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크아아앙!〕
운종학은 똑똑히 보았다.
아니, 느꼈다.
새하얀 권갑에서 새어 나오는 흉포한 기운을.
수왕의 두 주먹에서 무지막지한 기파가 번진다.
기운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을 잠식했고, 그를 집어삼킬 듯이 덮쳤다.
야생의 맹수에게서나 느낄 법한 맹목적 살의.
한 차원 앞선 시간으로 접어들며, 운종학은 검치호의 기운이 확산되는 걸 또렷이 지켜봤다.
“까불지 마라! 유물에 깃든 잔흔 따위로 나를 넘보는가!”
검의 궤도가 변경됐다.
수직으로 솟구치던 발검이 직각으로 꺾이며 마른 비를 향해 날아들었다.
허나 극속의 영역에 접어든 건 운종학만이 아니었으니.
‘보여!’
마른 비 역시 운종학의 검 놀림을 놓치지 않았다.
가로막는 걸 모조리 절단할 쾌검.
실제로 용형절단세는 검치호의 기운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마른 비가 오른 손바닥을 올려 쳤다.
흙 속에 파묻힌 것처럼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모산파의 중압부보다도 거센 압력이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최단의 투로로! 최대한 간결하게!’
대기의 결을 읽고, 정확히 올려 친다.
마른 비는 회피를 위해 자세를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치, 지, 지― 지, 징―!
시간이 뚝뚝 끊기는 것처럼 흘렀다.
운종학의 검이 백열갑의 손바닥 부분을 긁으며 지나쳤다.
서서히 위로 떠 오르는 검의 궤도.
마른 비는 방어가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후우욱―.
“……?!”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하늘로 떠오르던 검이 또 한번 꺾이며 궤도를 바꿨다.
마른 비의 움직임에 맞춰 운종학도 움직인 것이다.
“죽.어.라.”
귀로 들은 건 아니었다.
이미 둘의 속도는 음속을 넘어 있었으니까.
지그시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큭…!’
검날이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피부가 갈리는 과정이, 피가 뭉클뭉클 샘솟는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통증은 아직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마법(魔法)과도 같은 시간이 끝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이 들이닥칠 테니까.
‘조금만 더…! 지금 풀리면 안 돼!’
‘느린 시간의 영역’에 머무는 기간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허나 느낌상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튕겨져 나간다면, 검이 어깨를 가르고 있는데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그럼 끝장이야!’
속도가 곧 파괴력이기 때문이다.
적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검격을 허용하는 중에 낙오된다면, 모르긴 몰라도 팔 하나 날아가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마른 비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움직였다.
‘아래로…! 움직이란 말이야!’
거창한 방어도, 현란한 회피도 아니었다.
마른 비는 그냥 주저앉았다.
어깨를 가르는 검이 뽑히기를, 한계가 오기 전에 운종학의 검이 지나가기를…!
‘돼, 됐어…!’
검 끝이 어깨에서 떨어지는 걸 보며, 마른 비가 안도할 때였다.
『놓칠 것 같으냐?』
“……?!”
마른 비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운종학의 눈동자는 정확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전음이 아니야!’
뇌리로 꽂히는 의지.
와족의 언령과 비슷한 기예였다.
뇌력의 힘으로 발하는 언령과 달리, 막대한 내공을 기반으로 상단전을 경유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
불문의 혜광심어(慧光心語)와도 비슷한 그것은 극상승의 고수들만이 연성할 수 있는 기예였다.
검의 궤도를 변경하는 것부터 공방의 와중에 의지를 전하는 것까지, 운종학이 마른 비보다 이 영역에 익숙하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죽어라.』
뽑혀 나갔던 검 끝이 또다시 마른 비를 추격했다.
저걸 맞는다면 꿰뚫리는 걸 넘어 몸이 터져 나가리라.
운종학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를 때, 마른 비는 그를 보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 후방을 확인하고 대꾸했다.
『아니. 네가 죽어.』
휘아아악― 투콰아아앙―!
마법이 풀리고, 폭음이 터졌다.
눈이 시릴 정도의 빛과 함께 운종학이 피를 뿜으며 날아올랐다.
“으윽…! 됐어!”
마른 비가 어깨를 움켜쥐며 주저앉을 때까지, 운종학이 저 멀리 나가떨어질 때까지, 상황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정의문주(正義門主)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털썩!’ 하는 소리를 듣고 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 맹주님…!”
수왕과 백아가 십자(十) 모양의 강기를 뿜어내는 것까진 봤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수왕이 허를 찌르는 돌진을 감행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다음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냐? 누, 누구 본 사람이 있으면 설명을….”
다른 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십좌급의 고수, 또는 그에 한없이 근접한 자들이나 인지할 영역을 엿볼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정의문주보다 뛰어난 무인들, 예컨대 정도맹의 장로급 인사들과 정청, 유인화 정도가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후욱, 후우욱….”
마른 비는 어깨를 움켜쥐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전면을 노려봤다.
그의 숨소리가 울릴 때마다 정파인들의 심장이 철렁댔다.
“아악! 안 돼! 맹주니임…!!”
유인화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녀는 혁운상이 살해당했다는 걸 들었을 때보다 더욱 정신이 없어 보였다.
‘쓰러뜨렸나?’
마른 비는 어깨의 통증도 잊은 채 운종학이 날아간 방향을 주시했다.
원래는 가볍게 견제만 하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백열갑의 기운이 소진되더라도 자신에게 무리가 가는 건 아니니까.
한데 어쩌다 보니 생사결이나 다름없는 공방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눈속임으로 던져놓은 합격기가 구명줄이 될 줄이야.’
마른 비가 전투의 결과에 만족해할 때,
“이노오오옴!!”
정파 진영 한복판이 터져 나갔다.
거기엔 산발을 한 채 입에서 피를 흘리는 운종학이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감히 내게 이런 치욕을…!”
그는 자신의 기파 때문에 아군이 피해를 입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핏발 선 눈과 엉망이 된 몰골.
얼핏 보기엔 마른 비가 우위를 점한 듯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겉보기만 저럴 뿐이야. 멀쩡해.’
십자형 강기가 때맞춰 당도하는 걸 확인했을 뿐, 자신은 결과가 어떤지 보지 못했다.
한데 경미한 내상으로 끝났다는 건 그 짧은 사이에 또 한번 검로를 틀었다는 뜻이다.
즉, 별비와의 합격기마저 베어버린 거다.
운종학이 벌인 짓을 깨달은 순간, 마른 비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천검……. 그렇게 불릴 만해. 괴물이네.’
전사로서의 특별함이 없을 뿐 자신보다 강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격차는 생각보다 컸다.
전투화장을 발동한다 해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냐. 충분히 해볼 만해.’
꺾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 투지가 꺾이기에는 그간 축적한 전투 경험이 너무나 방대했다.
마른 비는 어깨의 근육을 조여서 출혈을 줄였다.
그러곤 일어섰다.
“이리 와라! 그 나이에 ‘찰나의 영역’에 진입한 건 놀랍다만, 격차는 뼈저리게 느꼈을 터! 내 반드시 너를 죽여 놓으리라!”
운종학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럴수록 마른 비의 눈은 점점 가늘어졌다.
‘알겠어.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모든 게 풍족한 상황에서, 타고난 재능으로 오직 수련에만 전념한 자.
무공이 완성될 때까지 위험을 무릅쓴 적도, 처절하게 바닥을 구른 경험도 없으리라.
그러니 색깔이 없는 거다.
세월이 흐르며 무수한 싸움을 거치고, 죽을 고비도 넘겼겠지만, 지금껏 보았던 강자들에 비하면 운종학은 너무나 평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강해졌다면 재능만은 최고일지도.’
만인을 내려다보는 오만함과 싸움 중에 치욕 운운하는 모습.
무인으로서의 특색이 없다는 점.
마른 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파악 끝났어.”
“……?”
운종학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마른 비가 먼저 입술을 뗐다.
“찰나의 영역? 당신들은 그렇게 부르나?”
적진 한복판에서, 마른 비는 여유 있게 어깨를 점검하며 말했다.
“내게 더 큰 상처를 입혀놓고도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알겠어. 내가 두려운 거야, 맞지?”
정파 진영에서 소란이 일었다.
웃기지 말라며 고함을 치는 자와 비웃는 자, 원색적인 욕설을 늘어놓는 사람까지.
하지만 당사자인 운종학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신은 말했어. ‘그 나이’에 찰나의 영역에 진입한 게 놀랍다고. 그건 당신은 그러지 못했단 말이야. 내 말이 틀려?”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파인들은 운종학이 부정하길 바랐지만, 그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시간. 내가 더 성장하는 게 두려운 거겠지. 그래서 명성에 맞지 않게 서두르고, 흥분하는 거야.”
“우, 웃기지 마라! 어린 나이에 이름 좀 날렸다고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너 정도의 인재는 천하에 널리고 널렸…!”
이름 모를 누군가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운종학의 제지에 그는 입을 닫고야 말았다.
“허허. 그래. 부정하지 않으마. 네 말이 맞다. 난 이립이 다 돼서야 찰나의 영역을 경험했지.”
“……?”
이건 의외다.
더 흥분하고 날뛸 줄 알았는데….
운종학의 눈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영역을 밟아봤단 말이다. 시간을 빠르게 돌리지 않는 한 네가 나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다.
운종학은 언제 평정을 잃었냐는 듯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았다.
‘칫! 역효과야…!’
회심의 도발이 도리어 운종학을 진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성장 배경이 어떻든 그가 쌓은 무공과 심력은 진짜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지금 죽일 생각이다. 네가 더 크기 전에. 금광을 손에 넣으려면 어차피 네놈을 없애야 할 터.”
이제는 금광을 노린다는 걸 숨기지도 않는다.
자신의 젊은 시절이 마른 비에게 뒤진다는 것 또한.
‘위험해…!’
저건 전력으로 척살에 나서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다시는 얕보지 않는다. 너를 패군이라 여기고 싸우겠노라.”
운종학에게서 다시금 용의 환상이 어른거렸다.
과연 천하를 논할 만한 강자.
그가 평정을 찾은 순간, 마른 비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별비야!”
더 이상 머물다간 죽는다.
사방이 포위된 상황.
마른 비가 택한 도주로는 하늘이었다.
“어, 어엇?!”
당황한 적들이 위를 올려다봤다.
백색의 빛줄기가 나무를 수직으로 오르고 있었다.
〔꽉 붙잡아라!〕
어린 시절, 검치호를 피해 독림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땅을 밟지 않았던 별비다.
나무에서 나무로.
녀석은 마른 비를 매단 채 순식간에 적들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서둘 필요 없다. 여기선 어차피 놈의 기동력이 한 수 위야. 숫자로 압박을 가한다. 넓은 범위를 선점한 뒤 서서히 궁지에 몰아넣도록.”
운종학이 차분하게 명했다.
그의 뜻을 짐작한 정파인들이 넓게 퍼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쫓아라. 놈을 죽이기 전까진 금광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귀왕문과 골육파각문이 금광을 점유한다 해도 놈들은 금을 채굴하고 운반할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놈을 정리하고 가는 게 옳은 순서일 터.
운종학은 직접 병력을 지휘하며 마른 비의 뒤를 쫓았다.
『별비야! 동남쪽으로! ‘거기’로 가는 거야!』
절대적인 열세.
적들을 쫓아오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니, 이제 준비한 전장으로 끌어들일 차례였다.
휘이이잉―.
마른 비와 정도맹이 떠난 자리.
살기의 잔흔과 지형에 밴 피 냄새는 그곳에 살던 짐승들을 멀리 쫓아냈다.
만 하루가 지나도록 바람 말고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에 인기척이 일었다.
“이쪽인가?”
검은 무복의 사내.
어떤 기운도 흘리지 않아 소속을 알 수 없는 사내가 동남쪽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