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끼리릭.
현무대 부대주 태원묵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대기 중이었다.
나뭇가지가 양 갈래로 뻗어나가는 지점에 걸터앉은 그는 매의 눈으로 마른 비를 노려봤다.
‘등이 훤히 보인다. 심지어 맹주님과 대치 중인데… 도저히 맞출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요 며칠간 수왕에게 쏜 화살이 몇 발인지 셀 수가 없다.
항상 적중을 확신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대주를 제외하면 현무대 이백 궁수 중 수왕의 몸에 화살을 꽂은 자가 없는 것이다.
대주조차 수왕이 가만히 서 있을 때 맞춘 것이니, 태원묵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정해야겠지. 차원이 다르다. 우리로선 범접할 수 없는 고수.’
태원묵은 마른 비와의 실력 차이를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임무에 집중했다.
‘맹주님이 이끄는 본맹의 정예를 상대로 여기까지 버틴 것도 기적이지. 꼭 한번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안타깝게 됐소, 수왕.’
운종학은 명했다.
틈이 보이면 언제든 화살을 쑤셔 박으라고.
일대일 결투를 원한 게 아니냐는 질문에, 운종학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그럴 생각이다. 허나 야만인을 상대로 괜히 힘 뺄 필요가 있겠느냐? 쉽게 잡을 방법이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일대일 결투 중에 빈틈을 노리는 저격.
그게 현무대가 받은 명이었다.
태원묵은 활시위를 단단하게 붙든 채 마른 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텁.
그때, 손바닥이 태원묵의 입을 막았다.
피슉.
그리고 반응할 틈도 없이 검이 목을 긋고 지나갔다.
목 언저리가 허전해지며 시원한 느낌이 든다.
무언가가 콸콸 쏟아지는 감각.
그건 곧 끔찍한 통증으로 변했다.
“……!”
태원묵은 비명을 지르려 했다.
습격자가 있다고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힘에 붙들린 것처럼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 어떤 놈이…?!’
의식이 급격히 흐려진다.
태원묵이 할 수 있는 건 눈동자를 굴려서 자신의 목을 그은 자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피부였다.
습격자의 피부는 한 번도 햇빛을 받지 못한 것처럼 하얬다.
하지만 태원묵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눈동자였다.
무저갱(無底坑).
사내의 눈은 한번 떨어지면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구렁텅이 같았다.
어둠을 응축한 듯한 눈동자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소름을 돋게 할 만큼 두려웠다.
텁.
사내는 화살을 붙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원묵이 힘껏 당긴 활의 시위를 잡고, 화살과 함께 천천히 원위치시킨다.
기가 막힌 건 목을 긋는 것부터 시작된 일련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작은 소리도 흘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스르륵.
사내는 태원묵을 눕히자마자 사라졌다.
그리고 건너편 나무 위에 나타났다.
텁. 스각―.
입을 막고, 목을 벤다.
의식이 꺼지는 가운데, 태원묵은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무음의 살법. 들은 적이 있다. 저, 저놈 설마…!’
스르륵.
검은 옷의 사내는 또 사라졌다.
그리고 전방의 나무 위에 나타났다.
텁. 푸욱.
이번에는 심장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을 죽인 사내가 고개를 드는 게 보였다.
“……!”
어쩐 일인지는 몰라도 암습자는 다급해 보였다.
칠흑의 살수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검을 역수로 쥐더니 꺼지듯이 사라졌다.
‘대주님. 조심….’
그걸 끝으로, 태원묵의 의식도 끊겼다.
검이 날아든다.
금광을 두른 장법이 퇴로를 차단했다.
공기를 태워버릴 듯한 기의 와류 앞에서, 마른 비는 투혼을 불살랐다.
『오오오오!』
전사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변방에서 시작해 중원까지.
영웅호걸들이 명멸하는 강호에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자, 얼마나 되겠는가.
약관의 나이, 불과 사 년 만에 그 위업을 달성한 자가 여기에 있다.
하늘의 빛을 담은 기운이 불타오르니, 중원 최강을 논하는 자도 그 빛을 쉽게 꺼뜨리지 못했다.
“애송이가!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할 셈이냐!”
농밀한 기파에 대기가 일그러지고, 격돌로 인한 충격파가 지형을 뒤바꿨다.
변방 중의 변방.
운남의 한복판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결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쩡! 쩌저정! 콰캉!
백열갑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귀청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팔꿈치와 손바닥이 충돌하고, 자신의 간격을 잡기 위한 보법 싸움이 이어졌다.
끊어치는 각법이 운종학을 위협하자, 검이 휘어지며 마른 비의 다리를 노렸다.
올려 친 손바닥이 검을 걷어내는 동시에 자연기를 머금은 등판이 공간을 밀어냈다.
“막상막하…!”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정도맹 무인들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둘의 결전을 지켜봤다.
“십좌……. 명왕(明王)의 싸움을 본 적이 있다……. 단언컨대 이 정도는 아니었어…!”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멀찍이 서 있는 자가 그 말을 받았다.
“고검. 여 대협께서 살아계실 때 그분의 검을 견식했지. 자네 말이 맞아…….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어.”
협검, 패군, 천검.
그 셋은 십좌에서도 특출하다는 말.
운종학이 허언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체계적인 무공도 없는 야만 부족이잖아?”
“그보다 놀라운 건 나이다. 수왕과 맹주님은 사십 년 이상 차이가 나. 그런데 어떻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자신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저런 괴물과 척을 졌는데, 만약 살아남는다면?
“……맹주님의 말씀이 맞아. 무조건 죽여야 해. 수왕이 더 성장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공포는 위기를 불러온다.
그리고 위기는 ‘사소한’ 일을 눈감게 한다.
현무대가 결투에 개입했을 때, 누구도 반발하지 않은 이유였다.
쾅―!
운종학의 일격을 튕겨낸 마른 비가 전진할 때였다.
목숨을 건 돌진은 운종학의 방어에 균열을 냈고, 그건 승부를 걸 시점이 도래했다는 뜻이다.
마른 비의 신경은 온통 운종학에게 쏠려 있었다.
퍼억!
“어?”
주먹을 뻗으려던 마른 비가 주춤했다.
어깨에 전해지는 둔중한 감각.
먼저 화살을 맞았던 곳과 다른 쪽 어깨였다.
쐐애액― 쐑― 쾌액!
연달아 날아든 화살이 목숨을 위협했다.
마른 비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걸렸구나.”
검이 쏟아진다.
하늘을 가르며 날아드는 검격은 무지막지한 힘을 담고 있었다.
백열갑을 들어 올리던 마른 비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걸 느꼈다.
‘아…!’
양어깨와 허벅지에 입은 부상.
항상 뜻대로 움직여 주던 육체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른 비를 배신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결투를 방해받은 게 억울하다.
싸우면 싸울수록 무언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새로운 경지가 열릴 것 같은데.
중원 최강자를 꺾을 줄 알았는데!
최강의 자리가 탐나는 건 아니었다.
마른 비의 마음이 아픈 건 식구들 때문이었다.
‘미안해, 다들. 꼭 살아남아.’
마른 비는 다리에 힘을 주며 하늘을 뒤덮은 기운을 똑바로 바라봤다.
스아악―.
검은 바람이 불어온 건 그때였다.
뭉클거리는 어둠이 마른 비의 앞에 솟아났다.
새카만 기운을 뿌리는 검 두 자루가 운종학의 검을 막아섰다.
투쾅! 끼기기긱―!
막는 동시에 흘린다.
천하팔대신병의 하나인 용형제왕검(龍形帝王劍)이 비탈을 달리듯 미끄러졌다.
영강기(影罡氣).
지옥을 평정하고 돌아온 남자의 절기가 운종학의 일격을 차단했다.
“이게 웬?!”
운종학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건 나름 괜찮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의 가슴이 벅차오른 건 오랜만에 보는 친구 때문이었다.
“영이?! 너, 너 어떻게 여기에?”
사영.
황성 침공을 위해 떠났던 남자가 마른 비의 위기를 듣고 달려왔다.
소교주에게 듣기로 사영은 생사가 오가는 중상을 입었고, 겨우 회복한 뒤엔 무칼리와의 싸움을 도왔다고 했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모종의 임무를 위해 신강으로 떠났다고 했는데…….
‘그간 무슨 일을 겪은 거지? 기운이 훨씬 농밀해졌어!’
몸 주위에서 이글거리는 어둠.
사영은 마치 어둠의 가호를 받는 듯했다.
마른 비가 그렇듯 사영 또한 몰라보게 강해져 있었다.
“오랜만이다, 비아야.”
사영이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우린 왜 만날 때마다 쫓기고 있지? 대체 몇 놈이냐, 이게?”
맹주의 일격을 받아낸 존재.
사영은 경악하는 정파인들을 둘러봤다.
“저번엔 신교였는데, 이번엔 정파의 떨거지들인가? 힘 좀 쓴다는 세력과는 전부 한판 붙는군. 우리 팔자는 왜 이런 거냐.”
사영은 많은 게 변해 있었다.
말투도, 분위기도.
한결 부드럽고 여유로워졌다.
사영은 마른 비의 심정을 눈치챈 듯 미소 지었다.
“네 덕분이다, 비아야. 네가 환마와 비마에게서 구해준 덕분에 나를 옭아맸던 과거를 청산할 수 있었어.”
담담하게 말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는 수라장을 헤쳐 왔으리라.
그의 출신을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서 수다라니? 감히 본좌를 앞에 두고도…….”
운종학이 노기 어린 눈으로 사영을 노려봤다.
황성 침공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황제가 공인한 천하제일살수.
그의 정체를 알았다면 난리가 났으리라.
하지만 여기에 사영의 얼굴을 아는 자는 없었다.
‘절대 만만한 놈이 아냐. 뭐 하는 놈이지?’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마음속 심원한 공포를 건드리는 기운.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마기(魔氣)를 지닌 게 분명했다.
“마교의 주구인가? 설마 네놈들도 금광을 노리는 것이냐?”
운종학이 이를 깨물었다.
이 시점에 마교가 개입한다면 완전히 일이 틀어진다.
운종학으로선 마교도가 순수한 의리로 마른 비를 돕기 위해 왔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사영은 뭔 개소리냐는 얼굴이었다.
“금광? 갑자기 웬…. 아…!”
그러다가 떠올렸다.
만금당에서 들은 전쟁의 내막을.
마른 비를 찾기 위해 들른 그곳에서 금복인이 대략적인 상황을 알려준 것이다.
“한심한 놈들. 정파를 대표한다는 놈들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건가?”
사영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중원 전체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재물에 눈이 멀어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당장 돌아가라. 그리고 전쟁을 준비해.”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운종학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마라. 마교의 쓰레기가…. 그런 말에 흔들릴 것 같으냐?”
운종학이 손을 들자, 주작대가 포위망을 좁혔다.
호위들이 달려 나와 운종학을 둘러싸고, 장로들이 앞으로 나서서 검을 겨눴다.
원거리에서 현무대가 활을 들어 올리니, 빠져나갈 구멍이 완전히 차단돼 버렸다.
사영의 정체를 모르는 운종학은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척 보니 정파의 수장쯤 되는 것 같은데……. 멍청한 데다 지닌 힘에 비해 더럽게 소심하구나.”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
운종학의 얼굴이 벌게졌지만, 사영은 관심 없었다.
그는 마른 비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어깨를 붙잡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비아야. 일단은 여길 벗어나자.”
“벗어나자고? 어떻게?”
사영은 빠르게 말했다.
“내공으로 몸을 감싸라. 그리고 눈을 꽉 감아.”
“……?”
마른 비는 의아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눈을 감는 순간,
후우욱―.
이질적인 기운이 둘을 뒤덮었다.
그리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 전해졌다.
「눈을 뜨지 마라. 위험할 수도 있어.」
그건 마치 또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체중이 사라지며, 사지가 따로 노는 것 같다.
하늘로 붕 떠오르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공간(我空間).
마른 비는 사영이 주원장을 습격할 때 선보였던 그만의 차원에 들어와 있었다.
후아악―.
비슷한 소리가 또 들렸다.
몸의 감각이 돌아오고, 날아갈 뻔한 의식이 제자리를 찾는다.
마른 비가 육신의 제어를 되찾은 순간!
푸화아악―!
뜨거운 액체가 마른 비를 덮쳤다.
“눈을 떠라, 비아야.”
거기엔 핏물을 뒤집어쓴 사영이 있었다.
마른 비를 적신 건 적의 피였다.
뭘 어떻게 한 건지 둘은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고, 사영이 아공간에서 나오며 주위의 적을 절단 낸 게 분명했다.
“뭐, 뭐냐?! 갑자기 사라지더니 저기에 나타나?!”
적들에게 가려진 뒤편.
유인화가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그건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뛸 준비 됐나?”
칠흑의 살수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마른 비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얼마든지. 오랜만에 손 한번 맞춰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