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53화 (453/463)

453화

“후우우…….”

바닥을 쳤던 기력이 회복되고, 양어깨에 난 상처가 급속도로 아문다.

허벅지를 뻑뻑하게 했던 통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술력과 의술의 조합.

마른 비는 물이 차오르듯 온몸에 생기가 도는 걸 느꼈다.

“다들 날 놀라게 하려고 작정한 거야? 영이에, 중구에, 할아버지까지……. 더 올 사람 없지?”

마른 비가 웃으며 화통달을 바라봤다.

하지만 화통달은 웃지 못했다.

그는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미안하다, 비아야. 내가 만든 마비산 때문에 너의 가족이….”

화통달은 적색분지에서 와족을 쓰러뜨린 게 마비산이며, 그걸 만든 게 자신이란 걸 알려줬다.

마른 비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랬어?”

마른 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아프게 웃었다.

“의술을 위한 도구……. 할아버지는 그걸로 많은 사람을 구했을 거야. 맞지?”

화통달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도구란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

같은 칼이라도 누군가는 타인을 해치는 데 쓰고, 누군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무공도 그렇지 않나.

당장의 현실만 봐도 정도맹은 탐욕을 위해, 와족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보는데 이렇게 침울한 거구나?”

마른 비가 화통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화통달은 애처로울 만큼 야위어 있었다.

삐쩍 마른 노구를 토닥이며, 마른 비가 말했다.

“힘들어하지 마, 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할아버지의 잘못이 될 수 있겠어. 공지량, 그놈이 나쁜 거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주름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렀다.

머리로는 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걸.

하지만 화통달은 그렇게 간단히 넘길 수 없었다.

와족에 대한 미안함과 지난 삶에 대한 회의가 기력은 물론 의원으로서의 자부심마저 깎아 먹었다.

마른 비의 말을 듣는 순간, 화통달은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멍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화통달에게 있어 그건 구원이었다.

“할아버지. 나도 말할 게 있어.”

“……?”

이젠 오래도록 풀리지 않던 의문을 풀어줄 차례였다.

마른 비는 그가 알아낸 정보를 화통달에게 전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살수가 말했지?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할아버지를 청부했다고.”

마른 비는 화통달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말했다.

“그 사람, 맹주야.”

“……맹주라니? 그게 무슨….”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 정도맹주라고. 천검 운종학. 저놈들을 데리고 온 노인 말이야.”

화통달은 믿기지 않는 듯 멍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떠올렸다.

자신이 죽을 뻔한 운종학을 치료한 적이 있다는걸.

“그, 그럴 리가 없다! 천검은 정파의 하늘….”

“날 믿어, 할아버지. 의뢰를 받은 살막주가 직접 털어놓은 사실이니까.”

충격이 장내를 휩쓸었다.

화통달은 물론이고, 마른 비에게 접근하던 정도맹 인물들까지 얼어붙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왕! 그게 무슨 소린가! 맹주께서 살막에 괴의의 암살을 의뢰했다고?!”

송유일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접근하는 중이었다.

여인과 화통달이 마른 비를 치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왕이 힘을 회복한다?

치가 떨릴 만큼 끔찍한 일이다.

절대 그냥 두어서는 안 되기에 송유일은 한꺼번에 덮칠 참이었다.

허나 충격적인 비사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멈춰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장로님! 믿지 마십시오! 저놈이 회복할 시간을 벌려고 말을 지어내는 겁니다! 당장 공격을…!”

형산파 장문인 목정기였다.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하며 멈췄다.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니 송유일을 비롯한 장로들이 전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자, 장로님들?”

맹주의 실체를 엿본 장로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그들 중 한 명은 맹주의 명을 받고 살막에 의뢰를 넣은 장본인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뿐.

“왜, 왜 동요하시는 겁니까? 맹주께서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목정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장로들의 반응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이야. 증인도 있어. 화산파의 강유와 홍진설. 녹림의 초패. 그들에게 물어보면 증언해줄 거야.”

“철혈검과 옥매화?! 매화검수들이 증인이라고?”

마른 비 덕분에 진시황릉에서 살아나온 자들.

초패가 살막주의 말을 믿은 것과 달리 강유와 홍진설은 반신반의하며 사실 여부를 캐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들은 건 사실이며, 마른 비는 맹주가 청부를 넣었다고 굳게 믿었다.

“말도 안 된다……. 정사마를 막론하고 존경을 보내는 화 선배를 맹주께서….”

목정기가 충격에 입술을 떨 때였다.

“웃기는 소리! 내가 괴의를 죽이기 위해 살인 청부를 넣었다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정도맹 진영이 좌우로 열리며 운종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다들 멈춰 있나 했더니 저런 개소리를 들어주고 있던 건가!”

운종학의 머리는 산발에 가까웠다.

얼굴은 노기에 일그러졌고, 고풍스런 무복은 여기저기가 찢겨 엉망진창이다.

악전고투를 치른 모습.

마른 비는 운종학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벌써 쫓아왔어?! 그럼 영이는?!’

하지만, 곧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운종학의 표정을 보고 사영이 무사하다는 걸 짐작했기 때문이다.

“야만 원숭이가 멋대로 떠들어대는 말에 동요할 줄이야. 잘 알았네. 나에 대한 그대들의 믿음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걸.”

무겁게 내리깔리는 목소리.

정도맹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운종학은 진영을 가로질러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 뒤를 주작대가 뒤따랐다.

유인화는 이를 꾹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른 비는 그걸 보고 사영이 무사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살수……. 황성 침공에 참여했다는 놈이 분명해. 황제가 공인한 천하제일살수.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이토록 애먹일 수 없지.”

사영의 정체를 짐작한 모양이다.

운종학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오는 길에 패군의 개들도 보이더군. 그놈들 때문에 백호대가 전멸했어. 날 보자마자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는데, 네놈만 아니었다면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것이다!”

‘중구! 무사하구나…!’

철중구도 살아남았다.

심지어 백호대와 지원 병력까지 모조리 정리한 듯했다.

“그리고 괴의…….”

운종학이 화통달을 힐끗 쳐다봤다.

화통달도 피하지 않고 운종학을 노려봤다.

마른 비를 신뢰하는 그는 운종학이 자신을 청부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운종학은 화통달이 자신을 노려보는 게 어이가 없는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왜 너 같은 야만인을 사방팔방에서 돕는 거지? 대체 이유가 뭐냔 말이다!”

운종학이 분통을 터뜨렸다.

마른 비는 그가 반쯤 정신이 나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현무대.

위협적인 궁사를 가하던 놈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영이가 궁수들을 처리했구나!’

사영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운종학과 주작대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현무대를 모조리 눕힌 것이다.

영술이 있기에 가능한 일.

극의에 이른 살수만이 이룰 수 있는 위업이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네. 내가 뭐라고 이렇게들 도와주는지.”

마른 비는 여유를 찾았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친구들이 무사한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흐음……. 내가 귀여워서 그런가?”

실없는 농담에, 여울과 화통달이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운종학은 눈을 부릅뜨며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애지중지 키운 전투단 두 개를 잃었다. 네놈의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타격이야. 또 준비한 게 있으면 어디 내놓아 보거라. 모조리 박살을 내줄 테니.”

운종학이 짓씹듯 내뱉을 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죠. 이번엔 저희 차례입니다, 맹주님.”

좌측 숲이 열리며 무인들이 걸어 나왔다.

흰색 무복을 수놓은 봉우리와 구름 문양.

말을 한 건 선두에 있는 청년이었다.

“군사회의 이후 처음 뵙는군요. 점창 장문인 공유립이 인사드립니다.”

공유립이 정중한 예를 담은 포권을 올렸다.

장문인이 됐다 한들 그는 까마득한 후배였고, 무림의 배분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도발적이었으니, 검을 손에 쥔 채로 포권을 올렸기 때문이다.

검집에서 뽑혀 나와 새하얀 날을 드러낸 검을 말이다.

그건 깍듯한 예의와 대비되며 다분히 도전적으로 느껴졌다.

“장문인? 그대가 점창의 수장이 되었다고?”

의외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누굴 장문인으로 선출하건 그건 문파 고유의 권한이니까.

운종학은 공유립이 ‘지금 이 시점’에 자파의 제자들을 끌고 나타났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차례! 차례라고 했나? 자네, 설마 야만인을 지키기 위해 나와 싸우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점창이 하산했다는 보고는 받았다.

수왕을 위해 사도칠문과 싸웠다는 소식도.

한데 자신의 앞을 막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저는 천하의 악인을 아비로 두었죠.”

노기를 드러내는 운종학에게, 공유립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일세의 영웅이 사문의 어른이셨습니다. 제 아비를 제외하면, 저는 한평생 옳은 길을 걸어온 분들을 보며 자랐습니다.”

영웅은 여휘를 말함이요, 옳은 길을 걸은 자들이란 대장로들일 것이다.

악인이 누군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저는 극단적인 두 경우를 모두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선택’하려 합니다.”

공유립은 검 끝을 운종학에게 향했다.

그리고 말했다.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옳다 믿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나는 당신과 싸울 것이오.”

공지량이 그토록 집착했던 ‘모든 것.’

공유립은 아비가 쌓아 올린 것들을 훌훌 내버린 채 마른 비의 편에 섰다.

그것은 새롭게 태어난 점창의 선택이며, 남제(南帝)의 권속에 든 첫 번째 문파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봉검대주! 아니, 장문인…!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겐가? 맹의 기둥 중 하나가, 구파의 일원이 맹주께 검을 겨누겠다고?!”

송유일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자.

무수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지난 삶을 내버린 자.

점창의 ‘선택’이 빛나 보이기에 스스로의 몰골이 더욱 초라하다.

송유일은 필사적으로 공유립을 설득했다.

“사죄드리게, 어서! 그럼 돌이킬 수 있네! 이게 무슨 어리석은 행동인가! 우릴 돕지 않아도 좋아! 그저 못 본 척 옆으로 물러서 있으면…!”

‘이도 저도 아니다.’

송유일이 병력을 운용하는 걸 보며 철중구가 했던 지적이다.

공유립에게 있어 그 어중간함은 뻔뻔한 악행만큼이나 싫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리고 점창은 이미 선택을 했다고.”

정도맹의 앞을 막아서며, 공유립이 말했다.

“당당히 살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정파란 허울을 버리겠소. 그것이 진정한 정파의 정신이며, 그래야 부끄럽지 않다고 믿으니까.”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 이어졌다.

“정도를 벗어난 자들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항명이나 저항으로 여겨진다면… 점창은 오늘부로 구파에서 탈퇴할 것을 천명하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