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화아아악―!
물이 비등점(沸騰點)을 지나 끓어오르는 것처럼.
한계까지 응축시킨 자연기가 폭발하듯 발화했다.
그건 마치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놈! 그 짧은 사이에 힘을…!”
운종학이 그르렁댔다.
마른 비의 기력이 완전히 회복된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으음…!”
여울이 마른 비에게서 지팡이를 떼며 휘청거렸다.
마른 비를 회복시키기 위해 급격하게 술력을 쏟아 부은 탓이었다.
“이런…! 조심하게!”
화통달이 여울을 부축했다.
화통달 또한 단환을 건네는 걸로 그치지 않고, 혼신의 의술을 발휘했다.
백원약수공에 침술까지 곁들여서 마른 비의 기력을 북돋은 그는 여울 못지않게 지쳐 보였다.
“비아, 네가 쓰러지면 모든 게 끝이야. 죽어도 이겨야 한다!”
화통달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마른 비는 고개만 슬쩍 돌려서 화통달과 눈을 맞췄다.
“당연한 소릴. 나야, 할아버지. 믿고 기다려.”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그어졌다.
화통달이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다 컸구만! 사 년 전만 해도 사람 죽는 걸 보고 벌벌 떨던 꼬맹이가!”
그러고 보니 처음 사람을 죽는 걸 본 게 화통달을 만났을 때였다.
암살에 실패한 살막의 살수들은 자결했고, 자신은 그걸 보며 동요했었다.
‘그게 고작 사 년 전인가?’
마치 수십 년은 된, 까마득한 옛일 같다.
마른 비는 새삼 자신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겪었다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혼자 중원으로 나갔지만, 난 혼자였던 적이 없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주고받은 것.
하고 싶어서 한 일이지만,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끼어들어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많았다.
‘왜 그랬을까?’
누군가는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며 비웃을 수 있다.
자신의 일을 챙기기도 바쁜데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돕냐고, 그건 오지랖이며 호구나 하는 짓이라고 손가락질 당할지도 모른다.
‘후회해?’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것이다.
‘전혀. 그 경험들이 날 성장시켰어.’
운남에서 나가지 않았다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면, 내 일만 신경 쓰며 지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마른 비는 확실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능력이 꽃을 피운 건 물론이고, 인간관계도 그렇다.
인연을 맺고, 진심으로 대하다 보니 그들 또한 마음을 열었다.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때론 호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와 주었다.
그건 마른 비에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동이었다.
“수왕을 지켜라!”
“와족의 선대 족장께서 베푼 은혜를 잊지 말도록! 이젠 우리가 목숨을 걸고 와족을 도울 때다!”
점창 제자들의 외침을 들으며, 마른 비는 잠시 가슴에 묻어두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아버지…….’
그분의 심장에 칼날이 꽂히던 광경이 생생하다.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마른 비는 너른 하늘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어떤 대답을 할지 짐작해봤다.
‘후회? 무엇을 말이냐?’
아버지는 아마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공지량을 살려둔 걸, 점창을 용서한 걸 후회할 분이 아니다.
매 순간 치열히 살아왔고, 당시에 최선이라 여겨지는 결정을 내렸으니까.
‘지나간 걸 어쩌겠느냐? 내가 신도 아니고, 그놈이 소생할 줄 알았나.’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덧붙일 거다.
‘그래도 그 덕에 너희가 점창과 가까워지지 않았냐. 최고의 이웃, 다시없는 벗을 얻은 셈이니 그걸로 퉁 치자꾸나.’
피의 대물림, 원한의 연쇄를 끊기 위한 결정이었다.
괴의의 개입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이런 사태를 촉발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악재(惡災)일 뿐이다.
아버지는 분명 와족다운, 아버지다운,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하셨다.
‘……미안하구나. 비아 너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큰 짐을 떠맡게 해서.’
마지막엔 아마 사과를 하실 거다.
자신과 청년 전사들이 손에 피를 묻힌 걸 가슴 아파하실 테니까.
자신의 대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걸 미안해하실 테니까.
‘아뇨. 아버지는 훌륭히 책임지셨어요. 충분해요.’
아버지는 이보다 더한 열세를 뚫고 공지량의 목숨을 거뒀다.
자신이 남긴 악의 불씨를 제거했다.
온 천하가 지켜보는 가운데 와족의 힘을, 신념을, 투혼을 떨쳤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그분답게 살다 가셨다.
마른 비는 칼날이 꽂히기 전, 자신을 바라보던 너른 하늘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젠 제 차례예요, 아버지.’
자신을 위해 모두가 달려와 줬다.
자신을 믿고 망설임 없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자신이 맹주와 일대일로 붙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고마워. 누나, 할아버지, 그리고 모두. 뒤는 나한테 맡겨.”
마른 비는 심호흡을 한 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운종학은 그걸 보며 조롱했다.
“참으로 비루한 목숨이구나. 제 능력이 안 되니 온갖 잡놈들을 끌어들여서 살아남는 꼴이라니. 하긴 그럴 만하지. 금광을 떼어준다는데 눈이 벌게져서 달려왔겠지.”
운종학은 여규, 철중구, 사영이 마른 비를 돕는 이유가 금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
마른 비는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저토록 강한 사람이 왜 평범해 보였는지를.
처음엔 무인으로서의 특색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는데,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알겠어.”
“알아? 무얼 말이냐?”
마른 비는 운종학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들이 왜 날 돕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지?”
“그거야 뻔하지 않느….”
마른 비는 손을 들어서 운종학의 말을 잘랐다.
“아니, 몰라. 설명해도 이해 못 할 거야. 그게 당신의 한계니까.”
무인으로서의 한계를 말함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지평, 그릇을 뜻함이다.
수많은 사람을 옆에 두고, 거느리며, 관계를 맺었지만, 진심으로 운종학을 위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 마른 비가 보기에 그 원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운종학에게 있었다.
‘아까 그 여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유인화와 운종학은 특별한 관계였던 것 같다.
주고받는 대화가 그랬고, 죽어가면서 보인 눈빛이 그랬다.
그런데 수틀린다고 그녀를 버렸다.
그러곤 유인화가 취한 내단을 빼앗았다.
그것만으로도 운종학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엔 충분했다.
“불쌍하네.”
그게 운종학에 대한 마른 비의 최종 평이었다.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진실한 벗은 한 명도 없는 노인.
마른 비는 거대해 보였던 맹주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불쌍하다니? 내가 말이냐?”
운종학은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정파의 하늘, 천하제일에 근접한 남자, 중원을 양분하는 세력의 주인…….
그 모든 게 자신을 수식하는 말이 아닌가.
한데 그런 자신에게 불쌍하다고?
변방 땅 끝의 야만 원숭이가?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격장지계를…!”
“거봐.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당신은 백날 설명해도 절대 이해 못 할 테니까.”
포용자의 천명.
서로 다른 이들을 한데 묶고, 연결시키며, 그 안에 담는다.
미래로 뻗어나갈 운명의 씨앗이 발아했으니, 그건 야욕 하나만을 바라보며 교활하게 살아온 자와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무인이기 이전에 타고난 인간으로서의 그릇이 너무나 다른 것이다.
운종학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마른 비는 도무지 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준비해. 들어갈 테니까.”
키이이잉―!
마른 비의 몸에서 찬란한 무늬들이 번쩍였다.
와족 비전, 전투화장.
그걸 본 순간, 운종학은 ‘카핫!’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은 할 줄 아는 것이냐? 그게 통하지 않는 걸 봤을 텐데?”
운종학이 융중진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고작 믿고 있는 게 그것이었다니……. 가련하고 불쌍하구나. 그냥 놔둬도 내가 질 리 없지만, 봐줄 순 없지.”
부적이 하늘을 날았다.
봉력부가 발동되며 술력을 억제하는 힘이 쏟아져 내렸다.
허나 마른 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버지…….’
마른 비가 손을 들어서 가슴에 얹힌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너른 하늘의 유품이자, 운남의 영수들을 굴복시킨 증거.
각성수들이 자랑하는 신체의 일부를 매달아 놓은 목걸이였다.
‘이것, 분명히….’
금정신니에게 건네받자마자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전리품 따위가 아니라는걸.
검치호의 송곳니가 그랬듯이 맹수들의 발톱과 이빨엔 막대한 자연기가 담겨 있으며, 그건 해당 맹수의 특질을 함유한다.
‘여섯 개!’
대망, 광서우, 거악, 괴후, 전상, 그리고 하얀 깃.
운남을 뒤흔드는 맹수들의 신체 파편이다.
마른 비는 목걸이를 쥐고 자연기를 불어넣었다.
우우웅―.
백열갑의 힘을 끌어내듯이.
맹수들의 이빨과 발톱에 자연기를 전이하자, 그것들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른 비의 힘과 공명하며 서로 다른 힘을 발산했다.
화아아악―!
빛이 일어나고, 여섯 종류의 힘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것들은 백열갑에 깃든 검치호의 힘처럼 강한 기운을 내뿜진 않았지만, 고유의 특질을 지닌 힘을 뿌렸다.
여섯 가지 기운이 어지럽게 교차하자, 봉력부의 술력이 어그러지며 튕겨 나갔다.
“저, 저게 무슨…?!”
융중진인과 모산파 도사들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걸이의 힘이 봉력부의 술력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저런 건 전설상의 법기(法器)나 금술구(禁術具)만이 지닐 수 있는 공능이다.
이빨과 발톱 따위를 매달은 목걸이가 그런 능력을 발휘하다니?
모산파는 자신들의 술력이 조악한 치장용 도구에 가로막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보여? 이게 내 부적이야.”
마른 비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허공에는 수백 장의 부적이 떠다녔지만, 마른 비의 눈은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너른 하늘의 유품을 움켜쥐며, 마른 비가 말했다.
“지켜보세요, 아버지.”
강대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역경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기백을!
내 사람들을 지키고, 책임질 배포를!
바로, 당신과 같이.
『오오오오!!』
분노에 먹혀 폭주할 뻔한 과거 따윈 온데간데없다.
지금, 마른 비의 기운은 더없이 맑고 투명했다.
푸르른 자연기가 폭사되며 하늘 끝까지 치달았다.
마치 저기 어딘가에 계실 아버지에게 닿을 것처럼.
“끝을 보자.”
새파란 귀화가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운종학을 향하자, 정파의 하늘이 움츠러들었다.
“자, 장문인! 어떻게 된 것이오! 왜 저놈의 술법이 꺼지지 않는…!”
본능적인 두려움.
운종학이 부질없는 소망을 주절댈 때, 마른 비는 이미 그에게 당도해 있었다.
“떠들 시간이 있어? 그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을 텐데?”
“이… 어린놈이! 까불지 마랏!”
그건 위축을 떨쳐내려는 몸부림이었다.
용형제왕검이 뽑혀 나오고, 하늘을 가를 참격을 뿌렸다.
“오오오오!”
“카아앗!”
수왕 대 천검.
역사에 길이 남을 격돌이 지금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