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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48화 (448/463)

448화

처음 봤을 때부터 과할 정도의 적개심을 드러내는 여인이다.

마른 비는 유인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놈들이 진형을 이룬 채 동굴로 진입 중이었기 때문이다.

툭. 투툭. 투두둑.

주작대는 창을 휘둘러서 사람거미가 쳐놓은 경계용 거미줄을 걷어냈다.

살아남은 무인들이 그들에게 합류했다.

제자와 동료, 사문의 어른을 잃은 자들은 벌게진 눈으로 마른 비를 노려봤다.

“칼을 맞대고 죽은 것도 아니다. 괴수가 뿜어낸 독에 녹아버렸어……. 시체는커녕 유품도 찾을 수가 없단 말이다!”

목정기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는 제자와 장로들이 죽은 걸 마른 비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자들은 이 전쟁이 왜 벌어졌는지도 잊은 채 마른 비에 대한 분노만을 드러냈다.

“웃기네. 남의 집에 칼 들고 쳐들어온 놈이 지금 화내는 거야?”

마른 비는 부상당한 허벅지를 주무르며 차갑게 말했다.

“지인들이 독에 죽은 게 화가 나? 나랑 싸우다 죽었으면? 그럼 뭐가 달랐을까?”

“물론이다! 무인이 정정당당히 무를 겨루다 죽었다면 원통하진 않을 터!”

“정정당당? 천 명이 넘게 우르르 몰려온 놈들이 정정당당을 논한단 말이지?”

마른 비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럼 일대일로 덤벼. 정정당당하게. 나 하나 잡겠다고 떼 지어 달려들지 말고. 창피하지도 않아?”

대꾸할 말이 있을 리 없다.

목정기는 벌게진 얼굴로 숨만 씩씩 몰아쉬었다.

“진정하시죠, 장문인. 말을 섞을 가치가 없는 놈입니다. 척살하면 그뿐.”

유인화는 품에 넣은 인면지주의 내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른 쪽 손으로 단창을 들어 올렸다.

“자, 이제 복수를 할 차례군. 도망칠 생각은 마라. 어디로 가도 넌 죽게 돼 있어.”

마른 비가 그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동굴 안쪽으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유인화를 흘깃 쳐다봤다.

“내단이라고 했지? 사람거미가 그런 걸 품고 있는 줄은 몰랐네. 충고 하나 하자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흉악한 기운이 느껴지니까.”

유인화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흥! 이걸 욕심내는 건가? 헛된 꿈 꾸지 마라! 내가 잡았으니 이건 내 것이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는다!”

그건 아군에게 건네는 경고이기도 했다.

독액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 중 상당수가 아까부터 내단을 훔쳐보고 있었으니까.

살았다는 데 안도한 것도 잠시, 그들의 눈엔 주체할 수 없는 탐욕이 서려 있었다.

“마음대로 해. 난 그런 것엔 관심 없으니까.”

마른 비는 적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계속 물러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형에 녹아들 듯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어엇?!”

“은신이다! 놓치지 마라! 아까처럼 기감을 퍼뜨려서…!”

무인들이 소리치고, 목정기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유인화는 단창을 든 손으로 가만있으라는 몸짓을 했다.

「도망치게 놔두세요, 장문인. 그편이 더 수월해요.」

“……?”

전음을 들은 목정기가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유인화는 대꾸하지 않다가, 마른 비가 충분히 멀어졌을 시간이 되자 입을 열었다.

“이제 따라가죠. 사냥의 시간입니다.”

‘쫓아오지 않아? 웬일이지?’

마른 비가 뒤를 돌아봤다.

그는 구향동굴의 남서쪽 출구를 나오는 참이었다.

규모가 큰 만큼 구향동굴에는 여러 개의 출입구가 있었고, 여긴 그중 하나였다.

마른 비는 처음부터 이리로 나오려고 작정했는데, 이 방향으로 쭉 달리면 원래 계획한 길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죽자고 덤빌 땐 언제고 왜 안 따라오는 거야? 뭐, 나야 좋지.’

강기에 얻어맞은 부위는 여전히 뻐근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하체가 통째로 날아갔겠지만, 범의 앙심과 교룡갑은 훌륭히 견뎌주었다.

문제는 다리가 회복될 만큼의 시간을 벌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숫자는 줄였어. 이제 남은 건 구백 명.’

천삼백 명이 운남의 경계를 넘었고, 야밤의 습격으로 백 명이 넘는 인원을 쓰러뜨렸다.

석림 늑대들의 조력과 사람거미를 이용하여 삼백 명 가까이를 처치했으니, 남은 건 구백 명 정도였다.

‘휴…. 더럽게 많네.’

어중이떠중이들은 대부분 쳐냈다.

구향동굴에서는 각파의 정예에 해당하는 자들을 별 힘 안 들이고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엄청난 숫자가 남았으며, 그중 상당수는 힘 좀 쓰는 고수들이었다.

‘아냐. 할 수 있어! 식구들과 합류하기만 하면….’

그러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것이다.

마른 비가 동굴에서 멀어져 개활지에 접어들 때였다.

쾌애애액―!

공기를 찢는 소리가 고막을 건드렸다.

마른 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백열갑을 휘둘렀다.

쩌엉!

팔뚝보다도 기다란 철 화살이 하늘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화살이 날아온 쪽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맹주님의 심계는 탁월하구나!”

정의문주가 주절대며 걸어왔다.

그를 따르는 정의문의 검사들이 동쪽에서 나타났고, 절검문, 청월각, 신가장이 각기 서, 남, 북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보다 먼 곳에서 느껴지는 투기.

철선문을 선두로 다양한 문파가 달려오고 있었다.

마른 비가 동굴에 들어간 사이, 정도맹은 산개하여 일대를 틀어막은 것이다.

‘빌어먹을……. 완전히 포위됐어!’

뒤쪽에서는 주작대와 형산파의 기운이 감지됐다.

그들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쫓아오며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래서 그냥 놔준 거였구나!’

대규모 병력이 진입할 수 없는 동굴보다는 바깥이 정도맹에게 유리하다.

개활지로 끌어내야 은신을 차단할 수 있으며, 현무대의 시야가 방해받지 않는다.

정도맹은 천라지망을 펼친 채 마른 비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쉽진 않겠지만 이놈들은 뚫을 수 있어. 맹주는 어디 있지?’

운종학의 위치가 가장 중요하다.

마른 비가 기감을 끌어 올릴 때, 강대한 기운이 솟구쳤다.

‘남쪽인가…!’

자신이 남하할 거라고 예상하고 질러간 모양이다.

거리는 상당하지만, 운종학의 경공이라면 머지않아 당도할 게 분명했다.

‘이 상황에서 맹주까지 맞닥뜨리면…!’

그러면 무슨 수를 써도 살아날 수 없다.

마른 비는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기 위해 북쪽으로 움직였다.

쾅!

힘을 아낄 때가 아니다.

마른 비는 허벅지의 통증을 참고 번갯불을 터뜨렸다.

그리고 전력으로 길을 뚫으려 했다.

“……?”

포위에 이어 또 한번 예상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한바탕 충돌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가장의 무인들이 썰물처럼 물러났기 때문이다.

마른 비가 의아해할 때, 적들이 움직였다.

“아…!”

검기, 검풍에 더해 검강까지.

사방에서 무차별 폭격이 날아왔다.

수왕의 힘을 잘 아는 정도맹은 간격을 내주지 않았다.

마른 비가 달려드는 방향은 물러나고, 나머지 삼 방에서 따라붙는다.

그리고 원거리에서 타격한다.

수십 명이 뿜어낸 발출형 기공이 마른 비를 두드렸다.

“이야아아!”

비막.

팔뚝 전체로 펼치는 방어기가 적들의 공격을 상쇄했다.

백열갑과 어우러진 비막은 금강석 같은 강도를 자랑했고, 절대로 뚫리지 않을 철벽처럼 보였다.

하지만 수십 명이 퍼붓는 공격을 혼자 견디는 건 무리였다.

“흡! 크윽…!”

비막의 범위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팔이 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른 비가 버거움을 느낄 때쯤,

“놈의 방어를 뚫는다! 현무대! 쏴라!”

정청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백 발의 화살이 한꺼번에 시위를 떠났다.

마른 비는 화살을 노려보며 양 주먹을 떨쳤다.

“하아압!”

권막으로의 전환.

권막은 비막보다 범위가 좁은 대신 더 빠르고 단단한 방어가 가능하다.

마른 비는 현무대의 궁사까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럴 수가…!”

“저게 사람이란 말이냐!”

정파인들이 신음을 흘렸다.

검기나 검풍은 그렇다 치자.

검강은 초입에만 들어서도 절정으로 분류될 만큼 지고한 경지다.

설지굉만 해도 마른 비를 처음 만났을 때는 검강을 구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구파의 장로였고, 사천과 귀주에서 이름을 떨쳤다.

한데 여러 명이 쏟아낸 강기 다발을 상처 하나 없이 받아 내다니…….

도리어 공격을 하는 쪽이 기가 질리는 상황이다.

정도맹의 무인들은 마른 비가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멈추지 마라! 계속 두드렷!”

정의문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린 자들이 검을 휘두르고, 주변에서 달려온 자들까지 공격을 퍼부으니 오색빛깔의 기운이 개활지를 메웠다.

‘실수했어…!’

마른 비는 후회하고 있었다.

처음 달려들 때부터 전투화장을 발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틈이 없다.

주먹이 무거워지고, 어깨근육이 통증을 호소한다.

“큭…!”

주먹이 튕겨나간 순간, 마른 비는 백열갑으로 급소를 가린 채 몸을 웅크렸다.

자연기를 철골과 강피에 흘려 넣고 버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펑! 퍼버버벙―!

“큭! 이익…!”

몸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폭음에 귀가 얼얼하다.

백열갑 덕분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이대로 가면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후하하! 맹주님 없이도 해냈다! 우리가 수왕을 잡았어!”

정의문주가 신이 나서 외쳤다.

정파인들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 마른 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서 정청이 말했다.

“마무리는 내가 하겠소. 수왕, 그대의 무(武)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오.”

중화십궁의 일좌를 차지한 남자가 활시위를 튕겼다.

“이번에는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현무나선관시.

별비가 깨뜨렸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으윽!”

마른 비가 할 수 있는 건 피격 부위를 바꾸는 것뿐이었다.

철시에 가슴이 꿰뚫리려는 순간, 있는 힘껏 몸을 틀며 어깨를 가져다댔다.

퍼어억―!

마른 비의 몸이 붕 떠올랐다.

피가 뿌려지며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파인들의 입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오오오! 드디어…!”

“잡았다! 수왕을 잡았어!”

“마교와 원의 기마대도 실패한 걸 우리가 해냈단 말이다!”

누구도 수왕이 나가떨어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현무대주의 절기가 적중했으니, 최소한 중상을 입었을 게 분명하다.

주작대가 도착했고, 맹주의 기운도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수왕이 쓰러졌다면, 금광을 먹는 것도 시간문제다!’

정파인들은 당장 축제라도 열 분위기였다.

“자, 잠깐….”

이상함을 느낀 건 정청이었다.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그는 화살이 박혔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마치 검사가 검 끝을 통해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를 파악하는 것처럼.

“……제대로 박히지 않았어. 뭔가가 화살을 막았….”

키이이잉―!

정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푸른빛이 타올랐다.

마른 비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정청이 느낀 게 맞았다.

현무나선관시는 강피를 뚫는 데는 성공했으나, 철골까지 깨뜨리진 못한 것이다.

마른 비는 그냥 어깨를 내준 게 아니라 뼈로 화살촉을 가로막았다.

쾅―!

번갯불이 터지고, 마른 비가 달려 나갔다.

전투화장을 도주에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다.

북쪽을 막고 있던 신가장 무인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마, 막앗! 아니, 물러나라! 당장 뒤로 물러나!”

신가장주가 비명을 질렀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마른 비를 막을 수 없다는걸.

하지만 신가장의 무인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뻐어억! 빠바바박!

마른 비의 주먹은 적을 거꾸러뜨리는 걸 넘어 분쇄해 버렸다

신체가 박살 난 신가장의 무인들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안 된다! 이놈!”

신가장주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그 역시 전투화장을 발동한 마른 비를 당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이대로 간다!’

마른 비가 번갯불을 튕기며 전진하려는 찰나,

“어딜 도망치려고!”

유인화의 외침과 함께 철창 수십 자루가 나아갈 경로에 뿌려졌다.

마른 비가 덜컥 멈추자, 이번엔 화살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이것들이…!”

주작대가 따라붙고, 현무대가 기동을 저지한다.

창수들은 둘째치더라도 궁수들을 정리해야만 원활한 기동이 가능하리라.

하지만 마른 비는 기감을 퍼뜨린 뒤 탄식했다.

‘산개한 채 사방을 포위했어. 이래서는 단시간에 정리할 수가…!’

적들은 마른 비가 현무대를 노릴 것까지 계산한 게 틀림없다.

허나 진짜 절망은 이제 막 당도했으니….

“독 안에 든 생쥐 꼴이구나.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천라지망이 펼쳐진 이상,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운종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상처 입은 마른 비의 모습을 즐기듯 여유롭게 걸어왔다.

‘……여기까진가.’

마른 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지원 병력이 있지만, 누구도 올 수 없는 상황이다.

과거의 위기들을 돌이켜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눈을 뜬 마른 비의 얼굴에서 좌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죽겠지만, 절대 혼자 가진 않는다.

남은 이들을 위해 너만은 반드시 죽여 놓으리라.

야생의 눈동자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허튼짓을….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마른 비의 의도를 눈치챈 운종학이 비웃었다.

허리를 편 마른 비가 결사의 각오를 다지며 자연기를 끌어올렸다.

푸욱. 푸푹. 스각.

수왕과 천검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그때.

북쪽에선 은밀한 죽음이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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