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화
“신령목? 이 나무를 말하는 것이냐?”
운종학이 고개를 젖혔다.
그 앞에 선 자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대자연의 창조물.
나무는 놀랍도록 순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근원이 이러하다는 것처럼.
“과연… 그렇구나.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육신이 정화되는 듯하다.
정신이 맑아지고, 오욕칠정(五慾七情)마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온몸에 팽팽히 들어차는 활력.
이런 곳에서 심법을 수련한다면 엄청난 성취를 이룰 게 분명했다.
“금광이 문제가 아니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이로다!”
운종학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대자연의 고결함도 결국 인간의 욕심을 꺾지는 못한 것이다.
신령목이 무공 성취를 증진시킬 것이란 걸 깨달은 순간, 운종학은 주체할 수 없는 탐심에 사로잡혔다.
“이건 나의 것이다! 나무도, 금광도 모두 내 손에 넣을 것이야!”
운종학이 희열에 찬 얼굴로 외쳤다.
그에 대한 마른 비의 반응은 간결했다.
“미친놈.”
보이는 것마다 다 제 꺼란다.
곱게 미쳐야 이해라도 하지, 저건 중증환자 수준이 아닌가.
저 욕심이 지금의 운종학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마른 비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헛된 꿈을 버려. 넌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힘의 차이를 느꼈을 텐데? 대체 뭘 믿고 까부는 것이냐?”
마른 비가 깊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뭐긴.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들이지.”
자연기가 맹렬히 타올랐다.
신령목의 가호일까?
뢰창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마른 비와 운종학이 격돌하려는 순간!
콰아앙―!
거센 충돌음이 터지며 수백 명이 숲을 뚫고 뛰쳐나왔다.
눈이 벌게져서 달려드는 정도맹과, 점창과 한 덩어리가 된 와족.
모산파의 술력을 받은 정도맹이 와족과 점창파를 여기까지 밀어붙인 모양이었다.
“저쪽도 끝이 보이는군. 이래도 계속 헛소리를 하겠느냐?”
운종학이 비릿하게 웃을 때였다.
노을의 목소리가 개활지를 울렸다.
“됐어! 목적지까지 끌고 왔다! 와족! 선두에 서라! 점창은 좌우에서 전사들을 보좌하도록!”
“……끌고 왔다고?”
운종학의 표정이 굳었다.
노을이 칼바람과 함께 최전선으로 나서며 외쳤다.
“여긴 우리의 땅이다! 도리를 저버린 침략자들에게 운남의 힘을 보여주자!”
운남.
노을은 그렇게 말했다.
그건 와족과 점창을 구분 짓지 않는 격려이며, 양자를 결속시키는 언어였다.
설산의 여제는 자연스레 아군 전체를 통솔하고 있었다.
“전군, 돌격하라!!”
최후의 일전을 위한 전장.
사도칠문을 막으러 갈 때부터 준비한 싸움터다.
와족의 반격이 시작되자, 정도맹의 전선이 붕괴됐다.
신령목의 가호를 받은 와족 전사들은 푸르른 빛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어머니 대지께 바라옵나이다. 당신의 자녀들이 시련을 이겨낼 힘을. 불굴의 용기와 끝 모를 투지를 허락하소서.”
힘이 증폭된 건 전사들만이 아니었다.
여울도 마른 비를 치유하느라 소진했던 술력을 회복했다.
자연기의 근원을 더듬는 그녀는 신령목 아래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였다.
“아버지 하늘이시여. 당신께서 허락한 힘을 그릇된 일에 사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제게 저들을 막을 권능을 허락하소서.”
여울의 주위에서 연녹색 기운이 일어났다.
영롱한 빛을 머금은 바람이 하늘로 치솟으며 부적의 힘을 밀어냈다.
“안 돼! 막아라! 술사가 야수족의 주술을 해방하려 한다!”
융중진인이 기겁하며 외쳤다.
허나 그는 여울의 힘을 과소평가했으니…….
여울은 전투화장의 봉인을 푸는 걸 넘어 정도맹에게 걸린 증력부의 기운까지 소멸시킬 작정이었다.
“마, 맙소사! 이게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이란 말이냐?! 술력을 집중하라! 무슨 수를 쓰든 저지해야 해…!”
대자연의 힘과 부적술의 기운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술력전.
전사들이 창칼과 싸운다면, 여울은 홀로 수십 명의 도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초자연적인 힘이 대기를 일그러뜨리는 가운데, 균형을 깨뜨린 건 살수의 검이었다.
“이건 또 웬 난장판이냐. 삭신이 쑤시는데…… 이러면 보고만 있을 수가 없잖아.”
검은 바람이 휘몰아친다.
모산파 도사들의 그림자에서 암검이 솟구쳤다.
일격에 심장을 꿰뚫는 암습이 모산파 도사들을 줄줄이 쓰러뜨렸다.
“사, 살수?!”
현무대를 전멸시키고 몸을 뺐던 사영이 돌아왔다.
그는 후방에서 방심하고 있던 모산파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하지만 사영은 공격을 이어갈 수 없었다.
“큭…!”
가슴에 길게 난 자상.
홀로 운종학과 주작대, 현무대와 싸우며 입은 상처였다.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의 상처지만, 그를 힘겹게 하는 건 통증 따위가 아니었다.
“여, 여긴 대체?”
대자연의 기운이 만개한 공간.
주원장 습격 때 자연기가 암영기에 상극이라는 건 밝혀진 사실이다.
신령목의 힘이 미치는 영역은 사영에게 불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길! 왜 하필 이런 곳에서 싸우는 거냐!”
사영이 난처해하는 건 보기 드문 광경이다.
마른 비와 와족을 돕고 싶지만, 사영은 도저히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때, 언젠가 들어 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레? 너 이 음침한 새끼! 겁나 오랜만이네! 네가 왜 여기 있냐?”
후방에서 튀어나온 건 철중구였다.
투견대도 백호대를 정리하고 전열을 수습한 뒤 달려온 것이다.
사영은 인사도 하지 않고 모산파를 가리켰다.
“너…! 잘됐다! 저놈들이다! 가서 저놈들을 쓰러뜨려!”
철중구는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댔다.
“이게 누구한테 명령질이야! 죽고 싶냐?! 네가 해, 이 새끼야!”
사영은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철중구는 듣고선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 기운이 상극이라 못 들어가? 웃기시네. 그냥 네가 허약한 거겠지! 남자라면 그따위 것 근성으로 극복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놈, 죽일까?’
사영이 진심으로 칼을 뽑을지 말지 고민할 때, 철중구가 움직였다.
“좋다! 이번엔 네 ‘간청’을 들어주마! 그녀가 나의 활약을 기다리고 있거든! 내 실력이나 감상해라, 허약아!”
‘허약…….’
사영은 무심코 철중구의 심장 부근을 노려봤다.
사영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때, 철중구는 죽음의 위기가 지나갔다는 것도 모르고 신이 나서 외쳤다.
“부적은 개뿔? 투견대! 말코도사 놈들에게 칼침 좀 놔줘라!”
투견대의 참전이 결정적이었다.
뒤통수를 맞은 모산파는 저항다운 저항도 못 하고 전멸했다.
그들이 쓰러지자, 정도맹을 북돋던 힘이 일시에 소멸해버렸다.
“소저! 나요, 중구! 음침한 놈이 실패한 걸 내가 해냈단 말이오!”
철중구가 환한 얼굴로 외쳤다.
노을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병력을 휘몰아쳐 기세를 잃은 정도맹을 밀어붙였다.
“이, 이런…!”
운종학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주작대가 전멸하고, 중견문파의 수장들이 목숨을 잃는다.
흰 수리를 부리는 여인과 회색 올빼미를 대동한 노인은 장로들도 감당하지 못했다.
“허억! 맹주님!”
“……!”
투견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융중진인이 부적에 올라탄 채 허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그가 살아남은 게 천만다행이다.
융중진인만 있으면 자신에게 걸린 술법은 당분간 유지가 될 테니까.
“맹주님! 오래 못 버팁니다! 어서 수왕을…! 놈을 잡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운종학이 검을 움켜쥐었다.
최단시간 안에 수왕을 처치하고, 술력을 쓰는 여인을 벤다.
그리고 야수족과 점창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적은 지쳐 있었고, 술력만 걷어낸다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운종학이 검을 들어 올릴 때였다.
“포기해. 넌 못 가.”
콰르르릉―!
마른 비가 뢰창을 집어던졌다.
시퍼런 전광을 뿌리며 날아가는 창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 강렬한 힘을 품고 있었다.
“야만족 놈! 너 때문에 추산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느니라!”
용형제왕검이 하늘을 향해 들렸다.
금빛 강기가 무한한 수축을 반복한다.
용형(龍刑).
그 이름처럼 운종학의 검강은 뚜렷한 용의 자태를 빚어냈다.
“카아앗!”
제왕금룡파(帝王金龍波).
검환의 극의에 다다른 경지이자, 운종학 필생의 절기였다.
금빛의 용이 찬란한 빛을 뿌리며 뢰창과 충돌했다.
쩌저저정―!
서로를 밀어내던 것도 잠시, 우위는 금세 갈렸다.
제왕금룡파는 뢰창을 반으로 가르고, 음파마저 소멸시켜 버렸다.
“커허헝!”
별비가 뛰어들며 마른 비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령목의 힘을 받은 별비는 푸른 눈동자에서 새파란 살의를 줄기줄기 흘렸다.
〔비아에게 닿도록 둘 것 같으냐!〕
별비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금룡의 목을 물었다.
닿기만 해도 만물을 절단할 절기 앞에서, 별비의 송곳니는 잘리지 않았다.
“크하아앙!”
내공이 응집된 유형의 검강.
별비는 자연기를 턱과 이빨에 몰았고, 경이적인 힘으로 제왕금룡파의 궤도를 비틀어버렸다.
“커헝…!”
하지만, 별비도 멀쩡할 순 없었다.
금룡의 몸체에 스친 녀석은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무사할 거라 믿어. 고마워, 별비야.”
콰우우웅―!
환하게 걷힌 시야.
파멸의 기운이 빛을 뿜었다.
별비가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마른 비는 서리불꽃을 연성해냈다.
필멸의 기예가 공간을 사르며 날아들었다.
“진정 놀랍구나. 너 같은 야만인이 필생의 적이 될 줄이야.”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운종학은 희한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검을 앞으로 내민 채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나 역시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니.”
꿈에서도 그리던 경지.
평생을 매진했으나 실패만을 거듭한 영역이다.
‘반드시 넘는다. 그리고 모든 걸 손에 쥘 것이다!’
상식을 허무는 탐욕.
지금의 운종학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그건 모산파의 술력과 함께 그를 또 다른 경지로 이끌었다.
사아아아―.
들리는 건 음향뿐이었다.
스산한 안개가 깔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스팟!
서리불꽃이 반으로 갈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는 서리불꽃을 쪼개버린 걸로도 모자라 마른 비까지 양단해버렸다.
“비, 비아야…!”
정도맹을 무너뜨린 와족 전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대장로 송유일의 목을 움켜쥔 채 전투를 지켜보던 노을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 안 돼애!!”
반면, 송유일은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것도 잊은 채 격정에 차올랐다.
“무, 무형검(無形劍)…!”
심검(心劍)의 현현이라고 알려진 무극의 경지가 아닌가.
무림 역사상 존재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실제로 목격한 자는 없는, 전설 속 영역이다.
인성은 그릇되었을지 모르나, 무의 재능만은 비할 데 없는 자.
운종학은 칠십의 나이에 이르러 마침내 절대자의 반열에 오르고 말았다.
“아아…!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살아생전 심검의 경지를 내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검사로서, 무인으로서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송유일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허나 감탄을 내뱉기엔 아직 일렀으니.
스르륵.
반으로 잘렸던 마른 비의 신형이 흩어졌다.
잔상만 남긴 채 허깨비처럼 사라지는 경신술.
무인의 시각을 교란할 정도의 초고속 이동이 만드는 여파였다.
이형환위(以形換位).
마른 비가 나타난 곳은 운종학의 앞이었다.
“이놈이…!”
운종학만이 마른 비의 기동을 간파했다.
그는 요격을 준비했고, 마른 비를 포착하자마자 무형검을 시전했다.
그리고 보았다.
마른 비의 두 주먹에 맺힌 전율적인 기운을.
“허튼 짓하지 마라! 볼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심검은 인간이 받아낼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니라!”
착각일까?
운종학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절대의 경지를 개척한 자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찰나의 순간, 마른 비는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무형검은 개뿔. 그래 봤자 대자연의 일부 아냐?”
그럼 더듬을 수 있다.
그리고, 부술 수 있다!
마른 비는 모든 감각을 본능에 맡긴 채 왼 주먹을 휘둘렀다.
스아아악.
바람과 바람이 스쳐 지나는 소리.
귀청을 찢는 굉음도,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도 없었다.
하지만, 여파는 엄청났다.
스각!
백열갑의 일부가 잘려 나갔다.
퍼어억!
마른 비의 주먹이 터지며 백열갑의 잘린 부위로 피가 솟구쳤다.
후우욱―.
잔잔하게 잦아드는 기파.
전설의 경지라는 무형검이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이, 이럴 수는 없다! 시, 심검이…!”
운종학이 경악하는 사이, 마른 비는 눈을 번쩍 뜨며 전진했다.
“죽어.”
오른 주먹을 감싼 백색의 광휘.
백병전을 위해 진화시킨 서리불꽃이 운종학의 상체를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