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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47화 (447/463)

447화

사람거미는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보이진 않지만, 느낀 것이다.

동굴 어딘가에 숨은 침입자의 존재를.

그리고 그건 입구에 모여 있는 놈들보다 훨씬 위험했다.

기다림 끝에 마른 비를 확인하자, 사람거미는 참지 못하고 은신처에서 튀어 나왔다.

“끼에아아악!”

침입자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놈이었다.

사람거미는 마른 비를 보자마자 꽁무니를 들어 올렸다.

푸확!

성인 남성의 팔뚝 굵기만 한 거미줄이 마른 비를 덮쳤다.

그건 마치 흰색의 봉을 포탄으로 쏘아내는 것 같았다.

마른 비는 잽싸게 움직이며 거미줄을 피하기 시작했다.

지상에 깔린 경계용 거미줄과 사람거미가 쏘아낸 포획용 거미줄.

그 모두를 요리조리 피하는 건 묘기에 가까웠다.

“수왕이다! 놈이 튀어 나왔어!”

“헉! 저게 뭐냐? 저 커다란 게 거미라고?”

동굴의 천장.

어둠 속에서 흉측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이 사람거미를 비추는 순간, 정파의 무인들은 신음을 흘렸다.

“우, 우웩! 저게 뭐냐?”

“맙소사! 거미가 사람 거죽을 뒤집어쓴 건가?!”

“아냐… 인간의 얼굴을 한 거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저, 저것 인면지주다!”

인면지주는 중원에서도 목격담이 보고되는 괴수다.

소문은 무성히 떠도는 데 반해 직접 본 사람이 없어서 거짓으로 치부될 뿐, 무림인이라면 인면지주를 모를 리 없다.

놈이 배 속에 품고 있다고 알려진 물건 때문이었다.

“내단…!”

무림의 기사를 담은 책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내용이 아닌가.

별 볼 일 없는 삼류 무인이 벼랑에서 발을 헛디뎌 인면지주의 굴에 떨어졌다더라.

천신만고 끝에 녀석의 배를 가르고 내단을 얻었는데, 그게 굉장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한순간에 일 갑자의 내공을 얻었다더라.

결국 그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되어 잘 먹고 잘살았다는.

삼류 무인이 체내에 내단을 쌓을 만한 괴수를 어떻게 잡았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냥 ‘우연히’ 내단을 얻고, ‘한순간에’ 강해져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았다는 내용뿐.

아무튼 기연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저 정도 크기의 인면지주라면…!”

저놈이 정말 내단이란 걸 품고 있다면, 어마어마한 기운이 응축돼 있으리라.

정도맹 무인들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그들이 무기를 쥔 손에 힘을 더할 때였다.

화아악―!

바람이 훅 끼치며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팔자 좋네. 저놈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왜 넋을 놓고 있어?”

“……!”

어둠을 꿰뚫는 눈빛.

푸른 기운을 두른 육체.

새하얗게 빛나는 권갑이 뻗어졌다.

“크아악!”

“카악…!”

급습을 당한 정파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른 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적진을 파고들었고, 정권 연타를 쳐냈다.

그러곤 들어올 때보다 빠르게 빠져나갔다.

푸확!

뒤이어 덮쳐온 건 사람거미의 거미줄이었다.

“으, 으아악!”

거미줄에 맞은 자들이 나가떨어졌다.

거미줄은 강한 힘으로 대상을 밀어냈고, 충격이 가해지자 잘게 쪼개졌다.

방사형으로 퍼진 그물이 주변에 있는 자들까지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그리고….

치이이익―.

인간의 피부가 타들어가며 고기 굽는 냄새를 피웠다.

아니, 저건 타는 게 아니라 녹는 것에 가깝다.

이번 거미줄에 묻은 건 산성독인 모양이었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마른 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는다.

마른 비는 만만한 놈들만 골라서 후려치며 정도맹을 공략했다.

그가 빠질 때면, 어김없이 거미줄이 날아든다.

결과만 놓고 보면 사람거미가 지원 사격을 해주는 꼴이었다.

“커억!”

“크아아악! 뜨거워! 누가 이것 좀 떼 줘!”

“비, 비켜! 수왕이 온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서로가 적인 삼파전(三巴戰).

마른 비는 사람거미의 적개심을 이용해 정도맹의 숫자를 줄였다.

동굴에 들어 왔던 정파인들이 정신없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에잇! 비켜라! 검을 맞댈 능력이 안 되면 밖으로 나가란 말이다!”

목정기가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형산파 무인들을 이끌고 마른 비에게 달려들었다.

“본파가 수왕을 맡겠소! 다른 분들께선 힘을 합쳐 인면지주를 처리해주시오!”

적절한 지시였다.

형산파 수뇌부가 한꺼번에 덤비자, 마른 비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횃불이 어둠을 살라먹는 가운데, 백열갑과 십여 자루의 검이 불꽃을 튀겼다.

“키에엑!”

그때, 사람거미의 포효가 터졌다.

그러자 허공에서 거미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새끼 거미들은 닥치는 대로 인간을 공격하며 독니를 박아 넣었다.

“히, 히이익…!”

인면지주를 공격하라는 지시는 뇌리에서 날아가 버렸다.

거미가 머리에 달라붙자, 정파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성을 잃은 자들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아군에게 베인 자들이 땅을 굴렀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인간이 울부짖고, 괴수가 날뛰는 광경은 구향동굴의 절경과 대비되어 더욱 처참했다.

“끼에에!”

투확―!

마른 비와 형산파가 뒤얽힌 현장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목정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싸움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제자들에게 거미줄을 차단하라 일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날아온 건 거미줄이 아니었다.

“어엇?!”

형산의 제자들이 검을 휘둘렀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베지 못했다.

진녹색의 끈적끈적한 액체.

사람거미가 침처럼 뱉어낸 건 바위조차 녹여버릴 독액이었다.

“끄, 끄아아아!”

독액을 맞은 다섯 명이 녹아내렸다.

그들은 뼈와 장기는 물론이고,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했다.

“아, 안 돼! 제자들이…!”

목정기와 형산의 장로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었다.

후아악!

검은 그림자가 덮쳐왔기 때문이다.

어느새 머리 위까지 기어온 사람거미가 육탄전에 나섰다.

녀석은 뚝 떨어지더니 여덟 개의 다리로 마른 비와 형산파를 동시에 후려쳤다.

“엇?!”

“마, 막아라!”

쩌저저정―!

마른 비와 형산파가 양옆으로 밀렸다.

침입자들의 한복판에 떨어져 내린 사람거미가 주둥이를 쩍 벌렸다.

“키아악!”

사방을 뒤덮으며 쏟아져 내리는 독액.

마른 비와 형산파의 눈이 커졌다.

“장문인! 뒤로 물러서시오!”

형산의 장로들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이중삼중으로 둘러친 검막이 시퍼런 독액을 완전히 차단했다.

그들의 임기응변은 훌륭했지만….

“컥! 커헉…!”

사람거미의 독은 형산파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독액은 막았지만, 그 안에 깃든 독성까지 누르진 못한 것이다.

사람거미의 독액은 향을 흡입하는 것만으로 중독될 정도로 지독했다.

“쿨럭, 카학…!”

전면에 나섰던 장로 네 명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러곤 피를 뿜으며 무너졌다.

호흡기를 타고 들어간 독향이 순식간에 독기를 퍼뜨린 것이다.

“임 장로! 묵 장로…!”

“물러나시오, 장문인! 독의 범위에서 빠져나가야 하오!”

형산파 무인들이 황급히 물러섰다.

후퇴의 와중에 목정기는 욕설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함께한 장로 네 명을 잃었는데, 마른 비는 멀쩡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 같은! 네놈은 왜 아무렇지 않은 것이냐?!”

“나? 난 원래 독에 강한 체질이야.”

너무 간단해서 더 울화통이 터지는 대꾸였다.

부식성 독액이 위험할 뿐 독향 따위로는 자신을 쓰러뜨릴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거미의 독은 마른 비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놈이 강해진 것 이상으로 마른 비도 강해진 것이다.

“끼에아아!”

사람거미는 화가 치미는지 광분하기 시작했다.

놈이 날뛰려는 찰나!

“시끄러. 네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

마른 비는 번개처럼 전진했다.

그러곤 사람거미의 몸통에 정권을 찔러 넣었다.

‘아파서 날뛸 만큼만…!’

뻐어억!

몸이 떠오른다.

둔중한 충격이 사람거미의 육체를 흔들었다.

놈은 한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깨닫지 못했다.

사람거미는 허공으로 날아오른 뒤에야 복부를 저미는 고통을 실감했다.

“키, 키야아아아!”

‘가라!’

처음 구향동굴을 떠올렸을 때부터 계획했던 한 수다.

마른 비는 사람거미를 정파인들의 머리 위로 날려버렸다.

“아, 안 돼…!”

마른 비의 의도를 간파한 자들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싸움 중이었고, 새끼 거미를 베다 말고 허공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끼에엑…!”

사람거미가 통증에 몸부림을 쳤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괴수는 주둥이를 쩍 벌렸고, 사방으로 독액을 뿜었다.

진녹색의 극독이 정도맹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 아아…!”

그게 그들의 유언이었다.

독액이 닿는 순간, 모든 게 녹아내렸다.

동굴에 들어와 있던 무인들도, 새끼 거미들도 전부 흐물흐물 문드러졌다.

그러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녹아내렸다.

독액은 지반을 구성한 암석까지 녹여버리며 구향동굴 입구의 높이를 한 뼘쯤 낮추었다.

“쿨럭, 쿨럭, 카학…!”

본대에 앞서 동굴에 진입한 팔십 명의 무인들.

정예들은 마른 비와 부딪힐 걸 가정하고 전부 앞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형산파의 장로들이 그랬듯 독액을 차단했지만, 독향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끄, 끄르륵…!”

허리를 꺾으며 기침을 토하던 정예들이 피를 뿜었고,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거꾸러졌다.

동굴에서 그보다 확실하게 생물을 죽이는 방법은 없을 듯했다.

정도맹의 무인 중 살아남은 건 끄트머리에 있다가 겨우 독향을 피한 자들과 형산파 수뇌부뿐이었다.

‘제대로 먹혔어!’

동굴에 들어온 정도맹의 선발대가 몰살했다.

갑자기 떠올린 계획치고는 훌륭하게 먹혀든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었으니….

‘맹주와 맹주의 직속세력. 그들이 보이질 않아.’

적의 알짜배기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은 한 명도 동굴에 들어오지 않았다.

운종학은 패군을 상대하듯 마른 비와 싸우겠다고 선언했고, 무엇이 있는지 모를 지형에 자신의 수하들을 투입하지 않은 것이다.

잘하면 운종학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끼, 끼에… 끼에에에….”

그때, 괴수의 울음이 마른 비의 상념을 깨뜨렸다.

고개를 들자,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사람거미가 보였다.

놈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주변을 서성이며 다리로 바닥을 쓸었다.

그건 마치 사람이 흐느끼며 정신없이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새끼 거미…!’

자신의 독 때문에 새끼들이 전멸했다.

그게 얼마나 큰 충격일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으리라.

기감을 확장해도 걸리는 게 없는 걸로 볼 때, 새끼 거미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몰살한 게 분명했다.

“끼, 끼에, 크에엑…!”

사람거미가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놈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사람거미는 안면 근육을 일그러뜨린 채 ‘울고’ 있었다.

‘눈물? 거미가 감정을 느낀다고? 그리고 표정…! 설마…!’

사람거미는 분노에 찬 얼굴로 울었다.

그리고 마른 비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끼긱, 끼기긱―.

사람거미의 머리가 고장 난 기계 장치처럼 돌아갔다.

눈코입이 완전히 거꾸로 설 때까지.

그리고 무시무시한 살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뭐야? 뭐가 시작되려는 거지?’

순간 마른 비의 동공이 커졌다.

완전한 탈피?

또 한 번의 각성?

모르겠다.

아무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위험해! 지금 죽인다!’

저 살의가 자신을 향할 것은 분명하다.

야생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마른 비가 주먹을 움켜쥘 때였다.

“키에아아악!”

눈코입이 거꾸로 돌아간 거미가 포효했다.

그러곤 네 개의 다리로 땅을 디디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놈이 무언가를 하려는 순간!

쾌애액―!

묵직한 철창이 공기를 갈랐다.

입구 바깥에서 날아든 창이 사람거미의 몸통에 꽂혔다.

쐐액― 쾌애애액!

삼십여 자루의 철창이 쇄도했다.

창들은 틈을 주지 않고 사람거미의 몸통에 빼곡히 틀어박혔다.

퍽! 퍼퍼퍼퍽!

대미를 장식한 건 주홍빛 단창이었다.

똑바로 날아온 창은 사람거미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다.

“끄, 끄에….”

사람거미는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엎어졌다.

‘쿵!’ 소리가 운남에 이름을 떨친 생물의 죽음을 알렸다.

“어디서 미물 따위가….”

단창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주작대주 유인화.

그녀가 수하들과 함께 동굴로 걸어 들어왔다.

주작대가 창을 휘돌려서 독향을 걷어내는 사이, 유인화는 사람거미의 얼굴에 꽂힌 단창을 뽑았다.

그러곤 사람거미의 배를 갈라서 창으로 뒤적이며 말했다.

“역시. 맹주님의 말씀이 맞았어. 이유 없이 동굴로 기어 들어갈 리가 없지.”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이 빛났다.

유인화는 허리를 굽히더니 사람거미의 몸속에서 주먹만 한 구슬을 꺼냈다.

동굴의 어둠보다도 새카만 빛을 토하는 구슬은 사람거미의 기운이 담긴 내단이었다.

“호호. 이런 게 진짜 있었네. 덕분에 횡재했는걸?”

유인화는 내단을 닦아서 품속에 넣었다.

그러곤 외눈에 살기를 띠며 말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야만인 새끼야. 준비한 건 이게 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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