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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45화 (445/463)

445화

쩌어―!

농밀하게 응축된 수강이 붉은 발톱의 몸체를 밀어냈다.

손바닥 모양의 장인(掌印)이 찍히며 막대한 기가 내부로 침투했다.

육신의 외부는 물론이고, 장기까지 으스러뜨릴 한 수.

붉은 발톱이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음?!”

운종학은 기겁했다.

반격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즉사할 공격을 받고도 붉은 발톱은 앞발을 휘둘렀다.

핏빛 기운 다섯 줄기가 운종학을 덮쳤다.

“캇!”

운종학은 장막(掌膜)을 펼치고 나서야 붉은 발톱의 반격을 상쇄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미처 해소하지 못한 여력이 운종학의 뺨과 가슴에 혈선을 그어 놨다.

“이놈이! 완전히 죽여주마!”

장력에 얻어맞는 순간, 붉은 발톱은 물고 있던 검을 놓쳤다.

검을 회수한 운종학이 곧바로 따라붙으며 외쳤다.

“금광장을 맞고도 움직이다니 더럽게 튼튼하구나! 이걸 맞고도 멀쩡한지 보겠다!”

파멸의 기운이 공기를 데웠다.

용형파천세(龍形破天勢).

힘에 중점을 둔 절학이 뿜어지려 할 때였다.

쾅! 콰쾅―!

전면에서 들려온 폭음이 정도맹 무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붉은 발톱과 운종학의 일전을 지켜보던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쐐애애액―!

늑대들이 곤경에 처한 걸 보고 마른 비가 되돌아온 것이다.

수왕이 전장에 난입하며 피의 돌파를 이뤄냈다.

중앙에 포진했던 고수들이 흑랑과 혈랑을 죽이기 위해 흩어진 터라 그를 막을 자는 없었다.

“비켜!!”

콰쾅―!

자연기의 소모를 감수하고 연달아 번갯불을 터뜨린다.

백열갑을 두른 마른 비의 주먹은 붉은 발톱의 앞발보다도 강렬했다.

속도를 등에 업은 권격이 일직선으로 혈로를 만들어냈다.

운종학의 주변에 있던 무인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마, 막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수레바퀴를 막아선 사마귀처럼.

호위들은 일격도 막아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허! 설마 짐승을 구하러 온 것이냐?!”

그야말로 허를 찌른 습격이다.

허나 그 먼 거리를 달려올 동안 반응하지 못할 운종학이 아니었다.

맹주는 즉각 반전하며 준비했던 일격을 마른 비에게 쏟아냈다.

“제 발로 죽으러 오다니 소원대로 해주마!”

하늘을 깨뜨릴 검격.

용형파천세가 대기를 일그러뜨렸다.

‘지금 공격기로 맞서면 늦어…!’

검은 이미 날아들고 있다.

여기서 어설프게 덤볐다간 중상을 면치 못하리라.

아니,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다.

마른 비는 양팔을 교차하여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곤 교룡갑과 범의 앙심을 발동했다.

‘백열갑을, 내 육체를 믿는 거야! 부탁이야. 버텨줘!’

마른 비가 각오를 다진 순간!

콰아아앙―!

일세의 절기가 권갑을 두드렸다.

‘큭…!’

마른 비는 어금니를 부서져라 깨물었다.

내리찍는 충격에 발목이 땅속으로 파묻혔다.

양팔의 감각이 사라지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렸다.

검날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진다.

마른 비는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양팔에 힘을 더했다.

“이럴 수가…! 이걸 버텼단 말이냐?!”

운종학이 눈을 부릅떴다.

파괴력에 치중한 용형파천세는 완숙에 이른 후 한 번도 막힌 적이 없는 절기다.

피하거나 흘리는 것도 아니고, 정면에서 받아내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럴 리 없다! 죽어라!”

운종학도 내력을 더하며 검을 내리눌렀다.

힘 대 힘.

이쯤 되면 자존심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문 아저씨의 말이 맞았어!’

마른 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맹주의 일격을 막고 나니 확신이 든다.

방어에 특화된 병기.

백열갑은 자신을 완성시켜줄 절세의 무구가 분명했다.

“이노오옴!!”

운종학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청적흑백황의 다섯 가지 기운이 정수리로 빨려들고, 그것은 이내 색을 지닌 꽃으로 화하여 어른거렸다.

“오, 오기조원(五氣朝元)! 삼화취정(三華聚頂)…!”

지켜보던 무인들이 탄성을 질렀다.

운공조식 중 몰아의 상태에서나 경험할 내공 경지가 전투 중에 드러난 것이다.

힘의 드나듦을 자유자재로 조절 가능하다는 방증이며, 조화지경(造化之境)의 끝자락에 다다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신기였다.

‘받을 필요 없어! 흘린다!’

하지만, 마른 비는 무의미한 힘 싸움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되돌아온 건 붉은 발톱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탈력(脫力)!’

대지를 뒤엎는 폭풍도 버들잎의 유연함을 꺾을 순 없다.

대자연의 힘, 사나운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기면 된다.

천 년 거암처럼 단단하던 마른 비의 몸이 부드러워졌다.

백열갑을 틀어서 검을 흘리고, 힘의 방향을 따라 육신을 기울였다.

그리고 압력이 쏟아지기 직전, 유유히 검로를 벗어났다.

낙엽 가누기와 깃털 날리기로 단련한 신체의 이완은 극의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 이놈이…!”

운종학이 마른 비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생사의 간극에서 이토록 완벽하게 몸을 이완시킬 수 있다는 게 기막힐 따름이다.

“놓칠 것 같으냐!”

베는 걸 실패한 그는 검에 깃든 내공을 폭발시켜 마른 비를 잡으려 했다.

운종학의 검이 빛을 발산하려는 순간!

“학습 능력이 없네.”

마른 비가 조용히 중얼댔다.

뒤이어 백광 다섯 줄기가 운종학을 강타했다.

“커헉…!”

운종학이 주르륵 밀려나며 신음을 토했다.

방어를 하느라 공격이 무산된 건 물론이다.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앞발을 휘두른 백호가 보였다.

“그게 끝이면 섭섭하지?”

“……?!”

쾅!

기회가 왔을 때 밀어내야 한다.

마른 비는 운종학이 자세를 가다듬을 틈을 주지 않고, 번갯불로 파고들며 발차기를 날렸다.

쩌어엉!

사선으로 뻗은 날짐승 떨구기가 운종학의 몸을 띄웠다.

그가 붕 떠오르더니 수하들의 머리 위를 날아 진형 한구석에 처박혔다.

“맹주님…!!”

“대체 몇 놈이 달려드는 것이냐! 호위들은 맹주님을 보필하라! 수왕은 우리가 잡을 것이야!”

강기가 폭우처럼 내리꽂혔다.

흑랑과 혈랑 쪽으로 향하던 장로들이 돌아온 것이다.

마른 비는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지만, 모든 걸 흘릴 수는 없었다.

“윽! 크윽…!”

검강이 옆구리를 긁고 지나가고, 장력이 허벅지를 때렸다.

권강이 몸통에 적중하려는 순간, 마른 비는 땅에서 발을 떼며 또 한번 탈력을 시전했다.

터어엉!

마른 비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그가 날아갈 방향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중상을 입은 채 적들에게 둘러싸여 혈투를 벌이고 있는 짐승.

마른 비는 녀석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가만히 있어! 붉은 발톱!”

마른 비는 날아가는 자세 그대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팔과 다리를 뻗었다.

“이야아아!”

돌개바람.

팔방으로 뻗어나간 맹격이 적들을 허물었다.

마른 비는 오른쪽 팔꿈치를 구부려서 붉은 발톱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외쳤다.

“별비야!”

“커허엉!!”

기다렸다는 듯 하얀 바람이 불어왔다.

마른 비에게 관심이 쏠린 사이, 적진을 주파한 별비가 둘의 옆을 지나쳤다.

〔꽉 붙잡아라! 센 놈들이 몰려오고 있어! 바로 탈출한다!〕

마른 비는 붉은 발톱을 끌어안은 채로 별비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힘을 주며 매달렸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허공을 가로지르는 셋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절대 놓치지 마! 쏴라! 현무대!”

충돌이 벌어진 이래로 마른 비를 가장 귀찮게 하는 놈들.

정도맹을 대표하는 궁수들의 화살이 날아왔다.

양손이 제한되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금으로선 최악의 공세였다.

“크아아앙!”

화살을 저지한 건 붉은 발톱이었다.

녀석은 고개를 돌려서 포효를 터뜨렸고, 음파로 화살의 궤도를 꺾어 버렸다.

“카앙…!”

하지만 한 대는 막지 못했으니, 현무대주 정청이 쏘아낸 철시였다.

붉은 발톱의 몸통에 꽂힌 철시는 화살대의 절반이 틀어 박혀 있었다.

〔어이쿠! 아프겠다…. 붉은 꼰대야. 이럴까 봐 비아가 짧게 치고 빠지랬잖아. 나이 먹고 이게 뭔 고생이냐?〕

별비가 붉은 발톱을 흘깃거리며 꿍얼댔다.

하지만 그건 별비 나름의 염려의 표현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너무 무리한 모양이야….〕

붉은 발톱답지 않게 풀이 죽은 어조였다.

스스로 쌓아 올린 힘에 자신이 있는 만큼 패배가 뼈아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건 자명했다.

침입자들에게 발톱을 휘둘러보지도 않고 물러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미안하구나. 우리 때문에 너희가 되돌아왔어.〕

붉은 발톱이 사과하자 마른 비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너희가 피해를 입었으니 내가 미안해야지. 덕분에 적의 병력이 상당히 줄었어. 고마워.”

셋은 어느새 돌산의 정상에 올라 있었다.

마른 비를 잡기 위해 정예들이 되돌아온 사이, 흑랑과 혈랑이 이끄는 늑대들도 무사히 적진을 빠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칠십 마리의 늑대가 목숨을 잃었지만, 물어 죽인 적은 이백 명이 넘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대승을 거둔 셈이다.

“별비야. 네가 붉은 발톱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줘.”

마른 비가 돌산을 기어 올라오는 적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아래에선 운종학이 입을 꾹 다문 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마른 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갈라져야 해. 그래야 늑대들을 무사히 피신시킬 수 있어. 우리가 따로 움직이면 적들은 나를 쫓아올 거야. 붉은 발톱과 늑대들을 도와주고 따라와.”

별비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비는 눈인사를 나눈 뒤에 곧바로 움직였다.

“어엇! 갈라진다!”

“맹주님! 수왕과 짐승들이 따로 움직입니다!”

돌산 뒤로 넘어간 별비와 달리, 마른 비는 일부러 적에게 보이도록 능선을 타고 움직였다.

시야에 잡힌다는 점도 그렇지만, 적들이 마른 비를 쫓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저놈, 다리를 다쳤다.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어.”

운종학은 마른 비가 부상을 입은 걸 놓치지 않았다.

마른 비를 공격했던 장로 중의 한 명이 대꾸했다.

“내 강기를 허벅지에 맞았소, 맹주. 정통으로 맞고도 고작 쩔뚝거리는 걸로 끝난 게 믿기지 않지만….”

운종학의 눈이 번뜩였다.

“잘하셨소. 머지않아 놈을 잡을 수 있겠군.”

어린놈과 짐승에게 이루 말 못 할 수모를 겪었다.

금광도 금광이지만, 운종학은 절대 마른 비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갑시다. 끝을 봐야 하지 않겠소.”

야트막한 산 크기의 봉우리.

석림은 그런 돌산 수백 개가 모여 이루어진 지형이었다.

마른 비는 돌산과 돌산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고, 거리가 멀면 내려와서 협곡을 달리기도 했다.

형산파 장문인 목정기가 석림에 진입하며, 선발대를 셋으로 나눈 통에 본대 말고도 좌우에서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큰일이네. 속도가 안 나.’

마른 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

그래서 마른 비는 기동유격전(機動遊擊戰)을 준비했다.

운남 전역을 전장으로 삼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리고 요소요소에서 유인과 매복으로 병력을 잘라먹는다.

약한 놈들부터 하나씩.

그 시작점이 석림이었다.

‘안 돼. 계획한 경로로는 못 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거리를 벌릴 수가 없어.’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식구들이 부상을 회복하고 합류할 때까지 끌고 다녀야 하는데, 당장 자신이 위험해진 것이다.

‘나을 때까지 무리를 해선 안 돼. 다리를 못 쓰게 되면 모든 게 끝이야.’

기동유격전을 하려면 발이 멈춰선 안 된다.

유일하게 우위에 선 기동력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싸워야 하는데 다리가 고장 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어떡하지? 생각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이….’

결국은 지형 아니면 생물이다.

석림의 주변, 이용할 만한 것이…….

‘아…!’

마른 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석림과 가까운 곳에 시간을 끌기엔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로 간다!’

마른 비는 욱신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달렸다.

구향 동굴은 수년 전 방문했을 때와 똑같았다.

시간이 빚은 종유석과 석순도 그대로였고, 무지막지한 수압의 자웅폭포도 여전했다.

계단식 논을 닮은 암석지대, 신전(神田)까지.

하나하나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끼이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괴수도 마찬가지였다.

황소만 한 덩치에 수북한 털, 구토가 치미는 얼굴까지.

마른 비는 숨죽인 채 인간의 얼굴을 한 거미를 바라봤다.

모든 생물에게 적대적인 악수(惡獸).

중원에서 인면지주(人面蜘蛛)라 불리는 괴물이 어둠 속을 거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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