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꽈아앙―!
철 기둥 같은 다리가 내리꽂히며 대지의 기운을 빨아올린다.
말아 쥔 주먹에 자연기가 집중되니, 곧은 일격이 격전의 서막을 알렸다.
바위 부수기.
푸르른 정권이 숲을 밀어버릴 기세로 뻗어졌다.
『지르기? 그게 전부냐?!』
속도는 모자라고, 변화는 전무하다.
그저 힘만을 눌러 채운 공격이 아닌가?
『이놈이! 날 우습게 보는 것이냐?!』
운종학이 노성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용형절단세.
마른 비가 힘이라면 운종학은 속도를 선택했다.
극속의 가르기가 주먹을 지나치며 쇄도한다.
이대로라면 마른 비가 먼저 두 쪽 날 판이었다.
후우욱―!
운종학의 표정이 굳은 건 그때였다.
‘헛! 검이 밀려?!’
풍압.
마른 비의 주먹은 공간 전체를 밀어붙이며 나아갔다.
속도, 변화, 기교를 압살하는 권격.
검이 돌풍에 휩쓸린 나뭇가지처럼 맥없이 밀린다.
운종학은 기겁하며 왼손을 뻗었다.
터엉!
용형금광장.
붉은 발톱에게 부상을 입힌 절기지만, 수왕의 정권을 밀어내기엔 역부족이다.
우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권격에 운종학이 호통을 쳤다.
『이런 무식한 놈이!』
휘리릭―.
검이 손 안에서 춤추듯 회전했다.
운종학은 검을 거꾸로 쥐더니 튕겨 나온 방향 그대로 내리그었다.
쩌어엉―!
멈출 줄 모르던 주먹이 꺾였다.
백열갑과 용형제왕검이 부딪히며 시뻘건 불꽃이 튀었다.
운종학은 그대로 파고들며 외쳤다.
『힘 싸움을 원하느냐? 좋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려주마!』
용형역검세(龍形逆劍勢).
기교나 속도는 죽지만, 힘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자세다.
검이 대지를 부술 듯 날아들자, 마른 비의 자세가 변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휘리릭―.
마른 비의 양손이 눈부시게 회전했다.
활짝 편 손바닥이 태극의 형상을 그리니, 일대의 공기가 미친 듯이 빨려들었다.
진공(眞空), 그리고 흡입(吸入).
그 순간, 손바닥이 점유한 좁은 공간이 마른 비의 제어하에 놓였다.
『같잖은 수작을! 그대로 부숴주마!』
거력이 쏟아진다.
거꾸로 움켜쥔 검은 흔들리지 않았고, 하늘도 깨뜨릴 힘을 담고 있었다.
검과 권갑이 충돌하려는 순간!
후우욱!
마른 비가 만들어낸 역장(力場)이 운종학의 검을 붙들었다.
끊임없이 회전하되 부드럽게.
검을 빨아들이며 내 의지대로 인도한다.
운종학의 검날에 마른 비의 손날이 얹혔다.
두툼한 권갑을 찼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마른 비의 손놀림은 부드러웠다.
툭.
가볍다.
그리고 경쾌하다.
대수롭지 않게 밀어내는 손놀림은 장난을 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안엔 무수한 실전을 겪으며 터득한 무의 이치가 녹아 있었다.
‘회전과 결. 부드러움과 섬세함……. 힘에 저항하지 않고 궤도만 비튼다!’
극의에 이른 무리(武理)는 결국 일맥상통하기 마련이니.
유능제강(柔能制剛).
도덕경(道德經)과 육도삼략(六韜三略)에 언급된 무의 이치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지만, 마른 비는 대자연에서 비롯된 섭리를 체득하고 있었다.
『이, 이놈이?!』
운종학은 경악했다.
말이 쉬워 유능제강이지, 어설프게 흉내 냈다가는 십중팔구 힘에 꺾인다.
뼈를 깎는 고련과 헤아릴 수 없는 실전, 지극한 깨달음이 뒷받침되어야 겨우 다다를 경지인 것이다.
무론(武論)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을 야만족 꼬맹이가 최상승의 기교를 구사해?
심지어 자신을 상대로?
『웃기지 마라! 아직 멀었느니라!』
역검세의 힘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운종학은 흩어지는 힘을 그러모으며, 손목을 절묘하게 놀렸다.
쉬아악―!
기교를 기교로 누르는 대응이다.
운종학 역시 유능제강의 묘를 터득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궤도를 이탈한 검이 제자리를 찾으며 마른 비의 얼굴을 노렸다.
“……!”
마른 비는 피하지 않았다.
기감으로 검의 궤도를 더듬고, 두 눈으론 운종학을 노려봤다.
피잇―!
검이 눈썹 위를 긁고 지나갔다.
놀란 건 운종학이었다.
‘뭐냐! 분명 깊숙이 베었건만!’
운종학은 뒤늦게 깨달았다.
무언가가 지그시 자신의 몸을 잡아당기는걸.
‘흡인(吸引)?! 설마 아까 그…!’
양손을 휘둘러서 만들어낸 역장.
그 여력은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
운종학의 상체를 슬쩍 흔드는 걸로 충분하다.
검의 궤적을 후퇴시켰으니, 이젠 반격의 시간이었다.
『죽어.』
빛이 번쩍이며 보이지도 않는 수격이 운종학을 덮쳤다.
힘에서 기교로, 기교에서 다시 속도로.
올빼미 사냥이 명치를 꿰뚫으려는 순간, 무언가가 백열갑을 올려쳤다.
『……?!』
운종학은 무리하게 나아가지 않았다.
흡인력에 몸을 맡기며 상체를 뒤로 젖혔고, 무릎으로 백열갑을 튕겨냈다.
하지만 그건 기회였다.
파고들 틈이 생긴 셈이니까.
마른 비는 지체 없이 따라붙었다.
『각오해. 여기부턴 내 간격이야.』
일진일퇴의 공방전.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검을 휘두르기엔 짧고, 권각을 놀리기엔 더없이 좋은 거리.
품에 파고든다면 승부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오싹한 느낌이 든 건 그때였다.
『너나 죽어라. 애송아.』
피잇―!
가슴 어림에서 화끈한 작열감이 번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마른 비는 본능적으로 몸을 뺀 뒤에야 볼 수 있었다.
팔을 몸에 딱 붙인 채 검을 올려친 운종학을.
『간격이라니. 그 정도도 극복하지 못한 검사가 천하제일을 노릴 수 있다고 생각했나?』
뻐어억!
육중한 타격이 신체 내부를 흔든다.
목구멍을 타고 피가 울컥 솟았다.
용형금광장을 정통으로 맞자 정신이 날아갈 것처럼 아득해졌다.
마른 비는 피를 눌러 삼키며 발을 뻗었다.
빠바바박―!
중선오격.
타격점도 확인하지 못한 채 본능에 맡기고 내지른 발차기다.
네 발은 가로막혔지만, 한 발은 느낌이 왔다.
“오오오오!”
“카아앗!”
수왕과 천검.
온몸을 뻑뻑하게 하는 압력이 걷힌 순간, 마른 비와 운종학은 목이 터져라 기합을 내질렀다.
투콰아앙―!
화탄이 폭발한 듯한 굉음이 뒤늦게 터졌다.
앞서 주고받은 타격음도 더해진 상태다.
폭음 속에 겹쳐진 소리를 정확히 구분한 건 그믐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믐조차 눈으로는 둘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지 못했으니…….
“허…!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구나!”
그믐은 대견함과 허탈함, 염려가 섞인 어조로 혀를 찼다.
“맙소사!”
“저, 저런…!”
비명은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
공유립과 여규, 정도맹의 장로들.
그들은 잔영과 소리로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할 뿐이었다.
“찰나의 영역…!!”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그런 경지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지금 마른 비와 운종학이 그 영역에 들어가 일장격돌을 벌였다는 사실도.
공유립과 여규는 그저 놀랄 뿐이었고, 장로들은 그러고도 마른 비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느린 시간의 영역…! 후우, 대단하네.”
둘의 움직임을 실제에 가깝게 잡아낸 건 노을이었다.
그녀는 그믐조차 놓친 부분들을 두 눈에 담았다.
스스로도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몰랐지만, 분명히 보였다.
“위험해…!”
그래서 노을은 눈치챘다.
박빙으로 보이지만, 마른 비가 불리하다는걸.
경험과 내력의 차이.
천부적인 재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그것들이 미세한 격차를 벌려놓은 것이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 외에 상황을 파악할 능력이 있는 자는 없었다.
빛이 번쩍이고, 귀청을 찢는 폭음이 터졌다.
하지만 둘은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방금 둘이 싸운 거야?”
“왜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는….”
후우우욱―!
뒤늦게 몰려온 후폭풍이 전장을 휩쓸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싸우던 자들이 휘청거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와족과 점창, 정도맹의 무인들은 그제야 엄청난 격전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대체 어떤 경지에 이르면 저런…!”
인지 범위를 벗어난 충격이 싸움을 그치게 만들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마주 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으음….”
‘우두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운종학이 인상을 쓰며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통증과 소리가 모두 한 박자 늦게 찾아온 것이다.
“비, 비아가 이겼…!”
와족 전사들이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컥…!”
마른 비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억지로 눌러놓았던 내상이 도로 터졌다.
현기증이 일며,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리고, 운종학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실로 무시무시하구나. 인정하마. 나도, 패군도 네 나이 때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운종학이 검을 수직으로 들었다.
용형파천세가 찬란한 금빛 강기를 일으켰다.
“어쩌겠느냐? 여물기 전에 나를 만난 네 운명을 탓해라. 내게 대항한 순간 이건 예정된 결과였느니.”
콰우우웅―!
용음(龍音)이 숲에 메아리쳤다.
전의를 꺼뜨릴 정도의 기운 앞에서, 노을이 눈을 부릅떴다.
“안 돼…!”
하지만, 노을은 마른 비를 도울 수 없었다.
주작대의 생존자들이 기를 쓰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느냐!”
“크흐흐! 우린 죽지만, 너희도 수왕의 죽음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건 반대쪽 전장도 마찬가지였다.
장로들이 그믐을 붙들고, 정도맹이 점창파를 억누른다.
와족과 점창파는 악을 쓰며 전진했지만, 누구도 시간에 맞출 수 없었다.
“……걱정 마. 말했지? 내게 맡기라고.”
마른 비가 비척대며 일어섰다.
얼마든지 해봐라.
무슨 수를 쓰든 살아남아서 너를 쓰러뜨려 줄 테니.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마른 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꺾이려는 다리에 힘을 주며, 흩어지는 자연기를 끌어모을 뿐이다.
운종학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투지? 정신력과 기백만으로 난관을 헤칠 수 있다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겠지.”
금빛 광채가 쏟아진다.
운종학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으며 필살의 절기를 내리그었다.
“지긋지긋한 놈. 이만 죽어라.”
운종학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네 아비처럼.”
마른 비는 똑똑히 보았다.
운종학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을.
빠드득.
마른 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과 함께 이를 깨물며 전진할 뿐이다.
투혼? 투지? 분노?
무엇인지는 모른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격정이 마른 비를 일으켜 세웠다.
“으아아아!!”
마른 비가 운종학에게 달려들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됐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마른 비 스스로도 이 순간만큼은 이성이 날아갈 만큼 화가 났으니까.
누구도 예상치 못한 구원의 손길이 상황을 뒤바꿨으니까.
“커허허헝!!”
숲을 둘로 쪼개는 맹격.
새하얀 발톱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무, 무슨?!”
마른 비의 분노를 느낀 걸까?
별비는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나 있었다.
앞발 한쪽에 모든 힘을 때려 부은 비기가 운종학을 덮쳤다.
투콰아앙―!
별비는 운종학을 짓이길 듯 앞발을 휘둘렀고, 그의 공격을 멈춰 세웠다.
“이… 미물이 감히…!”
횡으로 세운 검날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마에 핏줄이 서고, 부릅뜬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다.
운종학은 힘겨운 듯 이를 악물며 별비를 노려봤다.
“좋다! 원한다면 너부터 죽여주마!”
끼기기긱!
별비의 발톱과 운종학의 검이 마찰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울렸다.
검이 기울며 별비의 발톱을 미끄러뜨렸다.
“캇!”
기술.
인간이 짐승에 비해 절대 우위에 선 부분이다.
별비의 발톱이 밀려난다고 느낀 순간!
“커흥!”
별비가 앞발을 교묘하게 비틀었다.
흘러내리던 발톱이 부드럽게 선회하며 제 위치를 찾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지금 기술을 기술로 받아친 것인가?
앞발의 근육과 방향을 제어해서?
미물에 불과한 짐승이?!
“이, 이이…!”
운종학이 가중되는 압력에 버거워할 때였다.
별비가 입을 쩍 벌리며 오른쪽 어깨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이…!”
놀랄 틈도 없다.
운종학은 검의 각도를 비틀며 별비의 이빨까지 막아냈다.
콰차아앙―!
이대로는 꼼짝없이 죽는다.
운종학이 마른 비를 끝내기 위해 검에 담은 일격을 그대로 뿜어내려 할 때였다.
빡!
정강이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빠바바박!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발차기가 하체를 두드린다.
솔잎 털기.
초저공에서 터진 연격이 운종학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호신강기가 망치에 얻어맞은 벽처럼 깨져나갔다.
육신과 육신이 맞부딪히는 근접전.
거기까지 갔다면 누가 유리할지는 명백했다.
“상황이 역전됐네. 남길 말 있어?”
마른 비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반전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