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파라라락―!
부적들이 날아와 허공을 메웠다.
주황빛 종이에 그려진 붉은 문양.
뜻을 알 수 없는 그림과 글자들이 선명하게 빛났다.
“부적술? 통하지 않는 걸 봤을 텐데?”
마른 비가 목걸이를 점검하며 말했다.
각성수들의 힘은 제대로 작동 중이다.
은은하게 주위를 감싼 기운이 모산파의 술력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목걸이의 기운은 마른 비와 가깝게 있는 별비까지 보호하며 전투화장을 유지시켜 줬다.
별비가 운종학을 거침없이 몰아붙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웅, 웅, 웅― 화아악―!
부적들은 벌 떼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진동하다가 술력을 쏟아냈다.
마른 비는 기운이 향하는 곳을 확인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잠깐! 설마…!”
모산파는 전투화장을 무력화하는 걸 포기했다.
비기를 총동원해도 목걸이의 힘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른 비를 약화시킬 수 없게 된 그들은 술력의 대상을 바꿨다.
“증력부(增力符)! 맹주님의 힘을 끌어올려라!”
막대한 기운이 운종학에게 스며들었다.
당장이라도 이빨에 물어뜯길 것 같던 운종학이 별비를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안 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들에게도 전투화장 같은 기예가 존재할 줄이야.
마른 비는 곧장 달려들며 운종학의 정강이를 두드렸다.
빡! 빠바바박!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지만, 운종학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공격을 한 마른 비의 발이 시큰거릴 지경이었다.
“이런…!”
마치 한철을 두른 듯한 강도다.
솔잎 털기에도 깨졌던 호신강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해졌다.
‘더 큰 힘으로!’
등이 돌아가고, 자연기가 깃든다.
마른 비는 온몸으로 전진하며 대기를 끊어쳤다.
천둥바위.
강대한 충격파가 운종학을 덮쳤다.
“크아아앙!”
별비도 사납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휘둘렀다.
“후우우…….”
깊은 숨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안도와 흡족함이 깃든 날숨.
운종학의 눈이 번쩍인 순간, 섬광이 폭발했다.
“아악…!”
“커흥!”
용형파천세.
검에 갇혀 있던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건 마른 비와 별비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만큼 강렬했다.
“좋군. 이런 느낌인가.”
운종학은 튕겨나간 마른 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경이로운 현상을 목격한 사람처럼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곤 융중진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하오, 장문인.”
“가, 감사합니다, 맹주님!”
융중진인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건 마치 황제에게 상찬 받은 신하를 보는 듯했다.
“이 힘. 그리고 활력! 젊은 시절로 돌아간 건 같구나! 힘이 끓어 넘쳐!”
모산파 도사 수십 명의 힘을 집중한 술법.
부상이 나은 건지, 통증을 잊게 한 건지는 몰라도 마른 비에게 당한 어깨와 다리까지 멀쩡하게 움직인다.
운종학은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장담할 수 있다! 패군? 협검? 오스트갈이나 천마? 누가 와도 안 된다! 내가 최강이니라! 내가 바로 천하제일이란 말이다!”
운종학은 숲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정도맹은 안도했고, 어느 순간부터 그를 따라 웃었다.
맹주가 발산하는 무시무시한 기운.
그건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힘이었다.
마른 비와 별비가 밀려난 순간, 정도맹은 승리를 확신했다.
“신났네, 아주.”
묵직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고개를 돌리자, 피를 퉤 뱉는 마른 비가 보였다.
“솔직히 놀랐어. 강한 것도 맞아. 지금까지 적으로 만난 누구보다.”
술력을 받은 운종학의 기운은 너른 하늘에 필적할 정도였다.
저 정도면 최강 운운하며 흥분하는 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게 있었으니….
“그래도 평범해. 그런 힘을 지니고도 강하다는 느낌이 전부라면 날 이길 수 없어.”
한껏 고무된 기분을 엉망으로 만드는 말이었다.
운종학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마른 비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허세로군. 피를 철철 흘리는 놈이 그런 말을 해봤자 먹힐 것 같으냐?”
그 말처럼, 마른 비는 온몸이 피에 절어 있었다.
조금 전의 일전에서 운종학의 검에 난자된 것이다.
종횡으로 긁힌 검상이 입을 쩍 벌리며 피를 쏟아냈다.
마른 비는 피부를 조여서 출혈을 멈춘 뒤에 전투 자세를 취했다.
“허세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봐.”
시련은 마른 비에게만 닥친 게 아니었다.
모산파는 여세를 몰아 술력을 퍼부었고, 증력부는 정도맹 무인들의 잠력까지 끌어냈다.
다 죽어가던 주작대가 고함을 지르며 소생했다.
점창파에게 밀리던 정도맹이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총체적 난국.
모산파는 그들을 데려온 운종학을 흡족하게 했다.
“어떠냐? 이래도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가?”
마른 비는 한 점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물론이지. 너희는 절대 우릴 이길 수 없어.”
그건 와족과 점창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적의 힘은 전의를 꺾어버릴 정도지만, 포기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른 비가 싸운다면 끝까지 함께할 것이며, 그가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마른 비가 싸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자신들의 역할이었다.
와족과 점창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적에게 달려들었다.
“가라! 비아야! 가서 저 망할 놈을 부숴버려!”
“사 년 전, 창산을 휘젓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오! 수왕, 오늘이 바로 그대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날이요!”
마른 비는 자신을 믿는 이들의 눈빛을 느꼈다.
지지 않는다.
꺾이지 않는다.
반드시 이긴다!
『오오오오!』
용맹한 함성이 대지를 달궜다.
타오르는 투지가 통증을 날리고, 자연기와 공명한 백열갑이 순정한 기운을 뿌린다.
최대최강의 적!
마른 비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운종학에게 쇄도했다.
“분수를 모르는 놈 같으니! 사지를 잘라내어 짐승들에게 던져주마!”
권갑과 검의 격돌이 전장의 소음을 잠재웠다.
슬격이 터져나가고, 횡으로 그은 팔꿈치가 공간을 절단한다.
손날로 구현한 참격이 운종학의 검을 내려치자, 금광을 뿌리는 손바닥이 마른 비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야아아!”
“카아앗!”
검이 어깨와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도 마른 비는 멈추지 않았다.
“고작 이거야? 덤벼!!”
쓰러지지 않는다.
몸을 내주고, 일격을 먹인다.
크게 휘두른 주먹이 운종학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운종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놈이!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추아악! 스각!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검격.
마른 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치명적인 급소만 아니면 전부 내주었다.
“마음껏 베어 봐.”
쾅!
두 번을 베이면, 한 방을 먹인다.
세 번을 찔려도, 한 방만 꽂는다.
묵직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마른 비는 오로지 전진할 뿐이었다.
추아악! 스각―!
퍼억!
스팟! 서거걱!
쾅―!
무식하리만치 저돌적인 전진.
피를 흘리는 건 마른 비지만, 먼저 도망친 건 운종학이었다.
“카악! 이 무식한 놈이! 이게 왕이라 불리는 놈의 전투란 말이냐! 이 무슨 시정잡배의 막싸움인가!”
힘의 열세를 몸으로 때우며 만회한다.
통증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집어삼키는 투지.
어떤 것도 마른 비의 전진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든지 베어 봐. 끝에 눕는 건 네가 될 테니까.”
운종학을 미치게 하는 건 치명적인 공격은 전부 흘린다는 점이었다.
마른 비는 검날이 코앞을 지나가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끝까지 보고, 위험한 것만 몸을 틀어서 피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반격을 꽂아 넣었다.
운종학은 수십 번의 공격을 적중시키고도 기가 질려서 물러났다.
“오, 오지 마라! 이놈!”
채찍 같은 발차기가 다리를 후려쳤다.
마른 비가 휘청하는 순간, 운종학은 뒤로 뛰어오르며 검을 거꾸로 쥐었다.
“자잘한 걸로 쓰러지지 않는다면 단칼에 죽여주마!”
눈부신 금광이 확산한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운이 운종학의 검에 맺혔다.
하지만 그건 마른 비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별비야!”
“커허헝!”
별비는 마른 비의 의도를 전달받고 웅크린 채 대기 중이었다.
벗의 외침이 터지자, 하얀 섬광이 폭사됐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퍼어억―!
금광장이 별비의 몸에 박혔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별비가 피를 왈칵 토했다.
“크아앙!”
“버텨! 별비야! 조금만 물고 늘어져!”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
마른 비가 그랬듯 별비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몸을 내주고, 적을 붙든다.
허나 발톱을 박아 넣고, 이빨로 물어도 운종학의 호신강기는 뚫리지 않았다.
“두 놈 다 학습능력이 없구나! 내공도 제대로 깃들이지 않은 공격이 통할 것 같은가!”
별비는 열이 받는지 운종학이 듣지도 못할 의지를 뱉었다.
〔시벌! 말 졸라 많네! 나도 알아, 이 새끼야!〕
철중구가 들었다면 물개박수를 쳤으리라.
자신의 육두문자가 제대로 전해졌다고.
어쨌거나 별비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다.
별비는 금광장에 얻어맞으면서도 운종학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의 뒤엔 언제나처럼 마른 비가 따라붙었다.
“그만 떠들고 이 꽉 물어.”
쩌어엉―!
틈을 노린 발차기였지만, 운종학은 막아냈다.
그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검째로 붕 떠오르며 외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타격도 주지 못할 공격을 왜?”
마른 비는 지체 없이 외쳤다.
“별비야! 날려버려!!”
“……?!”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곧바로 따라붙은 별비가 앞발을 휘둘렀다.
〔그놈 참, 쉴 새 없이 떠드네.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 이 얼간이 새끼야!〕
투쾅―!
이번엔 제대로 힘이 실린 공격이다.
허나 운종학은 이번에도 완벽하게 막아냈다.
뒤로 날아가는 것 외에 그가 피해를 본 건 없었다.
휘리리릭―!
숲을 뚫고 돌팔매처럼 날아가던 운종학이 몸을 뒤집어서 속도를 줄였다.
땅에 착지했을 때, 운종학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음?!”
숲이 끝나고, 광활한 땅이 열렸다.
운종학은 주위를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뭐냐, 저건?”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꼭대기를 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
거목이란 말로도 모자라다.
나무가 드리운 그림자는 마을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다.
“여긴 대체?”
앞서 지나온 곳이 뻥 뚫린 공간이었다면 진작 발견했으리라.
빽빽한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고, 전투에 집중하느라 볼 수 없었다.
와족이 신성시하는 지역에 들어선 운종학은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여기까지 왔네.”
마른 비가 숲을 헤치며 나왔다.
별비는 얻어맞은 곳이 성치 않은지 쩔뚝대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너… 일부러 날 여기까지 날려 보낸 건가?”
운종학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낮은 풀밖에 없는 개활지. 함정도, 매복도 불가능한 지형이다. 여기까지 오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당연하지.”
마른 비는 기억한다.
산과 안개걸음이 성년식에서 돌아온 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믐이 했던 말을.
‘느껴지느냐? 이 주변에서 부족의 전사들은 훨씬 강해진다.’
대자연의 숨결이 혈관을 일주하며 탁기를 몰아낸다.
운남의 중심, 애뢰산보다도 순도 높은 영기를 간직한 나무.
자연기를 다루는 존재에게 여긴 축복이 내리는 싸움터나 다름없었다.
“영광인 줄 알아. 신령목을 보게 된걸. 두 눈에 똑똑히 새겨. 여기가 네 무덤이 될 테니까.”
파지지직―!
새파란 전광이 불꽃을 튀기며 타올랐다.
마른 비가 뢰창을 손에 쥐며 운종학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