그물 같은 환영을 그렸다.
눈치로 보건대 여인은 적의 수장 중 한 명이 틀림없었고, 그녀를 뚫어야만 길이 열린다.
권막이 펼쳐지자, 수십 자루의 연환창이 모조리 가로막혔다.
마른 비는 창날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왼손 엄지를 튕겼다.
티이잉―!
“……!”
창이 하늘로 튕겨 나가고, 가슴이 활짝 열렸다.
기를 써도 단창을 든 오른손을 되돌릴 수 없다.
품으로 파고드는 마른 비를 보며, 유인화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쾌액! 쐐액―! 패애애액!
그때, 공기를 찢는 소리가 마른 비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철제 화살 세 자루가 유인화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어? 같은 편을?!’
마른 비의 눈이 커지는 순간!
슈아아악―!
화살들이 절묘한 각도로 휘어지며 그녀의 몸을 우회했다.
유인화를 방패 삼아 화살의 궤적을 숨기는 한 수.
신기라는 말로도 모자란 곡사(曲射)였다.
“흡…!”
예상치 못한 기습에 마른 비가 헛바람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내친 올빼미 사냥으로 화살 두 대를 분지르고, 놓친 한 대는 고개를 기울여 피했다.
슈팟―!
오른쪽 뺨을 스치고 지나간 화살이 얼굴에 혈선을 그어 놨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한 수.
저 멀리 흑색의 대궁을 든 사내가 시위를 당기는 게 보였다.
“주작대주! 물러나시오! 혼자서는 못 당하오!”
충직한 인상의 사내였다.
현무대주 정청이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외쳤다.
“현무대! 활을 들어라! 주작대주를 엄호한다!”
정청의 대궁이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그는 마른 비를 노려보며 외쳤다.
“일점사(一點射)! 놈의 심장을 꿰뚫어라!”
콰우우웅―!
정청이 시위를 놓자, 흑색의 철시가 무지막지한 파공음을 흘리며 쏘아졌다.
일격에 모든 걸 쏟아붓는 강사(强射).
현무나선관시(玄武螺旋貫矢)는 정청 필생의 깨달음이 담긴 절기였다.
투투투퉁―!
사방을 포위한 현무대가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이백 대의 철시(鐵矢)가 움치고 뛸 공간을 막으며 날아들었다.
“이런…! 별비야!”
마른 비와 별비가 한곳에 뭉쳤다.
그리고 방어에 나서려 할 때였다.
기회를 엿보던 노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걸렸구나! 중압부, 제2파! 발동하라!”
융중진인이었다.
그의 호령에 맞춰 모산파 도사들이 부적을 날렸다.
사십 장의 부적이 허공을 부유하고,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운이 둘의 어깨를 짓눌렀다.
“커헝…!”
“큭! 이놈들이…!”
원거리 저격에 퇴로를 제한하는 화살.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발동된 술법.
거리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른 비에게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이토록 기막히게 앞뒤가 들어맞으려면 즉흥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무대와 모산파는 운남에 내려오기 전부터 마른 비를 잡기 위해 손을 맞춘 게 분명했다.
“망할 새끼! 거기서 그대로 죽어버려!”
유인화가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발목이 잡힌 건 저 여자 때문이다.
마른 비는 광분하여 날뛰는 유인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별비야! 네가 걷어내! 할 수 있지?”
마른 비가 별비를 돌아보며 외쳤다.
술력과 화살 세례.
이걸 홀로 파훼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른 비는 뇌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뒤,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오오오오!』
전투함성이 어둠에 잠긴 숲을 뒤흔들었다.
마른 비의 언령이 솟구치며 술력을 하늘로 밀어 올렸다.
“큭!”
“허억…!”
사십 명의 모산파 도사들이 휘청거리며 이를 깨물었다.
중압부의 압인기(壓人氣)가 거꾸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막대한 힘이 충돌하며 일시적인 진공 상태를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쏟아지다가 허공에서 멈췄다.
그것들은 거꾸로 상승하더니, 찌부러지고 잘게 쪼개졌다.
위에서 덮쳐오던 화살들도 더 이상 하강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다가 가루가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밀리지 마라! 술력을 끌어올려!”
“일시적인 저항일 뿐이다! 힘을 응집해서 내리눌러라!”
모산파 도사들이 고함을 지를 때, 마른 비도 외쳤다.
“오래 못 버텨! 화살을 걷어내! 별비야!”
〔맡겨둬라!〕
별비는 자신의 몸으로 마른 비를 호위하듯 감쌌다.
그러곤 앞발과 뒷발을 폭풍처럼 휘둘렀다.
쩡! 쩌저저정! 치칭―!
쳐내고, 흘리며, 걷어낸다.
별비는 진공 상태가 된 상공을 제외하고, 그 외의 방향에서 날아온 화살을 모조리 쳐냈다.
범이 발을 놀려서 화살을 받아내는 광경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쾌애애액―!
마침내 가장 위협적인 공격이 다가왔을 때!
“커허헝!”
별비는 힘차게 포효하며 입에 문 검을 수직으로 그어 올렸다.
그그그극―!
왕문의 검과 철시가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별비는 검을 문 턱에 자연기를 집중했고, 밀리지 않기 위해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투두둑.
별비의 목에서 힘줄이 터질 것처럼 불거진 순간!
촤아악!
화살이 둘로 잘렸다.
중화십궁의 전력이 담긴 철시를 정면에서 받아낸 것이다.
그건 지켜보던 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장 기가 막힌 건 정청이었다.
수왕도 아니고 애완동물(?)에게 현무나선관시가 가로막히다니.
필살을 자신했던 무공이라 허탈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어우 씨. 목 뻐근해. 내일 담 오겠네.〕
별비가 목을 좌우로 돌릴 때, 마른 비가 외쳤다.
“이익…! 야! 너 빨리 안 도울래?!”
전문분야도 아닌 술력 싸움에서 이만큼 버틴 게 용할 따름이다.
마른 비는 커다란 바위를 받치는 자세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별비는 ‘아하!’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목청을 가다듬었다.
〔커흠!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
한껏 공기를 빨아들인 별비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커허허헝!』
놀랍게도 별비의 포효는 와족의 언령을 닮아 있었다.
아니, 언령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른 비의 언령에 별비의 힘이 더해진 순간!
쩌저저적―!
대기를 짓누르던 모산파의 술력이 깨졌다.
빙판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을 휘돌던 부적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융중진인과 사십 명의 모산파 도사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린 것처럼 튕겨 나갔다.
“윽…!”
마른 비도 충격을 받은 듯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빠져나가자!〕
절호의 틈.
별비는 앞발로 마른 비를 끌어안더니 술력의 범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둘이 빠져나간 자리에 미처 해소하지 못한 중압부의 여력이 쏟아져 내렸다.
휘날리는 흙먼지 속에서, 마른 비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윽…. 머리 아파. 눈앞이 어질어질하네.”
뇌력을 남발한 결과였다.
그가 비척거리며 일어날 때,
〔조심해라!〕
별비가 마른 비를 끌어당겼다.
그가 있던 자리를 날카로운 검풍이 가르고 지나갔다.
“현무대와 모산파의 합공이 깨지다니…!”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날뛸 수 없을 것이야!”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적을 쓰러뜨린 것도, 포위를 뚫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쾌액! 슈악! 쐐애액―!
검환부터 검강, 도강, 창강과 권풍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절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하나같이 웅혼한 기운을 품은 그것들은 각파의 수장들이 발출한 기공이었다.
“칫…!”
마른 비는 가벼운 건 백열갑으로 튕겨내고, 묵직한 것들은 몸을 움직여 피했다.
쳐내고, 흘리며, 회피하는 동시에 구른다.
일대를 마비시키는 폭격에 지면이 움푹 파였지만, 마른 비에게 피해를 입힌 건 없었다.
“허! 그걸 다 피했단 말인가?!”
“강기를 구사하지 못하면 뒤로 빠져라! 쓸데없이 희생만 늘릴 뿐이야!”
“뒤로 돌아서 포위진을 구성해! 놈이 도망칠 틈을 철저히 차단하라!”
정파의 수장들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휘체계가 명확한 만큼 병력의 움직임도 군더더기가 없다.
혁운상의 경우처럼 한 명에게 지휘권이 쏠려 있다면 머리를 치면 된다.
하지만 이래서는 적을 흩어버릴 방법이 없었다.
‘난감한데….’
그들만으로도 버겁지만, 진짜 위험한 건 따로 있었다.
“도발을 일삼더니 고작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나? 수왕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쥐새끼로구나.”
천검 운종학.
일세의 검사가 살기를 뿜으며 다가왔다.
중견 문파의 수장들을 합친 것보다 운종학 하나가 더 큰 위협이었다.
“제가 묶어놓은 거예요. 놈의 목은 제가 벨 수 있게 해주세요.”
주작대주 유인화도 운종학의 옆에 따라붙었다.
두 사람의 뒤에서 모산파의 도사들이 술법을 준비하고, 현무대가 시위를 당기는 게 보였다.
“포기하고 얌전히 검을 받아라. 네가 살아날 구멍은 없으니.”
운종학이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이거… 진짜 위험해…!’
얼마 만에 느끼는 죽음의 감각인가.
마른 비는 등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럴수록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웃었다.
“다 잡은 것처럼 말하네? 내가 이런 위기를 한두 번 겪은 줄 알아?”
위험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마른 비에게는 아직 숨겨놓은 패가 있었다.
‘여기서 발동해야 하나?’
전투화장.
그거면 포위를 뚫는 건 어렵지 않다.
여긴 운남이니 전력으로 내달리면 적들을 뿌리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안 돼. 그러면 시간을 끌지 못해. 전투화장은 최후의 순간에 써야 돼.’
곧 노을이와 사도칠문이 맞붙을 거다.
식구들뿐이면 어렵겠지만, 점창이 주력 검대를 전부 하산시켰다고 했다.
그들의 매복과 기습이면 구 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정도맹이 그리로 가지 못하도록 하려면, 아군이 부상과 피로를 회복할 시간을 벌려면 최대한 끌고 다녀야 했다.
“허장성세로군. 네가 무슨 수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냐?”
운종학은 여유로웠다.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상황이며, 아군이 뒤로 돌아 포위망을 두텁게 짜는 중이다.
현무대와 모산파의 합공이 무너진 건 의외지만, 수왕이란 꼬마의 명성도 여기까지였다.
“내 직접 너를 무릎 꿇리리라. 그리고 너를 미끼로 야수족을 유인할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도발이다.
어차피 빠져나갈 수 없으니 일대일 승부를 피하지 말라는.
넌 무조건 내게 패할 것이라는.
허나 마른 비가 그의 뜻대로 움직여 줄 리 없었다.
“글쎄. 망상은 자유겠지.”
파지지직―!
광포한 뇌기가 발현되고, 수왕의 성명절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뢰창은 그의 적들에게 무한한 두려움을 선사했다.
“뇌기의 창…! 속성기를 다룬다는 게 사실이었군. 이제야 싸울 마음이 든 것이냐?”
허나, 운종학은 예외였다.
그의 눈에 떠오른 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물리적인 힘과 음파를 전면에 집중…!’
뢰창이 마른 비의 손을 떠났다.
현무대의 일점사보다도 강력한 투창이 운종학을 향해 날았다.
“쓸 만하구나. 십좌에 이름이 오르내릴 만해.”
스르릉―
검이 뽑혀 나오고, 검광이 공간을 절단했다.
수직으로 치솟는 참격.
운종학의 독문발검 용형절단세(龍形切斷勢)가 우렁찬 검음을 토했다.
추아악―!
“……!”
마른 비의 눈이 커졌다.
뢰창이 두 쪽으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기술을 완성한 이후 가로막힌 적은 있어도 이토록 철저하게 파훼된 건 처음이다.
감당할 수 없는 기의 충돌에, 주변에 있던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우르르릉― 콰콰쾅―!
운종학은 음파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육신에 둘러친 호신강기로 뢰창의 이차 피해를 완벽하게 차단한 것이다.
“보았느냐? 이것이 격의 차이다. 이게 전력이라면 실망스러운….”
협검과의 비교가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운종학은 틈만 나면 주절댔고, 마른 비는 그걸 계속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쫑알쫑알 시끄럽네. 또 받아봐.”
“……?”
뢰창이 일으킨 흙먼지가 걷히자, 하늘에서 하강 중인 별비가 보였다.
수평으로 기동한 마른 비와 별비가 만나는 순간,
번쩌어어억!
푸른 십자포화가 운종학을 덮쳤다.
“네놈이… 날 무시하는 것이냐! 어설픈 기공 따위 집어치우고, 장기인 백병전으로 덤벼라!”
일검에 쪼개서 힘의 차이를 각인시켜 주리라.
운종학이 다시금 검을 그어 올릴 때,
쾅―!
번갯불이 터졌다.
근거리 기동이라면 세상 어떤 절기에도 밀릴 생각이 없는 돌진기가 둘 사이의 간격을 지웠다.
“백병전? 싫은데? 난 도망칠 거거든.”
별비와의 합격기가 당도하기도 전이었다.
자신이 발출한 기공을 앞지른 마른 비가 백열갑을 뻗었다.
“울부짖어, 칼이빨.”
상대의 숨소리까지 느껴질 거리.
신병에 깃든 고대 야수의 기운이 맹렬한 울음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