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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52화 (452/463)

452화

* * *

“대장로님! 이쪽입니다! 표범의 발자국이 이리로 이어져 있어요!”

추적을 맡은 무인이 외쳤다.

정도맹의 대장로 송유일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허…. 참으로 답답하구나…….’

군자검(君子劍).

칠십 평생을 강호에서 구른 뒤에 남은 별호다.

송유일은 그 별호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극심한 회의에 휩싸여 있었다.

불의한 일에 가담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송유일을 더욱 울적하게 하는 건 발을 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운남에 내려오는 게 아니었다. 어떤 핑계를 대든 빠졌어야 했어.’

정도맹 군사회의에서 파병이 부결됐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허나 수왕은 전격적인 급습으로 사천 무림을 무너뜨렸고, 그건 맹주에게 남하할 빌미를 주었다.

‘……아니야. 수왕이 사천을 공격하지 않았더라도 맹주는 움직였을 터.’

뒤늦게 눈치챈 것이지만, 맹주는 처음부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배제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야 금광을 온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있으니까.

파병이 부결될 것을 알았고, 가결되었다면 어떻게든 다시 뒤집어놨을 거다.

일련의 과정을 계획한 건 총군사 제갈준이었다.

‘군사, 무슨 약점을 잡힌 거요? 그대는 우리처럼 오갈 데 없는 처지도 아닐 텐데.’

송유일의 곁에는 정도맹의 장로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침울한 표정이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뿐, 송유일은 장로들이 자신과 비슷한 심정이란 걸 깨달았다.

‘실수였어. 애초에 정도맹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무력과 명망은 뛰어나지만, 연고나 세력이 없는 무인들.

노년에 이르러 몸을 의탁할 곳을 찾던 자들.

운종학은 맹주의 자리에 오른 뒤에 그런 사람들만을 모아 원로원을 조직했다.

‘누가 알았을까. 맹주의 속내를.’

처음 몇 년은 좋았다.

넉넉한 자금과 편히 쉴 곳.

후배들의 선망 어린 시선과 극진한 대우.

수십 년간 강호에서 구르며, 의협의 길을 걸은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 모든 게 미끼였을 줄이야.’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서서히.

장로들은 권력과 안락에 물들었다.

그들은 평생토록 ‘배경’이 없었고, ‘금력’과 ‘권력’을 쥐어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힘’에 취해 있었다.

그건 한 번 맛보면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았다.

‘협검. 아니, 악 대협. 그대가 옳았소. 이래서 맹주의 제의에 끝까지 응하지 않은 것이었구려.’

장로들은 원로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악경과 같은 삶을 산 이들이다.

약자를 지켰고, 원에 대항했으며, 협의의 정신을 지켜왔다.

정파의 존경받는 협객들.

하지만 맹주가 준비한 올가미는 은밀한 동시에 치밀했다.

타락은 한순간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것을. 그 당연한 이치를 왜 간과했을까…….’

맹주는 작은 일부터 맡겨왔다.

언제나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밀며.

받은 게 있으니 거절할 수 없다.

현재의 평온함을 유지하다가 존경받는 어른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말년에 겨우 얻은 것들을 놓치기 싫었다.

‘노림수였어. 우리를 뜻대로 움직이기 위한…!’

어느 날, 주어진 임무를 처리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잘못된 길에 발을 들였다는걸.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맹주가 모는 배에 올라타 있었다.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었어….’

장로들은 운남에 내려오는 걸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자 맹주는 그간 수행한 임무들의 불의함과, ‘받아 챙긴’ 돈을 밝혀도 되겠냐고 물었다.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일생일대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원시부족의 공동묘……. 어쩌자고 이런 일에 끼어들었단 말인가. 심지어 야수족과 싸우게 될 줄이야…. 절망적인 전력 차에도 도망가지 않고 덤비다니….’

장로들은 야수족이 도망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승산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싸웠다.

그리고 선언했던 대로 운남에 침입한 자들을 모조리 척살했다.

‘대체 몇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인지…….’

사백 명 정도 되는 병력이 송유일을 따르고 있었다.

비석을 넘을 때만 해도 천삼백 명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줄은 것인가.

맹주와 함께 있는 주작대와 현무대를 합쳐도 팔백이 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오기 전에 죽은 자들까지 합치면, 수왕과 야수족에게 쓰러진 정파인은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다. 일개 부족에게 정사대전 한 개 전선에 맞먹는 타격을 입다니….’

과장이 아니다.

사파가 입은 피해까지 더하면 실제로 그 정도의 사람이 죽었다.

신룡 제갈준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우리의 잘못임이 명백하거늘….’

맹주의 꼭두각시가 돼버렸지만, 송유일은 자아 성찰을 할 정신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지금이라도 내려놓으면…… 그러면….’

이 참담함을 끊어낼 방법은 있다.

힘과 돈, 지위와 명성.

지금껏 누린 것들을 포기하면 된다.

안락함을 버리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밝히면 된다.

손가락질과 비난을 감수하고 정도맹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허나….

‘허허……. 참으로 어렵구나. 맹주를 거역할 자신이 없다. 이 나이에 정도맹을 나가서 욕을 먹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아….’

평생토록 쌓아 올린 명성을 잃는 게 두렵다.

늘그막에 겨우 얻은 평온.

그 안락함을 버리기 힘들다.

송유일이 번뇌와 회한에 괴로워하면서도 발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였다.

“……대장로님?”

추적을 담당한 무인이 송유일을 불렀다.

그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 허흠! 계속 가라! 수왕은 빈사 상태나 다름없다. 절대 놓쳐선 안 돼!”

결국, 송유일은 ‘선택’했다.

상념에 빠졌던 장로들이 고개를 들었다.

진형을 이탈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콰차차창! 쩌엉―!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인간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귓전에 박힌다.

송유일은 걸음을 멈췄고, 피칠갑을 한 채 도를 휘두르는 사내를 보았다.

“크하하! 고작 이 정도냐! 이건 뭐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 새끼잖아?!”

보는 순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운.

사내는 패군의 성명절기라는 적사자기를 뿜어냈다.

“투도?! 저자가 수왕을 빼돌린 건가…!”

철중구가 이끄는 투견대는 백호대를 압살하고 있었다.

경휘염은 부대주와 함께 철중구를 상대했지만, 밀리는 게 한눈에 보인다.

저대로 두면 백호대가 몰살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수왕은?’

송유일이 주변을 살폈다.

수왕이 타고 이동하던 표범이 죽어 있고, 발자국이 앞쪽으로 이어진다.

족적을 숨길 힘도 없는지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크악…! 대장로님! 어서 지원을…!”

경휘염이 살았다는 듯 반색을 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도와달라고 외쳤다.

“우라질. 정도맹의 늙은이들이 몰려왔나?”

이번만큼은 철중구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노인들은 하나하나가 막강한 전력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한꺼번에 덮친다면 도저히 당해낼 방도가 없었다.

‘투견대는 만만치 않다. 저놈들에게 발목이 잡히면 수왕을 놓칠 수도 있어.’

천만다행인 건 정도맹의 표적이 마른 비라는 점이다.

운종학 역시 최우선으로 수왕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명 장로! 부 장로! 모산파 도사 여섯 명과 칠십 명의 병력을 맡기겠소! 백호대를 구해서 따라오시게!”

아슬아슬하지만 그 정도면 투견대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두 명의 초고수와 술법의 지원이 있으니까.

하지만 경휘염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대장로님! 그걸론 불안합니다! 병력을 조금만 더 남겨주십시오!”

경휘염이 꼴사납게 외쳤지만, 그 이상 병력을 뺄 순 없다.

수왕이 워낙 강한 데다 야수족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백호대주!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로님! 그게 아니라 이놈들이 생각보다 강해서…!”

두 명의 장로가 버럭 호통을 쳤다.

경휘염이 우거지상이 될수록 장로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대장로! 우리면 충분하외다! 금방 정리하고 따라가겠소! 수왕을 쫓으시오!”

송유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철중구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카핫! 그게 니들의 ‘선택’이냐? 이도 저도 아니고 영 어중간하구만. 지휘자가 저 모양이면 니들, 다 죽을 거다.”

송유일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달렸다.

‘이 근처에 있다!’

전속력으로 달리길 일 각.

쭉 이어지던 발자국이 사라졌다.

송유일은 마른 비가 따라잡히자 은신을 펼쳤다는 걸 직감했다.

“장문인! 탐지부를…!”

송유일이 외치자, 부적이 하늘을 날았다.

모산파의 탐지부가 일대를 굽어봤다.

“음?!”

융중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과 달리 생기가 너무 많아서 어떤 게 수왕인지를 특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노도사의 눈엔 숲에 숨은 생명체의 위치가 또렷이 보였다.

“내가 가리키는 곳을 닥치는 대로 베시게!”

‘어떤 게 수왕인지 모르니 전부 죽여라.’

도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과격한 지시였다.

융중진인은 이번 기회를 통해 모산파가 비상하길 바랐고, 공을 세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끼잉!”

“컁…!”

애꿎은 동물들이 죽어 나갔다.

삼백이 넘는 정도맹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살생을 거듭했다.

그 순간!

파사삭―!

저 앞에서 구릿빛 동체가 수풀을 뚫고 뛰쳐나갔다.

정도맹 무인들의 얼굴에 희열이 깃들었다.

“찾았다! 수왕이다!”

“기력이 없으니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구나! 쫓아가서 목을 베어라!”

정도맹 무인들이 움직일 때였다.

탐지부를 운용하던 융중진인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헛! 잠깐! 이게 무슨?!”

탐지부가 보여주는 광경.

흑백의 배경에, 힘의 크기에 따라 녹색으로 표시되는 시야에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엄청난 생명력을 지녔는지 커다란 공처럼 보이는 맹수 세 마리가 좌우에서 난입했다.

“뿌오오오!”

“샤라락!”

“푸익, 푸이익…!”

융중진인은 즉각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챘다.

“영수요! 수왕이 부린다는 짐승들이 출현했소!”

전상, 대망, 광서우.

부상을 회복한 녀석들이 휘하의 맹수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하지만 송유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나타날 줄 알았노라.”

금광 앞에서 벌어진 전투.

각성수의 활약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정도맹 추격대는 와족은 물론이고 야수의 습격도 대비하고 있었다.

“세 마리만 조심하면 된다! 장로들이여! 문주들과 함께 영수를 차단하시오!”

칼도 잘 들어가지 않는 것들을 죽이기 위해 힘과 시간을 쓸 필요가 없다.

이건 결국 수왕을 도피시키기 위한 수작이니까.

수장들은 빠르게 지나치며 전상과 광서우의 다리를 베었다.

기어서 움직이는 대망은 집중 공격을 퍼부어 물러서게 했다.

이들은 최정예였고, 대비하고 있는 이상 야수들만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장들이 각성수의 발을 묶자, 정도맹 무인들은 짐승들을 무시하고 마른 비를 쫓았다.

“달려라! 이것들은 우리를 쫓아올 수 없다!”

그럼에도 야수들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고, 집요한 공격에 이삼십 명의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느껴진다! 수왕이 저 앞에 있어!’

야수들의 매복을 큰 피해 없이 돌파한 정도맹은 마침내 마른 비를 마주할 수 있었다.

“훅, 후욱….”

“……!”

정면 십삼 장, 커다란 바위 위.

마른 비 혼자였다면 놀라지 않았으리라.

송유일을 움찔하게 한 건 마른 비의 좌우에 붙어 있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여인과 노인.

그중 독특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스아아악―.

연녹색 기운이 빨려들 듯 스미며 바닥 난 기력과 상처를 치유한다.

주술사로 보이는 여인이 수왕에게 술력을 불어넣었다.

“먹어라. 너를 위해 특수 제작한 단환이다.”

늙수그레한 노인은 동그란 단환을 수왕의 입에 넣고 있었다.

“괴, 괴의?!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여울과 화통달.

와족 유일의 주술사와 천하제일 명의가 수왕의 기력을 북돋웠다.

그 순간 마른 비의 눈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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