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사람거미…!’
마른 비는 놈의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곤 일체화의 경지를 높였다.
몸이 풍경에 녹아들고, 숨소리가 폭포 소리에 맞춰 흘렀다.
어둠과 지형, 그리고 물소리.
구향동굴은 은신을 펼치기에 더없이 적합한 환경이었다.
“끼엑?”
사람거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휙 돌아서 마른 비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우욱…!’
마른 비는 욕지기가 치미는 걸 겨우 눌러 참았다.
녀석의 얼굴이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해졌기 때문이다.
원래가 눈, 코, 입을 밀가루로 빚다 만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이목구비만이 아니라 외피까지 더욱 뚜렷해졌다.
문제는 그 역시 완성된 게 아니라는 것.
사람거미의 얼굴은 석공이 작업을 하다가 만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눈, 코, 입 주위로 촛농이 녹은 것처럼 진녹색의 분비물이 흘러내린다는 점이다.
그건 마른 비에게 본능적인 거부감과 역겨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덩치도 커졌어! 설마 이놈… 탈피를 한 건가?’
종의 특성상 인면지주 역시 허물을 벗는다.
탈피를 거듭할수록 힘과 덩치가 커지며, 독성 또한 강해진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인면지주는 강해질수록 얼굴이 인간에 가까워진다는 점이었다.
최종 탈피를 마친 인면지주의 머리는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으며, 희로애락에 따른 표정까지 지을 수 있다.
거미의 몸체에 인간의 얼굴이 달렸으니, 이목구비가 뚜렷해질수록 더욱 징그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끼에아?”
사람거미는 마른 비가 숨은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다가 의아한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입속에서 독이 뚝뚝 흐르는 독니가 꿈틀거리며 튀어나왔다.
치이이익―.
바닥에 떨어진 독은 바위를 녹이며 파고들었다.
자체적인 독성뿐 아니라 닿는 걸 녹여버릴 정도의 부식성.
저 정도면 강피로도 안심할 수 없다.
마른 비는 일체화를 극성으로 펼치며 몸을 숨겼다.
‘이쪽에서 눈을 떼지 않아. 잡아내지는 못해도 이질감은 느낀다는 건가?’
놀라운 일이었다.
마른 비가 기억하는 사람거미는 맹독을 제외하곤 별 볼일 없는 생물이었기 때문이다.
고유의 이름이 붙었지만, 물리적인 힘은 특별할 것 없는 존재.
덩치와 힘이 강해진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힘에 국한될 뿐이다.
허나 사람거미는 지난 몇 년간 맹독과 더불어 자연기를 다루는 능력까지 터득한 모양이었다.
‘희한한 일이네. 이건 탈피가 아니라 진화에 가까운데?’
마른 비는 알 수 없었다.
사람거미가 힘을 키운 이유가 자신과 별비 때문이라는걸.
적들을 즉사시켰던 맹독이 통하지 않는 존재.
심지어 별비는 사람거미를 위압하고, 조롱까지 남기며 떠났다.
그것이 구향동굴의 지배자에게 생존의 위기와 함께 지독한 모멸감을 선사한 것이다.
“끼에에에….”
사람거미는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맹독과 함께 자연기까지 다루게 된 사람거미는 단순한 최종 탈피를 끝낸 동종보다 월등히 강할 게 분명했다.
“키에에!”
사람거미는 한시도 마른 비가 숨은 바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독니를 드러낸 채 방어 자세를 갖추고 한발 한발 다가왔다.
한번 혼쭐이 난 녀석은 손톱만큼의 위화감도 흘려 넘길 생각이 없었다.
‘제길. 엄청 예민해졌네.’
저 정도 경계태세면 눈앞까지 와서 자신을 놓칠 리 없다.
마른 비가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고 움직이는 걸 고민할 때였다.
“여기다! 이리로 흔적이 이어져 있어!”
“그렇군! 수왕은 이 동굴에 숨은 게 분명하오!”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가 막힌 시점에 정도맹의 추격대가 도착한 것이다.
사람 거미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홱 돌아갔다.
“키에에에!”
그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사람거미가 몸을 숨긴 것이다.
녀석은 천장을 향해 꽁무니를 들어 올리더니 거미줄을 발사했다.
그러곤 뿜어낸 거미줄을 민첩하게 타 올랐다.
동굴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
천장에 착 달라붙은 사람거미는 동굴 입구를 노려보더니, 야생동물 특유의 안광까지 꺼뜨렸다.
‘은신과 매복?! 저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배운 게 아닐 거다.
본디 거미는 ‘침묵의 포식자’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사냥꾼이니까.
마른 비는 더욱 깊게 몸을 파묻었고, 사람거미도 숨을 죽였다.
구향동굴에서 소리를 내는 건 정도맹의 무인들뿐이었다.
“조심해라! 살수비기를 펼치기 딱 좋은 환경이다!”
“다리가 불편하니 암습을 시도하려는 게 분명해! 정예들이 먼저 진입한다!”
정파를 상대하기 까다로운 게 바로 이런 점이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고령의 최고수들까지 서슴없이 앞으로 나선다.
끝까지 뒤에 숨어 있던 공지량과는 다른 모습.
적이지만 저런 점은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게 악수(惡手)로 작용할 거야.’
마른 비가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였다.
동굴에 진입한 무인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자, 잠깐 멈춰! 이게 뭐냐?”
동굴 내부를 종횡으로 가로지른 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그것은 점성을 띠고 있었다.
마른 비는 경험이 있어서 조심했지만, 적들은 건드리고 나서야 실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끈끈해? 이거 설마… 거미줄?”
악몽의 시작이었다.
정도맹의 무인이 중얼거린 순간, 느슨하게 늘어졌던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엇?! 뭐, 뭐냐? 몸이 딸려가…!”
“떼어낼 수가 없어! 무슨 놈의 접착성이…!”
거미줄이 당겨지자 무인들의 몸이 허공에 떠 올랐다.
신체 어딘가에 달라붙은 거미줄은 아교(阿膠)를 붙인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고, 머리카락보다도 가는 줄이 인간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이, 이럴 수가…! 이게 거미줄이라고?!”
먼저 진입한 정예들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내공을 깃들인 무기로 거미줄을 잘라냈다.
문제는 후방의 무인들이었다.
“놔! 놓으란 말이다! 이익…!”
“야, 양손이 다 붙었어! 이젠 몸까지…! 날 내려줘!”
그들은 미지의 상황과 암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후방의 무인들이 발버둥을 치자, 거미줄이 더욱 팽팽하게 당겨지며 사방에서 조여 왔다.
그 바람에 침착하게 대응하던 정예들조차 휘말려 버렸다.
“이런 멍청한…!”
“가만히 있어라! 몸을 움직이면 더 휘감긴다! 아군까지 말려든단 말이다!”
“검기로 잘라내면 그만이야! 겁먹지 말고 대응을…!”
마른 비와 별비에게 호된 맛을 본 사람거미는 경계를 위한 거미줄의 범위를 넓혀놓았다.
그리고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설치했다.
지상에서 끌려올라간 무인들이 일정 높이에 달하자, 손가락 굵기만 한 거미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상에 종횡으로 쳐놓은 경계용 거미줄과 달리 그건 사냥감을 포획하기 위한 진짜 함정이었다.
검기로도 잘리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질긴 그물.
인면지주의 집이자 사냥감을 포획하기 지주망(蜘蛛網)이었다.
“으, 으으! 몸이 안 움직여!”
“내려줘! 날 내려달란 말이다!”
정예고 나발이고 없다.
지주망에 걸린 인간들은 옴짝달싹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미줄에 묻은 신경독이 내부로 침투했다.
무인들은 내공을 지닌 만큼 즉사하진 않았지만,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으, 으어…!”
“살려! 살려줘!”
거미줄에 걸린 나비 신세가 된 인간들은 보았다.
동굴의 구석에서부터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생물들을.
거미줄 위를 빠르게 기어 오는 그것들은 인간의 머리통만 한 거미였다.
“우아! 으아아아!”
“아, 안 돼! 날 구해라! 난 우가의 가주가 될 몸…!”
으지직!
몸은 굳은 채 입만 산 자들.
거미에게는 식욕을 돋우는 먹잇감일 뿐이다.
인면지주를 빼닮은 작은 거미들이 정파인들의 머리를 물기 시작했다.
아드득! 빠득!
인간의 두개골과 얼굴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끔찍한 건 다른 부위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거미들은 오로지 인간의 얼굴과 골수만을 파먹었다.
우드드득! 추룹.
핏물과 뇌수가 후드득 떨어지고, 머리가 먹힌 인간들이 허공에서 파르르 떨었다.
그건 마른 비조차 섬뜩함을 느낄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를 더욱 소름 끼치게 한 건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거미들이었다.
‘사람거미가… 새끼를 낳은 건가…!’
마른 비가 어둠 한구석을 흘깃 올려다봤다.
사람거미는 난리통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훨씬 영악해진 모습.
의아한 건 저런 놈에게 번식을 가능케 할 짝이 있냐는 점이었다.
‘거미도 암수가 있어야 할 텐데……. 저런 게 또 있다고는 믿기 힘들어. 설마… ?!’
자가교접(自家交接).
자웅 동체(雌雄同體)인 동물에서, 동일 개체의 자웅 생식 기관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접이다.
그런 거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른 비가 알기로 사람거미는 홀로 생식(生殖)이 가능한 동물이 아니었다.
‘이게 대체…!’
저런 괴물이 자가 수정을 하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른다?
대부분은 이성이 없는 동물로 살아가다 죽겠지만, 숫자가 너무 많다.
저 중에 각성하는 놈이 하나둘씩 생긴다면….
‘끔찍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 게 진작 가능했다면 운남은 사람거미의 천국이 됐으리라.
그렇지 않다는 건 원래는 자가 수정이 불가능했다는 말이 된다.
그럼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얼마 전에 온 천하를 뒤덮었던 검은 기운. 운남에도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고 했어. 설마 그것 때문에?’
그 때문에 짐승들이 미쳐 날뛰고, 각성수들이 공격받았다.
결국 와족의 인도하에 운남의 짐승들이 신령목으로 대피하지 않았나.
영수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지만, 사람거미 같은 악수에게는 검은 기운이 진화할 계기를 제공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자신을 만난 경험이 진화의 출발점이었다는 걸 마른 비는 짐작할 수 없었다.
마른 비와 별비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느낀 사람거미는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걸 넘어 세력을 만들길 바랐다.
녀석의 열망과 검은 기운이 뒤섞여 진화라는 기적을 일군 것이다.
‘위험해. 아직은 성장 단계지만, 저것들이 커서 동굴 밖으로 나오면…!’
운남의 생태계가 파괴되리라.
그리고 끝없이 자가 수정을 반복하며 미친 듯이 수를 불릴 거다.
이건 운남 전체로 보면 검치호나 정도맹의 침략보다도 심각한 문제일 수 있었다.
‘여기서 막아야 해. 절대 크게 내버려둬선 안 돼!’
마른 비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를 깨물 때였다.
불쾌한 감각이 신경을 건드렸다.
‘엇? 기파?!’
마른 비의 시선이 정도맹 쪽을 향했다.
거기엔 형산파 장문인 목정기가 있었는데, 그는 마른 비가 있는 곳을 정확히 노려보고 있었다.
“숨어 있다는 걸 아는데 놓칠 것 같으냐!”
각파의 수장들이 기감을 중첩시켜 마른 비를 찾아낸 것이다.
곧이어 목정기가 날린 검강이 똑바로 날아왔다.
“칫…!”
마른 비가 몸을 빼내는 순간!
“끼에에악!!”
소름 끼치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거미.
지금껏 숨어 있던 놈이 은신처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마른 비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저놈!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