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
추격대의 고개가 한꺼번에 돌아갔다.
돌산의 꼭대기.
웅장한 그림자가 달빛을 가리고 있었다.
“저게… 늑대라고?”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전율이 목덜미까지 치닫는다.
살갗이 우둘투둘하게 일어서고, 병기를 쥔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깨닫지 못했다.
돌산 위에 버티고 선 야수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내, 내 손이 왜…?”
추격대는 뒤늦게 알아챘다.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존재.
석림의 제왕은 오연한 눈길로 자신의 영토에 침입한 자들을 내려다봤다.
“크르르르….”
홍옥을 깎아 만든 듯한 주둥이가 열리고, 새하얀 송곳니가 달빛을 흘렸다.
정파의 무인들은 그 모든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크아앙!!”
“……!”
두 번째 포효가 터지고 나서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왕이 침입자에 대한 응징을 선언했다는 사실을.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 야수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파바바밧!
석림의 늑대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돌산에서 뛰어내린 짐승들은 적들을 향해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수백 발의 쇠뇌가 쏘아진 듯한 광경.
그건 살아 움직이는 화살이며, 세상 어떤 것보다 날카로운 도검이었다.
일차 공습이 작렬하자 처참한 비명이 피어올랐다.
“아아악…!”
“습격이다! 느, 늑대들이…!”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동료가 죽어 나가고, 몸통이 찢기는 와중에도 정파인들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를 뿐.
“멈춰! 진정해라! 아군이 칼에 맞는다!”
“등…! 등을 맞대! 똑바로 보고 검을 휘두르란 말이다!”
지휘자들이 악을 썼다.
신비롭다 못해 경외감이 드는 늑대와, 하늘에서 날아든 공습.
짐승들의 매복에 당하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아차 하는 사이 진영을 파고든 늑대들은 아군과 섞여 아수라장을 만들어냈다.
“크르릉…!”
“카앙!”
늑대들은 닥치는 대로 할퀴고 물어뜯었다.
피가 솟구치고, 살점과 뼈가 뒤엉켰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전후좌우에서 터지는 비명 속에서, 정도맹 무인들은 겁에 질려 발버둥을 쳤다.
“진정해라! 그렇게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면…!”
“똑바로 봐! 짐승일 뿐이다! 차분히 대응하면 제압할 수 있어!”
목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팔 힘과, 뼈를 으깨는 치악력.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기동은 무인의 보법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추격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콰지직! 으직! ……꿀꺽.
늑대들은 살과 근육을 물어뜯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마치 똑똑히 보라는 듯 뜯어낸 살점을 삼켰다.
그건 중원의 무인들에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을 선사했다.
“히, 히이익!”
‘산 채로 먹힌다.’는 공포.
그건 죽고 죽이는 살육전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짐승에게 물려 죽는 걸 상상한 적도 없거니와, 자신이 ‘먹이’가 될 거라고 여긴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데 그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자신의 살을 으적으적 씹어 먹는 맹수 앞에서,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신 차렷! 냉정해져라! 눈앞에 있는 짐승이 과연 당해내지 못할 존재인지 가늠하란 말이다!”
하지만, 혼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운종학이 수습에 나섰기 때문이다.
“똑바로 봐라! 사납지만 결국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무인이 짐승을 두려워하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맞는 말이다.
힘과 덩치가 비정상적으로 클 뿐, 상대는 육신의 힘에만 의존하는 짐승에 불과하다.
실제로 실력 있는 무인들은 여기저기서 늑대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맞아! 별거 아니다! 침착하게 상대하면 잡을 수 있어!”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백 마리에 불과해!”
기습을 당해서 많게 느껴졌을 뿐 늑대들의 숫자는 이백에도 못 미쳤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겁을 먹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정파의 무인들이 검을 들고 반격에 나설 때,
“아우우우우~!”
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또 한번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촤아아아악!
시퍼런 빛이 번뜩이며 인간이 갈려 나갔다.
추아아악―!
폭발하듯 터지는 피 분수가 달빛을 붉게 물들였다.
진형의 가장자리에 나타난 두 마리의 늑대.
검고 붉은 녀석들은 덩치와 털빛에서부터 다른 늑대와 확연히 구분됐다.
“방금 그건…!”
“내공?!”
거기엔 소름 끼치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늑대들은 실제로 만반의 대비를 갖춘 무인들을 한 방에 짓이겨 버렸다.
“틀림없어! 저것들, 기를 다룬다!”
“짐승이 기를 사용한다고? 야수족이 데리고 다니는 짐승과 같은 종류인가?!”
아니, 전혀 다르다.
이들은 야생에서 스스로 각성을 일궈낸 존재들이었다.
흑랑과 붉은 발톱의 후계자.
수년 전, 마른 비가 수천 사냥꾼에게서 구해준 어린 늑대는 아비를 쏙 빼닮은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석림의 늑대들이 마른 비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인 데는 녀석의 의견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가르릉…!”
“커엉, 컹!”
우두머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늑대 무리가 움직였다.
늑대들은 공격을 멈추고 허공으로 훌쩍 뛰어 올랐다.
그러곤 오연하게 버티고 선 두 마리를 중심으로 뭉쳤다.
“저것……. 설마 수하들을 불러 모은 건가?”
정도맹이 그렇듯 석림의 늑대들도 지휘 체계가 명확했다.
흑랑과 혈랑은 추격대의 좌우측 끝에서 나타났고, 정도맹이 혼란을 수습하자마자 늑대들을 전장에서 이탈시켰다.
그리곤….
“크아아앙!”
갑자기 기동을 시작했다.
“뭐냐? 저게 무슨 짓이지?”
둘로 나뉜 늑대들은 추격대의 외곽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달려들었다.
“크아악!”
“아악…!”
진형의 외곽에 있던 자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길게 늘어선 타원형의 추격진.
그 바깥을 눈이 핑핑 돌아갈 속도로 달리다가 공격에 나선 것이다.
정파인들은 그제야 늑대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기동타격전?!”
믿을 수 없지만, 늑대들이 구사하는 건 원 기마대의 전술이었다.
적의 숫자가 많아 전면전이 불리할 경우, 기동력을 살려서 적의 외곽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적이 반격에 나서면 물러서고, 틈이 보이면 달려들어 진형을 헤집는다.
중원인들로서는 그것이 늑대들의 사냥법을 모방한 전술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이것들이 우릴 쥐좆으로 보는구나!”
목정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짐승 주제에 전술이라니?
게다가 물러서지 않고 덤빈다는 건 자신들을 사냥감으로 본다는 뜻이 아닌가!
“전부 베어주마! 형산의 정예들은 앞으로 나서라! 저것들이 달려드는 순간 호된 맛을 보여주는 거다!”
마른 비를 쫓느라 고수들은 전부 중앙에 밀집해 있었다.
그 결과 외곽의 병력이 점점 깎여나갔다.
다른 늑대들은 별거 아니지만, 선두에 선 두 마리가 문제다.
이제 막 힘에 눈을 뜬 듯한 혈랑은 제쳐두더라도, 흑랑은 얕볼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크하앙!”
정예들이 진형의 외곽으로 뛰쳐나갈 때였다.
흑랑이 울부짖자, 늑대 무리가 진형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인간을 찢어발겼다.
“이, 이것들! 설마?”
야수의 본능.
늑대들은 누가 강하고 약한지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강자들은 피하고, 약자들이 모인 곳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건 마치 숙련된 조각사가 바위의 균열을 찾아서 정을 때려 박는 것 같았다.
“난사(亂射)! 각이 나오는 대로 갈겨라! 최대한 저것들의 숫자를 줄여!”
정청과 현무대가 개입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밀집한 병력 때문에 움직임이 느린 검사들과 달리, 그들은 멀리서도 공격이 가능했다.
흑랑과 혈랑을 따르던 늑대들이 화살에 맞고 나가 떨어졌다.
정도맹의 무인들은 울화를 토해내듯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늑대들을 난자했다.
“좋아! 앞의 두 놈만 제외하면 나머진 별 볼일 없다! 이대로 전부 쏴 죽여…!”
두쿵―!
정청은 명령을 내리다 말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눈이 커지고, 시위를 당긴 손가락이 떨려왔다.
‘이, 이건…!’
고개를 돌리자, 시뻘건 강기 다섯 줄기가 시야를 메우고 쏟아졌다.
“제기랄….”
피하긴 늦었고, 받아낼 수도 없다.
정청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일격을 바라봤다.
“흠…!”
쩌어어어엉―!
정청을 살린 건 운종학이었다.
공격을 받아낸 검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방어였다.
“움직일 줄 알았노라. 언제까지 거기서 무게 잡고 있을지 궁금했지.”
운종학이 고개를 들어 돌산을 올려다봤다.
거기엔 휘둘렀던 앞발을 되돌리는 붉은 늑대가 있었다.
“감히 미물 따위가 본좌를 내려다보다니……. 이리 내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저것들은 전부 죽을 것이다.”
운종학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를 둘러싼 호위의 절반이 움직였다.
그에 더해 장로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흑랑과 혈랑을 요격하러 나섰다.
“…….”
붉은 발톱은 심유한 눈으로 운종학을 관찰했다.
그건 그의 인간됨을 가늠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짐승 주제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넌 어차피 내려올 수밖에 없다. 가만 놔두면 저것들은 몰살할 테니까.”
운종학은 붉은 발톱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지을 때,
“아우우우!”
흑랑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강대한 힘이 발산되고, 피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음?”
운종학의 눈이 돌아간 순간,
스팟―!
붉은 발톱의 형체가 사라졌다.
녀석은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가로지르며 앞발을 휘둘렀다.
푸화아아악!
그건 피 보라를 일으키는 철퇴와 같았다.
운종학 주변에 밀집해 있던 정파의 고수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붉은 발톱은 인간의 육신과 병장기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분쇄하며 운종학을 덮쳤다.
“그럴 줄 알았다.”
콰차창! 서걱―!
막고, 벤다.
지극히 단순한 동작이지만, 거기에 담긴 무의 이치는 깊고도 깊었다.
수십 년을 연마한 영수의 일격을 허사로 돌릴 만큼.
“커헝…!”
붉은 발톱의 어깨에서 피가 뭉클뭉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녀석은 굴하지 않고 운종학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환이 가벼워 보일 정도의 일격이라니. 놀랍다만, 결국 그 정도다. 짐승은 결코 인간을 이길 수 없느니라.”
그건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붉은 발톱의 예언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걸 떠드는 놈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게 문제일 뿐.
“죽어라.”
빛조차 관통할 찌르기가 쏘아졌다.
꼼짝없이 머리가 꿰뚫리려는 찰나, 붉은 발톱의 몸이 거꾸로 뒤집혔다.
“아닛?!”
막고, 벤다.
그것이 운종학의 대응이었다면, 붉은 발톱의 반격 또한 간결했다.
물고, 비튼다.
녀석은 날아드는 검을 측면에서 낚아채며 회전했다.
검을 붙잡은 팔까지 통째로 쥐어짤 것처럼.
“헛…! 이놈이!!”
‘우드득!’ 소리가 나며 팔이 뒤틀리자, 운종학은 검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부상당하지 않은 앞발을 들어 올리며, 붉은 발톱은 생각했다.
‘힘의 차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일대일로는 이기기 어려운 상대였다.
이래서 마른 비가 매복 공격이 성공하는 즉시 병력을 물리라고 했던 것이다.
숫자와 병력의 질.
모든 면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적이며, 대단히 위험할 것이라고.
기습으로 발을 늦추고, 잔챙이들의 숫자를 줄여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내 영역에 침입한 놈들이다. 싸움을 시작한 이상 그 정도로 물러날 순 없지.’
지닌 힘만큼이나 붉은 발톱의 투지는 강렬했다.
새끼들을 살려준 은혜를 제대로 갚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걸렸어. 내가 이겼다.’
처음 본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수십 차례의 가상 전투를 거쳤다.
앞발을 날리고, 어깨를 내준 뒤에 파고들어서 검을 빼앗는다.
인간들은 무기를 놓치면 힘이 급격히 반감되니까.
후아아악―!
스스로의 이름을 딴 비기가 뿜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놀랍군.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운종학이 품 안으로 파고들며 앞발을 바깥으로 밀어젖혔다.
합장하듯 맞댄 손바닥에서 금광이 뿜어졌다.
“검술만으로 천하제일을 노릴 만큼 어수룩하지 않노라.”
용형금광장(龍形金光掌).
운종학 비전의 독문장법이 붉은 발톱의 육신에 박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