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도맹 인물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그들이 반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되뇌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송유일이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탈퇴?! 장문인, 방금 구파를 탈퇴한다고 했소?!”
송유일은 어찌나 놀랐는지 입술까지 파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침착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장문인. 그대의 심정을 이해하오. 젊은 혈기에 감정을 앞세워 움직일 수 있지.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하니까.”
송유일은 공유립이 이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평정을 잃은 건 본인인데도 그는 공유립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흥분을 가라앉히시게. 그리고 차분히 생각해 보시오. 장문인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해 보란 말이오.”
정파를 떠받치는 열 개의 기둥, 구파일방.
그들이 무림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정파라면 누구나 그들을 선망하며, 그 자리에 오르길 꿈꾼다.
한데 스스로 구파에서 탈퇴하겠다고?
그건 정도맹에서 나가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배신자로 낙인찍힐 것이오. 가문을 위해 독을 사용한 당가가 어떤 비난을 받았는지 떠올려 보란 말이외다. 이건 당가의 경우와도 비교할 수 없소.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송유일이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댔다.
하지만 공유립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문내 회의를 거쳐서 내린 결정입니다. 제 독단이 아님을 명확히 하지요.”
공유립은 차분했으며,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그래서 송유일은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파 전체가 이런 미친 짓에 동의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송유일은 말문이 막혔고, 그건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끄러움이 큰 만큼 그들은 더 이상 나서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점창이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는 게 놀라울 뿐.
무인들이 웅성대자, 운종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쳐 돌아가는구나! 구파로서의 혜택은 모두 누려놓고,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야만인을 지키기 위해서?!”
용형제왕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천하제일, 만인지상의 자리를 꿈꾸는 남자에게 점창의 결정은 반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뭣들 하는가! 반란분자의 궤변을 듣고만 있을 것이냐! 모조리 참살하여 내게 대항한 놈들의 최후가 어떤지를 똑똑히 알려 줘라!”
‘내게’ 대항한 놈들.
허울 좋은 말을 아무리 늘어놓아도, 그게 운종학의 본심이리라.
맹주의 명이 떨어지자, 정도맹 산하 사백의 병력이 움직였다.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은 그들은 정파의 허리를 떠받치는 정예들이었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청월각, 절검문, 신가장, 철선문, 정의문에 형산파까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의 청년이 걸어 나왔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사내는 봉검대의 문양을 달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확인한 자들이 신음을 흘렸다.
“고검…!”
정사대전에 참가한 자들은 똑똑히 기억한다.
최전선에서 사파의 이름난 고수들을 연달아 격침시킨 신성을.
화살을 쏘는 듯한 찌르기는 독특한 기수식으로부터 시작될지니.
왼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얹어놓은 검으로 표적을 꿰뚫는다.
점창 사일(點蒼射日).
정사대전을 거치며 정파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이라 칭송받는 남자의 절기였다.
“경악스러울 뿐입니다. 정파의 정신을 외치며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이런 짓거리에 동참하다니…….”
여규는 각파의 수장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곤 말했다.
“쪽팔린 줄을 알아야지. 개새끼들이.”
“뭐, 뭐라?!”
여규의 욕설은 정파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여휘의 아들이란 걸 증명하듯 고검은 항상 겸손하고 예의가 발랐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으니…….
사형제들의 따돌림과 구타를 견디며, 악으로 깡으로 버텼던 어린 시절.
정파의 표본처럼 번듯하게 자랐으나, 여규의 내면에는 철중구 못지않은 거친 기질이 숨어 있다는 걸 말이다.
“금광을 보유한 게 점창이었어도 이랬을까? 아니, 이왕 가정하는 거 소림이나 무당이라고 치자. 그래도 니들이 눈깔이 벌게져서 우르르 몰려 내려왔겠냐고.”
여규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마른 비가 겪은 일이 자신의 일처럼 마음 아팠고, 친구를 핍박하는 놈들이 원수처럼 미웠다.
사문이 결단을 내린 이상, 여규를 옭아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못했겠지. 탐욕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찍소리도 못했을 거야. 왜? 니들보다 강하니까. 한족이고, 구파니까!”
시종일관 침착한 공유립과 달리, 여규는 여과 없이 감정을 토해냈다.
그러곤 단정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너희 같은 놈들이 정파를 자처해? 개가 웃겠다. 나가 뒈져. 이 쓰레기들아.”
철중구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막말신공이다.
참지 못한 무인들이 날아올랐지만….
퍼퍼퍽!
보이지도 않는 쾌검이 그들의 어깨를 꿰뚫었다.
“지, 진짜 찔렀어! 점창이 정말로 우릴…!”
여규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가짜로 찔러?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여규는 고개를 까닥이며 뒤편을 가리켰다.
“비아한테 가려면 우릴 넘어야 할 거야.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자신감 넘치는 표정.
여규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지금의 봉검대는 같은 숫자면 화산한테도 안 밀려. 매화검수가 와도 우릴 꺾을 순 없다고.”
구파의 예검.
정사대전 중 봉검대에 붙은 별명이다.
삼십 명에 불과했지만, 봉검대는 문자 그대로 최정예였고, 그건 운검대도 마찬가지였다.
“덤벼. 정신 나간 새끼들아.”
그게 신호였다.
피를 본 정도맹 무인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여규가 숲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봉검대! 파봉진(破峰陣)! 개(開)!”
어느새 앞으로 나선 원승도 운검대를 돌진시켰다.
“수운진(囚雲陣)을 발동하라! 봉검대와 함께 장문인을 보좌한다!”
사 년 전, 와족을 몰아쳤던 점창 최강의 군진이다.
봉검대와 운검대가 병기를 뽑는 순간, 정도맹의 전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컥…!”
“아아악!”
이것이다.
이게 바로 구파의 힘이다!
적들도 중견 문파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라고 하나,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호검대! 풍검대! 피를 보는 걸 주저하지 마라! 여기서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수왕을 지킨다!”
총합 이백이십.
사도칠문과의 전투로 사상자를 제외하고 백팔십 명이 달려왔지만, 사백 명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아니, 점창은 오히려 압도적인 힘으로 정도맹을 밀어붙였다.
“정녕 이것이 점창의 선택인가!”
송유일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상잔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겨야만 한다.
정도맹 원로원 십여 명이 일제히 검을 들었다.
“우리가 좌측을 맡겠소! 각파의 수장들은 우측을 차단하시게!”
검광이 난무하고, 피와 비명이 메아리친다.
점창은 구파의 명성에 걸맞은 힘을 선보였으나, 노고수들이 개입하자 상황은 역전됐다.
“큭…!”
어쩔 수 없는 내력의 차이.
점창은 강했지만, 그들에게는 전황을 뒤엎을 만한 초고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야아아!”
둥그런 검막이 여규를 뒤덮었다.
하나하나가 찌르기로 이루어진 비기가 장로들의 합공을 튕겨냈다.
콰우웅―!
광전섬막(光箭閃膜).
무한에 가까운 빛의 화살이 뻗어 나가자, 장로 두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백수교의 수인들을 몰살했던 공방일체의 비기는 더욱 강력해져 있었다.
허나…!
추아악! 스각! 피슛―!
홀로 장로들의 합공을 감당하는 건 무리다.
힘을 쏟아낸 여규는 빈틈을 드러냈고, 검에 베인 채 땅을 굴렀다.
두 명의 장로를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차아앗!”
공유립도, 원승도 적의 수장들에게 둘러싸였다.
초고수의 부족.
전세가 뒤집힌 이유였다.
점창 제자들이 힘겨워할 때!
퍼억! 퍽! 퍼억―!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소리 없이 다가와 가슴을 꿰뚫는 수격.
적의 뒤통수를 후려친 건 어스름이었다.
와족과 점창을 가리지 않고 경외하는 노인도 있었다.
“이럴까 봐 같이 가자고 했거늘. 아, 그랬다면 비아가 위험했겠구먼.”
빠바바박!
얼굴이 함몰된 적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유령처럼 나타난 그믐이 어스름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역시 쓸 만하군. 간만에 손 한번 맞춰보자꾸나.”
스승과 제자.
전대와 당대의 검은 수리 수장이 열세에 처한 점창을 돕기 위해 난입했다.
그믐은 고마움을 담은 눈길로 공유립을 쳐다봤다.
“센 놈들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마음껏 싸우시게. 맹주라는 놈만 빼면 나머진 별거 아니야.”
와족의 전설.
정도맹 장로들로는 그믐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르신. 저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공유립이 우려를 표할 때였다.
“삐아아악―!”
하늘에서 어둠이 내리꽂혔다.
어둔 날개는 장로 한 명을 낚아챈 뒤 하늘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피의 비가 내리자, 그믐이 미간을 찌푸렸다.
“염려 말게. 저 무식한 녀석도 있으니까.”
“오오오오!”
바야흐로 야생의 전사들이 당도했다.
우측 숲이 흔들리며 와족과 반려수가 쏟아져 나왔다.
“와족! 돌격하라! 최후의 일전이다! 전부 쓸어버려!”
전신화장이 빛을 발하고, 야수의 포효가 전의를 꺾는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돌격에 정도맹 무인들이 하얗게 질렸다.
“매, 맹주님! 너무 강합니다! 지원을…!”
허나, 운종학은 침착했다.
그는 와족 전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른 비만을 노려봤다.
“주작대. 응전하라. 짐승까지 합쳐 봐야 팔십이 되지 않는다. 책임지고 쓸어버리도록.”
마지막 남은 맹주 직속의 부대.
이러려고 주작대를 아껴둔 것이다.
하지만 의문인 건 그들만으로는 와족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파라라락―!
와족과 주작대가 충돌하기 직전, 수백 장의 부적이 하늘을 날았다.
허공을 빼곡히 메운 그것들은 기이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봉력부(封力符)! 술력을 봉인하라!”
바람에 쓸리듯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전신화장이 발하던 빛이 깜빡이다가 툭 꺼졌다.
“어, 어엇?! 힘이…!”
운종학은 당황하는 전사들을 비웃었다.
“잠력을 격발시키는 불가사의한 힘. 전투화장이라 하던가?”
저게 있으니 그간 야수족이 연전연승한 것이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운종학은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분명 술력의 일종이겠지. 수차례 목격된 걸 내가 간과할 것 같으냐?”
야수족을 잡을 비책.
운종학이 모산파를 대동한 이유였다.
저것만 파훼한다면 질 리가 없다.
운종학은 필승을 자신했다.
투콰아앙―!
하지만, 충돌의 결과는 운종학의 예상을 뒤엎었다.
백병전에 특화된 주작대가 형편없이 밀린 것이다.
와족 전사들은 순수한 힘으로 주작대를 압도했고, 그들을 무시하던 운종학의 고개를 돌려세웠다.
“이, 이럴 수가…!”
수왕이 특별하게 강한 게 아니었나?
두 배가 넘는 숫자인데 주작대가 밀린다고?!
반려수와 하나가 된 와족 전사들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주작대를 찢어발겼다.
“네년이구나!”
전장의 중앙.
유인화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혁운상을 죽인 게 와족의 수장이며, 여자라는 사실을 들었다.
척 보니 그럴 만한 여전사는 딱 한 명뿐이었다.
“네가 가가를 해친 년이렷다!”
“안 돼! 주작대주! 당장 뒤로 물러나라!”
유인화는 노을에게 창을 겨눴고, 운종학은 그런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유인화는 듣지 않았다.
“죽어어!!”
창강이 치솟고, 수십 개로 늘어난 단창이 노을을 덮쳤다.
속도에 기반한 창술.
주작연환창(朱雀連環槍)이 주홍빛 살의를 뿜었다.
“뭐야, 이건?”
모산파의 부적을 올려다보던 노을이 시선을 내렸다.
매섭게 쇄도하는 수십 줄기의 창.
노을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을 뻗었다.
덥석.
창날이 잡혔다.
노을이 힘을 주자, 창날이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스거걱.
사선으로 올려친 독수리 사냥이 유인화의 몸을 긁었다.
“이, 이익…!”
“어쭈? 피해?”
제법 실력은 있는 모양이다.
유인화는 가까스로 조도의 범위에서 벗어났지만, 노을은 곧바로 따라붙으며 날짐승 떨구기를 먹였다.
“아악…!”
배를 얻어맞은 유인화가 수평으로 쏘아졌다.
유인화는 운종학에게 날아갔는데, 맹주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유인화는 날아온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나갔다.
얼굴이 함몰된 그녀는 ‘어, 어떻게 나를….’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다가 숨이 끊겼다.
“내 명령을 무시해? 쓸모없는 년 같으니라고.”
운종학은 유인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유인화를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은 이상, 평판 따윌 신경 쓸 필요도 없으리라.
“어차피 취할 생각이었는데, 잘되었군.”
운종학의 손엔 유인화가 소중히 품고 있던 사람거미의 내단이 들려 있었다.
“참으로 피곤하게 하는구나. 여러 번 내 예상을 뛰어넘어.”
장로들이 간 쪽은 백중세지만, 주작대는 머지않아 밀릴 분위기다.
그러면 야수족이 점창을 지원할 테고,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이노옴…!”
운종학은 당장이라도 주작대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시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사내 때문이었다.
“그 눈…! 불쾌하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따지고 보면 전부 저놈 때문이다.
겁 없이 혼자 나타나 길을 막을 때까지만 해도 비웃었는데, 어쩌다 보니 패배할 상황까지 치달은 것이다.
“그래. 이 모든 일의 근원은 네놈이다. 네놈만 없애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야. 금광도, 명성도, 전세를 뒤집는 것도 전부 너만 죽이면 해결될 일이다!”
야생의 살기를 담은 눈동자.
마른 비는 전투가 벌어진 이후 지금까지 오직 운종학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가 할 소리를. 덤벼, 늙은이.”
수왕이 웅크렸던 몸을 펴자, 태산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