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뢰창이 쪼개지고, 별비가 금빛 강기 덩어리를 막고 있을 때.
마른 비는 서리불꽃을 준비하고 있었다.
화기와 냉기를 융합할 때까지만 해도 필승을 자신했다.
하지만 주먹을 맞대는 순간, 마른 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뭐지? 저놈, 뭘 준비하는 거야?’
지극히 평온해진 기파.
검을 앞으로 내민 운종학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일검에 하늘을 쪼갤 듯한 패력이 사라지고,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고요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 안에서 몸서리쳐질 정도의 살의를 발견했다.
‘……안 돼. 서리불꽃만으로는 이길 수 없어!’
야생의 감각이 전하는 위험신호다.
세상 어떤 힘도 서리불꽃을 깨뜨릴 수 없다고 자신했지만, 그것만 믿고 있다가는 죽는다.
운종학은 지금 한계를 넘은 게 분명했고, 그렇다면 자신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야만 했다.
“무사할 거라 믿어. 고마워, 별비야.”
콰우우웅―!
서리불꽃을 쏟아내자마자, 마른 비는 움직였다.
목숨을 위협하는 무언가를 피해 즉각적으로 몸을 빼냈다.
‘좌전방.’
머리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본능이 몸을 이끌었다.
느린 시간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마른 비는 보았다.
서리불꽃이 둘로 갈리는 걸.
원래 자신이 있던 공간을 전율적인 기운이 가르고 지나가는 걸.
‘저게 뭐지?’
모르겠다.
다만 절대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건 알겠다.
지금 자신이 지닌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래도 이것밖에 없어! 믿어야 해!’
한 차원 앞선 시간의 영역에서, 마른 비는 또다시 서리불꽃을 연성했다.
몸은 이미 전진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나아가는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껏 축적한 전투 경험이 외쳤다.
무조건 간격을 좁혀야 한다고.
‘……!’
찰나를 쪼갠 시간 속에서, 마른 비는 보았다.
운종학의 고개가 돌아가는 걸.
놈은 자신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근거리에서 서리불꽃을 날리면…!’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운종학의 입가가 말려 올라가는 걸 봤을 때, 마른 비는 깨달았다.
그걸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무, 무형검…!”
송유일의 탄성이 들려왔다.
운종학이 구사한 기술의 이름인 모양이다.
그걸 듣고, 조금 전 서리불꽃이 쪼개지던 광경을 되새겼을 때, 마른 비는 깨달았다.
‘똑같아…!’
용형파천세, 제왕금룡파, 그리고 무형검.
셋의 공통점은 발출형 기공이라는 점이다.
운종학은 그런 종류의 검술이 장기인 듯했다.
‘무형…….’
형체가 없다는 뜻인데, 그것조차 발출형 검공의 형태로 구현됐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기! 나만의 특기를 살려야 해…!’
강점의 극대화.
무(武)란 그런 방향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
아버지는 서리불꽃이라는 희대의 절기를 만들어냈지만, 그 부분에선 미흡하셨다.
서리불꽃은 애초에….
‘이렇게 갔어야 해!’
마른 비는 단단히 포갰던 주먹을 뗐다.
발상이 정립되니 의지가 뻗어 나가고, 의지가 뻗어 나가니 몸이 그 의지를 구현한다.
운종학의 앞에 당도했을 때, 마른 비의 주먹엔 한없이 응축된 서리불꽃이 깃들어 있었다.
‘근접 백병전!’
그것이 자신의 특기다.
그것이야말로 와족이 천 년에 걸쳐 발전시킨 투술의 정수였다.
“이놈이…!”
운종학이 또다시 무형검을 시전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애처로울 만큼 떨리고 있었다.
‘느껴지지? 네가 곧 죽으리라는 게!’
자신이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운종학도 느꼈을 것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하지만 마른 비와 달리 운종학은 또 한 번 한계를 넘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악을 쓰며 외쳤다.
“허튼짓하지 마라! 볼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심검은 인간이 받아낼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니라!”
‘그러길 바라는 거겠지.’
마른 비는 운종학을 향해 돌진했다.
“무형검은 개뿔. 그래 봤자 대자연의 일부 아냐?”
보이진 않지만, 느껴진다.
대기에 녹아든 채 다가오는 살의의 덩어리가.
마른 비는 자신의 감각을 믿고 주먹을 휘둘렀다.
‘큭…!’
백열갑이 깎여 나가고, 주먹의 살점이 폭발하듯 터졌다.
하지만…!
‘부쉈어!’
무형검도 완전히 소멸했다.
믿음이 옳았던 것이다.
구현 방식이 아쉬울 뿐, 아버지가 창안한 서리불꽃은 필멸(必滅)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비기였다.
“이, 이럴 수는 없다! 심검이…!”
운종학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른 순간, 마른 비는 승리를 확신했다.
“죽어.”
무의 이치를 담은 정권이 서리불꽃을 인도한다.
마른 비의 주먹은 무형검을 연달아 깨부순 뒤에 운종학의 육신까지 꿰뚫었다.
퍼어억!
격전의 끝에 찾아온 타격음.
운종학의 상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공간 자체가 소멸한 듯한 광경이었다.
“후욱, 훅…….”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른 비의 숨소리만이 고요히 퍼지는 가운데,
“으아아아!”
환희가 폭발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펄쩍 뛰며 기뻐했다.
와족과 점창파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자축했다.
“비아야!!”
가장 먼저 달려온 건 노을이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마른 비를 부축하고, 끌어안았다.
흐르는 눈물이 얼굴에 묻은 피를 씻겨 주었다.
“흑! 나, 난 아까 네가 죽은 줄 알고…!”
노을은 마른 비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용맹하게 전장을 휘젓던 전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마른 비의 품에 안긴 노을은 연인을 걱정하는 한 명의 여인일 뿐이었다.
“괜찮아. 나 안 죽었어. 봐, 멀쩡해.”
멀쩡할 리 없다.
왼 주먹은 살점이 전부 터져서 뼈가 드러났고, 온몸에 낭자한 자상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희한한 건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았다는 안도와 승리의 기쁨이 가득할 뿐.
마른 비는 성한 손으로 노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다 끝났어. 힘들었지? 고생했어, 노을아.”
입술이 덮쳐온 건 그때였다.
마른 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것도 잠시, 마른 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환호와 부러움 섞인 야유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마른 비는 종전의 기쁨을 만끽했다.
“후우……. 원래도 괴물이었는데, 이젠 상대도 안 되겠네. 비아, 저 녀석은 참….”
여규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지만,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정사대전에서 죽어라 싸우고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점점 차이가 벌어지지? 여자 친구는 또 언제 사귄 거야?”
여규는 걸쭉한 욕설이 섞인 농담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의아해진 여규가 고개를 돌리며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중구야?”
“…….”
여규는 깜짝 놀랐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철중구가 저런 얼굴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여규의 놀람은 컸다.
“주, 중구야! 너 왜 그래?”
철중구는 입을 꾹 다문 채 마른 비와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표정.
마른 비의 승리가 기쁜 건 확실한데, 왜 슬픈 눈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야? 첫사랑에 실패한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네?’
철중구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코를 검지로 슥 문지른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후후. 그랬나? 그래서 내 매력이 통하지 않았던 거군.”
철중구는 홱 뒤돌더니 침묵에 휩싸인 투견대를 향해 외쳤다.
“아무 일도 없었다! 봐라, 얘들아! 얼마나 좋은 날이냐! 대단하지? 쟤가 바로 내 친구다!”
철중구는 환하게 웃었다.
미소를 뚫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함윤이 덩달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으욱…… 형님! 마음껏 우셔도 됩니다! 아무도 흉보지 않아요! 저희는 형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여규는 저도 모르게 주춤대며 물러났다.
‘뭐지? 투견대는 바보들의 집합소인가? 어떻게 하나같이 중구 같은 애들만 모아놓은 거야?’
여규는 갑자기 투견대가 무서워졌다.
계속 여기 있다가는 바보 병이 옮을 것만 같았다.
“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 중구.”
여규는 철중구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에 슬그머니 멀어졌다.
“하흑…!”
기괴한 비명이 들렸지만, 여규는 돌아보지 않았다.
‘몰라. 난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여규는 와족과 점창파가 모여 있는 곳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 * *
“끝났군요.”
신령목의 꼭대기.
가지와 잎에 가려져, 아래쪽에선 보이지 않는 곳에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그에게선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의 흔적은 물론,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생기마저 감지되지 않는다.
죽은 자가 걸어 다닐 리는 없으니, 생기까지 숨길 수 있는 은신술을 지녔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와족과 점창, 정도맹과 투견대가 밀집한 전장에서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사내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놀라운 건 그런 강자가 공손히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떠십니까, 주군?”
검은 옷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엔 달이 맺혀 있었다.
달빛이 후광처럼 비치는 가운데, 장대한 골격의 사내가 대꾸했다.
“쓸 만하구나.”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목소리.
사내의 옷은 오랜 여정을 거친 듯 닳고 닳아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게 있으니, 바로 의복 사이로 보이는 갑주다.
틈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치밀하게 세공된 철갑은 굉장한 실력을 지닌 명장의 작품이 분명했다.
미늘 하나하나에 섬세한 문양을 새겼으며, 그것들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역동적이었다.
전체적인 외형 또한 특이했다.
현 시대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형태.
머나먼 고대에 만들어진 역작이 분명했다.
주군이라 불린 사내는 마른 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 미숙하지만, 잠재력만큼은 근래에 본 누구보다 뛰어나다. 오스트갈, 그 아이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누군가가 들었다면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했으리라.
술력을 받은 천검.
그를 꺾은 마른 비를 가리켜 ‘쓸 만하다’고 했다.
어쩌면 천하제일일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말이다.
오스트갈은 또 어떤가.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힘과 지위, 명성을 감안하면 북원의 카안조차 그를 ‘아이’라고 부를 순 없다.
생김새로 봤을 때 한족이 확실하니 선조일 가능성도 없으며, 사내는 기껏해야 사십 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중원을 비운 사이, 징조가 나타났다고 했나?”
흑색 경장의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황공하오나, 주군께선 어떻게 예견을 하신 건지…….”
갑주를 걸친 사내가 서쪽을 바라봤다.
새카만 눈동자는 한 점의 빛도 들지 않는 심해를 연상케 했다.
어떠한 감정이나 욕망도 깃들지 않은 눈빛.
그나마 어렵사리 찾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무료함’이었다.
“서방을 휩쓴 검은 질병……. 그 역시 하나의 징조였다. 이제야 나타났다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사내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또다시 검은 꽃들이 피어나는가. 세상이 혼돈에 물들고 있구나. 혼세라…… 이 얼마만의 축제인지.”
흑의의 사내는 자신의 주군이 이토록 말을 많이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표정 변화는 없지만, 사내는 주군이 흡족해한다는 걸 깨달았다.
“주군. 저자가 마음에 드시옵니까?”
신령목의 아래.
식구들과 웃고 있는 마른 비가 보였다.
갑주를 걸친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떠올랐다.
그건 흥미로움이었고, 사내는 알 듯 모를 듯한 답변을 내놨다.
“언제나 그러했다. 튼튼한 나무는 변방의 척박한 대지에서 피어나는 법. 바로 이 세계수(世界樹)처럼 말이다.”
사내는 신령목을 찬찬히 훑어봤다.
과거에는 이런 나무들을 간간이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중원에는 오직 이 한 그루의 세계수만이 남았다.
사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수하는 그의 말을 필사적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마른 비가 주군의 눈높이를 충족시켰다는 걸 깨닫자마자, 지체 없이 여쭈었다.
“주군. 저자를 휘하로 거두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