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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43화 (443/463)

443화

스가가각―!

섬뜩한 절단음이 귓가를 스쳤다.

반월형 검강이 고목을 베고 지나갔다.

덩어리 형태의 권강이 날아와서 풀숲을 통째로 갈아엎었다.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강기 때문에 마른 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큭…!”

감각이 뛰어난 놈이 있는지, 이번 공격은 진로를 예측하고 쏘아졌다.

마른 비는 백열갑을 들어서 받아냈다.

힘겨운 상황이지만, 점점 요령이 붙는다.

강기가 백열갑과 충돌하는 순간, 슬쩍 발을 떼며 깃털 날리기를 발동했다.

투쾅―!

공격을 받을 때의 충격을 기동력으로 전환한다.

마른 비의 육신이 훌쩍 떠오르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빌어먹을! 저건 뭘로 만들었길래 강기를 받고도 멀쩡한 것이냐?!”

검강을 쏘아낸 정의문주가 울화통을 터뜨렸다.

죽을힘을 다해 공격을 퍼부어도 전부 흘리거나 피해버린다.

간혹 적중해도 무기로 상쇄해버리니 잡을 방법이 없었다.

지난 이틀간 눈앞에서 놓친 게 몇 번인지…….

쉬익― 퀴악― 쾌애액―!

그나마 꽁무니라도 따를 수 있는 건 현무대 덕분이다.

그들의 궁사가 시기적절하게 놈의 발길을 늦췄고, 아슬아슬하게 시야에 붙잡아 둘 수 있었다.

“허억, 헉…! 저놈은 지치지도 않는단 말이냐!”

이틀 동안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가장 힘든 건 쫓기는 놈일 텐데, 수왕은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추격전에 익숙한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저런 강자가 누구에게 쫓겨 보았겠는가.

정의문주로서는 마른 비가 이토록 능숙하게 자신들을 따돌리는 게 기가 막힐 뿐이었다.

“문주님! 교대 명령입니다!”

정의문의 제자 하나가 바짝 따라붙으며 외쳤다.

정의문주는 그제야 거칠어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우리는 뒤로 빠져서 체력을 비축합시다! 1조와 2조가 다시 앞으로 나설 것이오!”

정도맹은 마른 비를 무작정 쫓지 않았다.

하수들은 멀찍이서 도망칠 공간을 차단하며 압박을 가하고, 최고수들만 마른 비에게 접근했다.

수장급에 해당하는 자들이 일고여덟 명씩 함께 움직이니, 각개격파도 여의치 않다.

맹공을 퍼붓던 자들이 지칠 때가 되면, 다음 조가 나서며 차륜전을 펼친다.

어쩌다가 틈이 보여도 어김없이 현무대의 지원 사격이 날아오니 숫자를 줄이기가 어려웠다.

‘좋아! 이대로만 가면 잡을 수 있다!’

‘흐흐. 꼭 토끼몰이를 하는 것 같구나!’

‘체력만 떨어지면 끝이다! 우리가 수왕을 잡는 거야!’

추격대는 힘이 날 수밖에 없었다.

천하에 명성을 떨친 남자를, 십좌급의 무인을 언제 이렇게 몰아쳐 보겠는가.

그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었다.

“장로들께선 좌우로 나뉘어 포위망을 보강해 주시오. 주작대는 내게서 떨어지지 말라. 놈이 지치는 기색이 보이면 달려들어 끝장을 낼 것이다.”

천검 운종학.

정도맹주가 진형 전체를 굽어보며 추격전을 총괄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리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사나운 맹수를 사냥하듯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마른 비를 몰아넣었다.

그의 노련한 지휘는 휘하 병력에게 이길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다.

『너무 빨라, 별비야! 이러면 못 따라올 거야! 조금만 천천히. 그래, 그거야!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춰.』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따라붙은 게 아니라 ‘쫓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마른 비는 공격받는 걸 감수하며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래야 적들이 추격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1, 2조랬지? 벌써 한 바퀴가 돌았나?’

그리고 이래야만 적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다.

마른 비는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며 뒤쪽을 힐끗 쳐다봤다.

야망에 불타는 눈빛을 한 중년인이 앞으로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슬슬 지칠 때가 됐다! 장로들은 앞으로 나서시오! 군웅들에게 본파의 힘을 보여줄 것이니!”

‘형산파…!’

호남에 위치한 형산파는 한때 구파의 자리를 넘본 적이 있을 만큼 강성한 문파다.

마른 비는 북벌이 끝난 뒤에 있었던 논공행상 자리를 떠올렸다.

여규와 안면을 트기 위해 다가왔던 노인은 자신을 형산파의 장로라고 소개했었다.

‘근데 날 잡으러 왔단 말이지?’

장승부.

장문인의 명을 받고 달려오는 사람 중엔 여규에게 말을 건넸던 노인도 있었다.

‘저 두 명도 낯이 익은데?’

마른 비에게 접근했던 자들도 있었다.

뜬금없이 자기네 문파에 들러서 천하정세를 논하자던 절검문의 무인과, 산해관을 구경시켜 주겠다던 신가장의 인물.

그때는 어떻게든 마른 비와 친해지려고 애를 쓰던 자들이 눈을 부라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휘리리릭―!

‘이크…!’

독특한 무기를 쓰는 문파도 있다.

철로 만든 부채를 집어 던지는 자들.

감숙성의 터줏대감 철선문이었다.

“이익! 쫓아라! 조금만 힘을 내면 잡을 수 있어!”

철선문과 돈독한 관계인 청월각도 보인다.

이 정도면 내로라하는 중견 문파들이 우르르 몰려온 거나 다름없다.

구파와 오대세가가 파병을 거부한 게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대충 파악은 끝났어. 이대로 끌고 가면 되나?’

체력은 아직 흘러넘친다.

저들은 자신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지만, 그건 뭘 모르는 생각이다.

열다섯 살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설검대에게 쫓긴 것에 비하면 이쯤은 산보나 다름없으니까.

문제는 운종학이 언제 본격적으로 나서느냐다.

마른 비가 뒤를 힐끗거릴 때, 무인 하나가 맹렬한 속도로 진형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

“맹주님! 낭보입니다! 사도칠문이 야수족에게 패하고 철수했습니다!”

“……!”

상황이 변했음을 알리는 소식이다.

운종학은 눈을 번뜩였고, 마른 비는 안도했다.

‘노을이와 여규가 해냈구나!’

운종학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그는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야수족이 귀왕문과 골육파각문을 꺾었다! 허나 놈들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터! 주작대와 장로들은 진영을 이탈해서 전령을 따르도록! 야수족의 잔존 병력을 찾아내서 섬멸하라!”

정도맹의 장로 중 한 명이 우려를 표했다.

“맹주. 투견대가 남았다고 하오. 필시 투도가 수왕을 도우러 온 것이겠지. 점창도 어떻게 나올지 미지수요. 수왕과 고검이 가까운 사이인 건 유명하지 않소이까?”

운종학은 염려 말라는 듯 웃었다.

“투견대가 무시 못 할 힘을 지닌 건 사실이나, 그들은 신생 집단이 아닌가. 그대들이 주작대를 도와주면 어렵지 않게 물리칠 것이네.”

그러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점창……. 그들은 사도칠문을 막기 위해 하산한 게 틀림없어. 설마 본맹을 상대로 칼을 들겠는가? 명색이 구파의 하나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지.”

운종학은 품에서 옥으로 깎은 패를 꺼내더니 장로 중의 한 명에게 건넸다.

“혹 쓸데없는 소릴 하거든 이걸 내보이게. 맹주령(盟主令)을 발동하는 걸 허락하네.”

여휘가 살아 있다면 모를까, 점창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지금 점창을 이끄는 건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들이기 때문이다.

“알겠소이다, 맹주. 우리에게 맡겨두시오.”

정도맹의 장로들이 방향을 틀었다.

운종학의 옆에 바짝 붙어서 달리던 유인화가 살기 어린 눈으로 주작대를 움직일 때였다.

쾅―!

전면에서 터진 소리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마른 비가 운종학의 계획을 간파하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별비야! 좌측에 있는 놈들을 쳐!”

급선회에 이은 기습!

마른 비와 별비의 움직임은 이틀을 달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신속했다.

“하아앗!”

소낙비.

철 기둥 같은 다리가 맹공을 뿌렸다.

기세 좋게 나섰던 형산파의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이, 이놈이 갑자기 왜?!”

힘을 보여주겠다던 형산파 장문인 목정기가 하얗게 질렸다.

투두두두두―!

“큭! 허업! 캇…!”

그는 원공검(猿公劍) 검식으로 반격에 나섰지만, 공격은커녕 날아드는 발차기를 막는 것도 급급했다.

그래도 제법 실력은 있는지 제자리에 서서 마른 비의 공격을 차단하고 있었다.

“장문인!”

“서둘러라! 지원을…!”

장로들이 가세하자 마른 비는 즉각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강렬한 한 방을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화르륵―.

완숙에 이른 속성기.

이글거리는 화염이 발뒤꿈치에 맺혔다.

마른 비가 오른발을 내리긋는 순간, 불벼락이 그의 발을 떠났다.

“저걸 원거리에서?! 마, 막아랏!”

형산파의 수뇌부가 검을 맞댔다.

기공 형태로 발출된 불벼락이 형산파와 충돌할 때, 별비는 오른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크아앙!”

새파란 기운을 머금은 앞발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하얀 발톱.

별비의 비기가 2조에 속한 수장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쩌저저정―!

“크아악!”

“무, 무슨 힘이…!”

그쪽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마른 비가 노린 건 잔챙이들이 아니었으니.

우우우웅.

강대한 기운이 마른 비의 오른 주먹으로 빨려들었다.

좌우에 들러붙은 날파리들을 걷어내자마자, 순정한 정권이 허공을 날았다.

뻐어어엉―!

공간을 압축하며 터져나간 바위 부수기가 중앙에서 지휘를 내리던 운종학을 급습했다.

“매, 맹주님…!”

콰차차창―!

호위들이 기겁하며 운종학의 앞을 막아섰다.

십여 자루의 검을 덧댄 끝에 권격에 실린 힘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놈이….”

운종학이 노려보자 마른 비가 히죽 웃었다.

“날 봐야지, 어디에 신경을 쓰는 거야? 섭섭하게 다른 데 한눈팔래?”

신경을 긁는 도발.

운종학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고, 마른 비는 등을 돌렸다.

“들었지? 우리 식구들이 이긴 거. 난 임무를 완수했으니 갈래. 잘 놀았어.”

“임무? 가긴 어딜 간다는….”

콰쾅―!

연, 번갯불.

마른 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졌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이, 이런! 아직도 저런 힘이?!”

정도맹 무인들이 얼빠진 얼굴로 마른 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운종학이 노기를 드러내며 외쳤다.

“뭘 멍하니 섰나! 놈은 야수족과 합류할 속셈인 게 분명하다! 쫓아라!”

‘임무’라고 했다.

그럼 지금껏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끌고 다닌 게….

“망할 놈의 야만 원숭이가 날 농락해?!”

운종학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분노했다.

놈은 사도련과의 전투가 끝났을 때 야수족이 뒤통수를 맞는 걸 막기 위해 여기 나타난 거다.

그리고 볼일 끝났다는 듯 멀어지는 건 지금 그쪽으로 병력을 보내봐야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여유를 부리며 쫓아다녔다니….

‘반드시 죽인다! 저놈만 잡으면 나머지 것들은 입김 한 번이면 날아갈 터!’

운종학이 생각을 정리하고 명령했다.

“어차피 놈은 결국 야수족에게 갈 것이다! 절대 놓치지 마라! 모든 힘을 집중해서 놈을 쫓는다!”

도발이 먹혀들었다.

운종학이 병력을 분할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마른 비를 쫓기 위해 추격 속도를 끌어 올렸다.

‘좋아! 따라온다!’

마른 비가 기감을 퍼뜨려서 뒤를 확인하고는 미소 지었다.

그러곤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했다.

‘동남쪽으로 삼 일을 달려왔지?’

사흘을 쉬지 않고 내려왔다.

아마 지금쯤이면….

‘보인다! 도착했어!’

마른 비는 씨익 웃고서 적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발자국을 남기며 달렸다.

“이쪽이다!”

“틀림없어요! 흔적이 이리로 이어집니다!”

이를 악물고 달린 지 두 시진.

정도맹의 병력이 지긋지긋한 밀림을 빠져 나왔다.

“이건…!”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중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밀림의 풍성함과 대조되는 척박한 환경.

거대한 돌산들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늘어선 바윗덩어리들은 마치 돌로 이루어진 숲을 보는 듯했다.

“저기다! 놈이 저기 있다!”

밀림을 벗어나자 마른 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작은 점으로 보일 만큼 거리를 벌린 그는 돌산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형산의 제자들이여! 전속력으로 달려라! 놈을 잡아서 실수를 만회하리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한 목정기가 외쳤다.

그는 선발대를 셋으로 나눠서 새로운 지형으로 진입했다.

그 뒤로 본대와 후발대가 밀림에서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그들 또한 멈추지 않고 선발대를 따라 달렸다.

“몸을 숨기기에 용이한 지형이다. 설마….”

운종학은 돌산을 보자마자 매복을 떠올렸다.

하지만 와족이 부상을 추스르기 바쁠 거라는 점과, 그사이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계속 가라! 놈을 지원할 병력은 없다!”

운종학이 돌산 사이로 진입하며 외쳤다.

정도맹의 추격대가 지형 깊숙이 들어섰을 때였다.

“크르르…….”

소름 끼치는 울음이 추격대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둠에 잠긴 돌산 여기저기서 불을 켜듯 싯누런 눈동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저것들은 뭐냐? 짐승?”

운종학이 인상을 찌푸릴 때,

“아우우우~!”

석림의 제왕.

핏빛 늑대의 포효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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