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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50화 (450/463)

450화

번갯불이 터지고, 와족의 기예가 피의 길을 연다.

백열갑을 앞세운 마른 비는 철갑으로 무장한 중전차를 보는 것 같았다.

『오오오오!』

중원에서 나름대로 고수라 불리는 자들이 손도 못 쓰고 허물어졌다.

수왕의 돌격은 전의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큼 강렬했다.

푹! 푸푹! 스거걱! 퀴악!

마른 비가 전차라면, 사영은 그 뒤를 따르는 칼이었다.

적들은 어떻게 죽는지도 몰랐다.

마른 비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새카만 검이 급소를 긋고 지나갔다.

주원장과 카안을 노렸던 살수.

무림 역사상 제국의 정점 두 명에게 칼을 들이댄 건 사영이 유일하리라.

그의 솜씨는 천하제일살수란 칭호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히이익! 문주님, 살려…!”

“못 당합니다! 이런 걸 어떻게… 커억!”

“뒤로 물러나라! 놈들에게 붙지 마! 눈 깜짝할 사이에 살해당한다!!”

농부의 낫질에 두 동강 나는 벼를 보는 듯했다.

마른 비와 사영은 정도맹 무인들을 박살 내며 퇴로를 열었다.

‘훨씬 수월해!’

마른 비가 사영을 힐끗 쳐다봤다.

적의 공격이 분산되고, 내 빈틈은 메워진다.

적들은 자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동료 한 명이 더해졌을 뿐인데 이렇게 다르다.

이래서 무림인들이 무리를 짓고, 세력을 키우는 것이다.

사영 또한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몸을 훤히 드러내고도 쓰러지지 않아. 적을 정면에서 깨부순다. 비아가 저렇게 시선을 끌어주니 검을 찔러 넣기가 편해!’

철벽같은 방어와 적의 수비를 통째로 허무는 힘.

동물적인 전투 감각은 또 어떤가.

영술을 낱낱이 파훼한 건 마른 비가 처음이었다.

주원장을 암습할 때도 느꼈지만, 저런 인간이 달려들면 기가 질릴 수밖에 없다.

‘최고의 조합이군.’

뚜렷한 개성을 지닌 두 사람이 모이니 이처럼 강력하다.

포위를 당한 건 마른 비와 사영이지만, 오히려 그 둘이 정도맹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쐐새색―!

허나 그대로 무너질 리가 없다.

현무대가 저격을 시작하자 마른 비의 돌진이 늦춰졌다.

“큭…!”

마른 비가 화살을 튕겨내고 어깨를 감싸 쥐었다.

조금 나아지는 듯했던 허벅지도 운종학과 싸우고 나니 더 묵직해진 느낌이었다.

“저놈들이 문제군.”

사영이 멀리 있는 궁수들을 쳐다볼 때였다.

파라라락―!

부적들이 날아오더니 마른 비와 사영을 둘러쌌다.

중력이 가중되며 두 사람을 짓눌렀다.

모산파가 중압부를 발동한 것이다.

“으윽! 이놈들이 또…!”

마른 비가 허공에 뜬 부적들을 올려다봤다.

사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술력?! 온갖 잡놈들을 다 끌고 왔구나! 비아 너, 이런 놈들을 상대로 혼자서 어떻게 버틴 거냐?”

후와아악―!

후방에서 무시무시한 투기가 치솟았다.

운종학과 주작대가 따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유인화가 아군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게 들렸다.

“비켜라! 걸리적거린단 말이다! 당장 길을 열엇!”

사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마른 비를 돌아보더니 검을 꾹 움켜쥐었다.

“안 되겠어. 아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대로는 결국 따라잡히고 말 거야.”

마른 비의 부상이 문제였다.

그리고 술력을 다루는 사영은 마른 비가 싸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전투화장의 시간이 다해가는 것이다.

“뛰어라, 비아야. 쉽지 않겠지만 길을 뚫어. 그리고 포위망을 탈출하는 거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혼자 가라고?”

사영은 몸을 돌려서 운종학을 보며 대꾸했다.

“이대로 가면 둘 다 잡힌다. 내가 저자를 붙잡아 놓겠어. 그리고 저기 있는 활을 든 놈들….”

사영의 눈길이 향한 건 현무대의 궁수들이었다.

“싸움이든 도주든 가장 골치 아픈 건 궁수들이야. 저놈들만은 내가 반드시 정리하마.”

마른 비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아무리 너라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널 두고 갈 순 없다고.

사영은 구구절절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다.

“잊은 거냐? 내가 시위군단과 케식의 호위를 뚫고 카안의 코앞까지 접근했다는걸.”

황성의 삼엄한 경비에 비하면 여길 헤집는 건 문제도 아니다.

사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술력이 깨지면 달려라. 그리고 살아남는 거야. 결국 네가 이기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후우욱―.

사영의 몸이 꺼지듯 사라졌다.

수십 년 전, 그의 사부가 천산으로 진격하는 정도맹의 발길을 붙들었듯.

당시 천하제일검이었던 전대 맹주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것처럼.

마교 최강 살수의 전인이 기동을 시작했다.

스르륵― 푹.

스륵― 푸푹.

사영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운종학에게 향하는 길목에 있는 무인들이 심장을 움켜쥐며 거꾸러졌다.

“뭐냐! 뭐가 어떻게 된…?!”

정도맹의 수뇌부가 술렁였다.

적은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다.

한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군만 연달아 죽어나갈 뿐이었다.

“그림자…! 발밑을 조심해라! 그림자에서 검이 튀어 나온다!”

사영의 비기를 가장 먼저 간파한 건 운종학이었다.

그리고 그는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들어본 적 있다! 그림자를 이용하는 무음의 살법! 이, 이놈 설마 음살(陰殺)의…?!”

“사부님을 아나?”

“……!”

서늘한 음성이 지근거리에서 들렸다.

운종학은 눈을 번쩍 뜨며 검을 휘둘렀다.

“카아앗!”

쩌엉―!

암흑의 벽이 운종학의 검을 가로막았다.

마른 비가 깨부쉈던 영벽(影壁).

그 강고함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아는 이걸 깨뜨렸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넌 절대 비아를 이길 수 없다.”

운종학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마른 비를 놓쳤을 때부터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개소리하지 마라! 음살이 살아 돌아오더라도 날 죽일 순 없느니라! 하물며 너 따위가…!”

용형제왕검에서 금빛 강기가 치솟았다.

힘을 집중한 운종학은 그대로 영벽을 깨뜨려 버렸다.

하지만 사영은 거기에 없었다.

스걱! 스각!

어느새 측면에서 솟아난 사영이 주작대원 두 명의 목을 그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은신술이었다.

“사부님을 만나면 넌 비명도 못 지르고 황천으로 갈 거다. 그리고 누가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했지? 네 희망사항인가?”

“……!”

생각해보면 전인이 나타났다는 건 음살이 건재하다는 뜻이다.

등골이 오싹해질 일이며,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살아 있다고? 음살이?! 말도 안 된다! 그럼 나이가…!”

“좋을 대로 생각해라. 잘난 개방 놈들에게 알아봐 달라고 하던지.”

사영은 애매모호한 말을 남긴 채 멀어졌다.

운종학은 그것이 자신을 흔들려는 격장지계라고 결론지었다.

사영이 무엇을 노리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작대! 반전하라! 놈이 모산파에게 간다!”

무인들이야 얼마든지 잃어도 상관없다.

대체할 병력이 넘쳐나니까.

하지만 모산파는 다르다.

그들은 귀하디 귀한 술사이며, 마른 비와 와족을 잡기 위한 비장의 패이기 때문이다.

주작대도 그걸 알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뛰쳐나갔다.

운종학도 경공을 펼쳐서 사영의 뒤를 쫓았다.

“걱정 마십시오, 맹주! 놈이 움직일 때부터 요격을 준비했소이다!”

융중진인은 대비하고 있었다.

마른 비를 가장 곤란하게 하는 게 자신들과 현무대였기에 사영이 이리로 올 거란 걸 예상했기 때문이다.

“모산의 제자들이여! 지금이다! 술력을 불어넣어라!”

사영이 다가올 경로에 부적들이 뿌려졌다.

마른 비의 일체화를 간파했던 탐지부.

범위 내에 있는 생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술법이 사영의 기척을 더듬었다.

하지만….

“어, 없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모산파를 믿고 공격을 준비하던 무인들이 넋을 놓았다.

창을 집어 던지려던 주작대도 제자리에 선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나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영술이 탐지부 따위에 깨질 수준이었다면 음살의 명성도 없었을 테니까.

“하나같이 멍청하군. 신교의 마인들에 비하면 형편없어.”

스가각!

모산파 도사 다섯 명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사영은 그대로 달려들며 쌍검을 휘둘렀다.

“히, 히이익!”

네 명의 목이 또 날아갔다.

모산파가 기겁을 하며 도망치자, 중압부의 술력이 흩어져 버렸다.

「지금이다! 달려라, 비아야!」

사영이 전음을 터뜨리고, 마른 비가 주먹을 꽉 쥐었다.

사영의 실력을 본 마른 비는 자신이 빠져나가는 게 친구를 돕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고마워, 영아! 너도 바로 빠져나가! 이딴 놈들에게 잡히면 가만 안 둘 거야!』

쾅!

마른 비는 주저하지 않고 돌파를 감행했다.

운종학의 고개가 마른 비 쪽으로 돌아갔다.

“장로들이여! 병력을 이끌고 수왕을 쫓으시오! 부상을 입었고, 힘이 다했으니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을 것이야!”

운종학은 주작대와 현무대만 남기고 모산파를 포함한 병력을 전부 딸려 보냈다.

숫자가 많을수록 그림자도 많아지며, 그게 사영을 유리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자신의 검을 받아낸 것도 그렇고, 눈앞에 있는 살수는 모든 면에서 상식을 뒤집는 놈이었다.

“마교의 쓰레기가 여러모로 피곤하게 하는구나.”

미리 깔아놓은 안배가 있으니 수왕을 잡는 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운종학의 신경을 건드는 건 본진을 제집처럼 휘젓는 사영이었다.

실력을 보건대 자신이 아니면 잡을 수 없는 놈이며, 끊어내지 않으면 집요하게 쫓아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교가 왜 수왕을 돕는 거냐? 금광의 일부를 양도받기로 한 건가?”

운종학은 여전히 탐욕과 편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사영은 같잖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은인이다. 비아는 내 목숨과 삶을 구했지. 친구를 위해 싸우는 게 이상한가?”

사영의 과거를 아는 자라면 놀라 자빠질 말이었다.

운종학은 여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돌아가서 전쟁을 준비해라.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말고.”

먹힐 리 없는 말이었다.

운종학이 용형제왕검을 곧추세웠다.

“개소리는 무덤에서 하거라.”

칠흑의 살수와 천검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빠바바박!

전진, 또 전진!

마른 비는 포위망을 돌파하며 남서쪽을 향해 달렸다.

사영이 북쪽에 포진한 현무대를 정리했고, 남은 궁수들도 전부 운종학을 돕고 있었기에 전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헉,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전투화장의 시간이 다해간다는 징조였다.

마른 비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고, 압도적인 속도로 적들을 떨굴 수 있었다.

“큭…!”

하지만 결국,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계속된 싸움과 도주.

결정적으로 운종학과의 일전이 급속도로 기력을 갉아먹은 것이다.

‘계속 가야 해!’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조금이라도 체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투화장이 끝났음에도 버티고 서 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이리 와! 날 태워줘!』

짐승의 기척을 느낀 마른 비가 외쳤다.

야수 친화에 이끌려 나타난 건 커다란 덩치의 표범이었다.

“가르릉….”

마른 비의 눈치를 보던 표범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러곤 머리를 비비더니 등을 내밀었다.

마른 비가 업히자 표범은 쏜살같이 달렸다.

‘거리를 벌려놨지만… 머지않아 따라잡힐 거야.’

별비라면 자신을 태우고도 발자국이 남지 않게 달릴 수 있다.

그러면 적에게 혼란을 줄 수 있을 텐데.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별비는 애초에 따라잡히지 않을 거다.

운종학 정도가 아니라면.

하지만 야생의 표범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무리였다.

‘달려줘. 더 빨리…!’

어디쯤 온 것인가.

정신없이 달리느라 지형을 가늠할 겨를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 마른 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거의 다 왔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콰앙―!

붕 떠 오르는 몸.

난데없는 충격에 마른 비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하늘로 날아오른 마른 비는 표범의 몸이 으스러지는 걸 보았다.

‘아, 안 돼!’

마른 비는 땅바닥을 구른 뒤에 가까스로 일어났다.

곧이어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이쪽일 줄 알았다. 역시 맹주님의 혜안은 탁월하다니까?”

백호의 문양이 그려진 무복을 입은 남자였다.

도를 뻗은 걸로 볼 때, 그자가 도기를 날린 게 분명했다.

혁운상에 조금 못 미치고, 유인화와 비슷한 기운.

개방 총타에 압박을 가한 뒤 운남에 내려온 백호대주 경휘염이었다.

원래 백호대는 창룡검대를 도우라는 명을 받았으나, 혁운상이 쓰러진 걸 듣고는 북상했다.

그리고 마른 비가 지날 거라 예상되는 길목을 틀어막은 것이다.

“이건 뭐, 반 시체잖아? 수왕, 수왕 하도 꼴값들을 떨길래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겨우 이 정도였나?”

경휘염이 이죽거렸다.

다른 대주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향.

개방에 파견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운종학의 말을 가장 잘 듣는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크큭. 가만 놔둬도 곧 자빠지겠군. 왕이란 놈이 뭐 이리 맥아리가 없어?”

경휘염이 건들대며 다가왔다.

하지만 말과 달리 마른 비의 사정권 바깥에 멈춰서 빤히 지켜봤다.

혹시나 힘이 남아 있을까 봐 조심하는 것이다.

마른 비의 상태를 살피던 그가 씨익 웃었다.

“흐흐. 꼬맹아. 우리 일대일 한판 뜰까? 시원하게 목을 날려주마.”

무슨 생각인지는 뻔했다.

명성 자자한 수왕의 목을 쳐서 이름을 날리고 싶은 거겠지.

경휘염에게 마른 비가 탈진했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후우……. 이제는 별 게 다 깝죽대네.”

약한 모습을 보일 리 없다.

마른 비는 뼛속까지 전사였고, 상대가 이런 놈이라면 더더욱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들어와. 표범의 복수를 해줄 테니까.”

마른 비가 비참하게 죽은 표범을 보며 이를 깨물 때였다.

난데없이 운남의 경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질펀한 욕이 쏟아졌다.

“누구 목을 날려? 어디 시벌, 면상부터 좆밥같이 생긴 게 까부작대기는? 얌마, 너 이리와 봐.”

누군지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동네 건달처럼 걸어온 철중구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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