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갑주를 걸친 사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웃고 있는 마른 비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아리송한 말을 꺼냈다.
“정파와 사파. 수백 년간 반으로 나뉜 채 싸워왔지만, 흑백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마른 비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인 걸까?
아니면 중원 무림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일까?
지금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흑의 사내는 공손한 자세로 주군의 말을 경청했다.
“필요하다면 거둘 수 있겠지. 힘으로 굴복시키든, 정신을 무너뜨리든, 인질을 잡든 말이다.”
주군이란 사내의 시선이 노을에게 향했다.
마른 비의 반려이자, 천하에 둘도 없는 여걸.
사내의 눈에 마른 비를 볼 때처럼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흑의 사내는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저 여인도 마음에 드시옵니까? 하명만 하소서. 수하로 부리든, 취하든 주군의 뜻대로 준비하겠나이다.”
자신감 넘치는 말이었다.
명만 떨어진다면 마른 비와 노을을 당장이라도 앞에 무릎 꿇릴 기세였다.
아니, 굳이 힘을 쓰지 않더라도 제압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흑의 사내가 명을 기다리자, 주군이라 불린 자가 처음으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불가능할 것이다.”
흑의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주군이 자신을 못 미더워한다고 여긴 듯했다.
그래서 행동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했다.
흑의 사내가 움직이려는 찰나, 주군의 말이 그를 멈춰 세웠다.
“오해하지 말라. 여기선 어려울 거라는 뜻이니까. 세계수의 손길이 미치는 영역에서 너의 힘은 급감할 것이다.”
흑의 사내는 흠칫하더니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무공 외에 자신하는 또 다른 힘이 아까부터 억눌린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령목을 내려다보다가, 나무의 영역 바깥에 서 있는 사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자의 경우와 비슷한 것이군요.”
갑주를 걸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 자체가 세계수의 기운과 상극인 저자와는 차이가 있다. 네가 여기 서 있는 게 그 증거지. 허나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하긴 어려울 것이다.”
주군이라는 사내도 사영을 보고 있었다.
그때, 여울이 마른 비와 함께 달려가서 사영에게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상처에 내려앉는 치유의 술.
하지만 술력이 닿자마자 사영은 끓는 물에 덴 것처럼 신음을 흘렸다.
여울이 깜짝 놀라며 안절부절못하자, 화통달이 나섰다.
백원약수공을 곁들인 손길이 닿은 뒤에야 사영은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았다.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더니 결국 성공했는가? 저자가 ‘그’의 작품인 모양이구나.”
주군이란 자는 사영을 아는 눈치였다.
흑의 사내가 지체 없이 대꾸했다.
“예, 주군. 불가능하리라 여겼는데, 결국 해낸 듯합니다.”
흑의 사내는 주인이 사영을 살필 동안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주군.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천인회라는 놈들에 대한 것인데….”
흑의 사내는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천인회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의 주인은 오랫동안 중원을 비웠고, 흑의 사내가 생각하기에 천인회가 지닌 힘은 특별하면서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주군은 묵묵히 보고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능자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구나.”
흑의 사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첫째는 주군이 천인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둘째는 ‘다시’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초능자……. 맞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무공도, 술력도 아니었습니다. 불가사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 주군, 그들이 과거에도 무림에 나온 적이 있습니까?”
주군은 대꾸하지 않았다.
흑의 사내는 저도 모르게 아쉬운 얼굴을 했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말했다.
“그들을 발견한 건 수라라는 놈을 관찰하면서였는데….”
흑의 사내는 전룡과 천인회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그러던 중 전룡이 북쪽으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주군의 눈썹이 꿈틀했다.
“북쪽? 북쪽이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놈은 초원을 넘어 빙궁이 있는 아라사로 떠났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천인회 또한 그 뒤를 따라서….”
흑의 사내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했다.
주군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
그건 이 사내를 모신 후 처음으로 보는 뚜렷한 감정이었다.
“재미있구나. 실로 재미있어.”
무지막지한 기운이 사위를 뒤덮었다.
흑의 사내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커, 커흑…!’
흑의 사내는 일문의 주인이자 ‘음지’의 절대 강자 중 일인이었다.
자신의 무공에 자부심이 있는 이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한때는 천하최강을 자신했었다.
양지로 나오지 않았을 뿐 항상 무림을 주시했으며, 현 시대에 이름을 날리는 누구와 붙어도 이기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것이다! 심혼이 짓눌리는 듯한 무위!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 남자를 만난 날, 처참하게 패했다.
그리고 평생 그의 종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했다.
흑의 사내를 경악하게 한 건 이토록 엄청난 기운을 흘리는데 누구도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흑의 사내는 내장이 진탕돼서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경의 어린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그리고 끝까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한때 최강을 자신했던 무인의 자존심이자, 그가 생각하는 충심의 발로였다.
“초능자들이 북쪽으로 갔다면 목적은 뻔하다. 마침내 ‘열쇠’를 찾은 거겠지.”
주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면 ‘그 녀석’만 깨어나는 걸로 그치지 않을 터. ‘대적자’가 눈을 뜨겠구나.”
마른 비를 봤을 때보다 흥미로워하는 느낌.
아니, 그보다는 반갑다는 어조에 가까웠다.
주군이 북쪽을 바라보며 짙게 웃었다.
“대자연의 기운이 충만했으나, 무의 기틀이 정립되지 않은 시절. 그리고… 기예는 절정에 달했지만, 숨결의 혜택을 받지 못한 시대.”
심해를 담은 듯한 눈이 더욱 새카맣게 빛났다.
“기대가 되는구나. 어느 쪽이 위일지.”
흑의 사내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그는 주군의 말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울컥 치솟는 핏물을 삼키고, 날아가려는 정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스아아악―.
어느 순간, 온몸을 짓이길 듯한 압력이 걷혔다.
흑의 사내는 그제야 살았다고 안도할 수 있었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감축드리옵니다, 주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주인이 즐거워하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상태가 어떻든 그걸로 충분하리라.
흑의 사내를 아는 자라면 눈을 비비고 봤겠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사내를 충심으로 모시고 있었다.
“저 둘이 마음에 드신다면 대령하겠나이다. 이곳에서 힘이 반감된다면, 바깥으로 나가는 대로 손을 써서….”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마른 비와 노을에게로 돌아왔다.
흑의 사내는 자신의 주인이 두 사람을 원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꾸가 없자, 흑의 사내가 황급히 말했다.
“수왕이란 자가 엄청난 힘을 선보인 것은 사실이나, 그건 술력과 나무의 힘이 합쳐진 결과입니다. 순수한 무력이라면 정도맹주가 패할 리 없지요. 그렇다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운종학과 동일선상에 놓는 자신감.
실제로 어떨지는 모르나 풍기는 느낌을 보면 근거 없는 허풍은 아닐 듯했다.
하지만, 주군은 고개를 저었다.
“놔두어라.”
“어, 어째서… 혹, 속하를 믿지 못하시는 거라면…!”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주군은 수하가 마른 비를 제압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그가 보기에도 무공 수위는 운종학이 분명 위였다.
순수한 무력도, 술력을 받은 후에도.
허나 싸움의 과정을 보건대 운종학은 절대 마른 비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볼만했지.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동하는 싸움이었어.’
열세를 뚫고 승리를 잡아채는 능력.
타고난 전투 감각과 백전으로 갈고 닦은 본능.
찰나의 순간에 깨달음을 접목하여 바로 행동에 나서는 과감함은 또 어떤가.
‘저건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다.’
심지어 그것을 뒷받침할 가르침과 실전이 풍부하게 더해졌다.
그래서 주군의 입가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더 기꺼운 건 저런 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는 점이다.
다른 시기에 태어났다면 능히 그 시대를 제패했을 재능들이 말이다.
물론 보고일 뿐이고, 천천히 확인해봐야겠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든 징조가 혼세의 도래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아니다. 조금 더 지켜보자꾸나.”
거두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직접 하면 그만이다.
흑의 사내를 휘하에 둔 것처럼.
주군이 마른 비를 두고 보기로 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기대가 되는구나. 어느 쪽이 나를 더 즐겁게 해줄지.’
만월이 차오른 밤.
새하얗게 쏟아지는 달빛 아래, 사내는 연륜을 초월한 눈으로 서 있었다.
* * *
풀로 뒤덮인 절곡이 마른 비 일행을 반겨주었다.
곳곳에 숨은 동물들이 호기심과 두려움 섞인 눈으로 인간들을 바라봤다.
야생곡(野生谷).
중원의 침공을 막아낸 와족 전사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이었다.
“와아…!”
점창파 무인들이 탄성을 질렀다.
투견대도 다르지 않았다.
천혜의 절경이 드리운 비처.
동식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그곳은 별세계처럼 보였다.
전상이 지배하는 영역이자, 코끼리 무리의 서식처.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골짜기는 이 세상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다행이야! 아이들도 모두 무사하구나!”
싸움을 할 수 없는 노약자들.
살아남은 와족의 식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 나왔다.
운남에 퍼진 검은 기운 때문에 짐승들을 신령목으로 대피시켰을 때, 너른 하늘은 전상에게 부탁했다.
전쟁이 벌어질 동안 이들을 야생곡에 머물게 해달라고.
전상은 흔쾌히 수락했고, 코끼리 무리의 일부를 남겨 노약자들을 보호했다.
거악이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시기를 와족 덕분에 무사히 넘겼기 때문이다.
각성수들이 와족을 도운 데는 마른 비와의 친분만이 아니라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정말 전쟁이 끝났구나. 이제야 겨우 실감이 돼…….”
와족은 물론이고 점창파와 투견대도 야생곡에 당도한 뒤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여울과 화통달 덕분에 육신의 부상은 치료했지만, 정신적인 긴장과 피로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부터……. 그리고 한동안 푹 쉬자.”
할 일을 마치고 이틀 밤낮을 푹 잤다.
그러곤 배를 채운 뒤 여기저기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점창도, 투견대도, 곧 돌아가야 해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와족 특제 청죽사주요. 한번 잡숴 보실라우?”
산과 철중구는 죽이 잘 맞았다.
사나이에 대한 관점이 비슷하다는 점이 둘을 금세 친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산이 애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철중구는 풀이 죽었다.
“장문인이 되신 걸 축하드리오.”
안개걸음과 공유립의 조합도 볼만했다.
차분한 성격의 두 사람은 바위에 걸터앉아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 어스름이라고 하네. 앉아도 되겠나?”
가장 의외인 건 사영과 어스름이었다.
둘 다 은신과 암습이 장기라 그런지 친근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은 이야기하다가 자주 말이 끊겼는데, 둘 다 대화에 서툴기 때문이었다.
사영과 어스름은 느릿느릿 말을 주고받다가 할 말이 없으면 멍하니 앉아서 풍경을 감상했다.
옆에서 보기엔 어색해 죽겠는데, 둘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내 멀리서 봤는데 엄청나시더군. 십좌에 비견할 만한 무위라니! 육시랄 놈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소!”
시선을 가장 많이 받은 건 세 명의 노인이었다.
그믐, 설지굉, 화통달.
그믐은 비슷한 또래를 만난 게 즐거운 듯했고, 화통달은 원래 어딜 가든 잘 어울리는 성격이다.
시원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욕설에 그믐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반면 사교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설지굉은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냐는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젊은이들은 체술과 검술, 의술에서 일가를 이룬 그들에게 무언가 배울 게 있을까 싶어 서성댔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어 괜찮은 친구를 만난 게 기꺼울 뿐.
설지굉도 표정과 달리 싫지는 않은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점창파 제자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우리 장로님이 변했다며 수군댔다.
“대장! 얘네랑 한판 붙어도 됩니까?!”
가장 시끄러운 건 봉검, 운검대와 투견대였다.
그들은 묘한 경쟁의식을 드러내며 서로를 견제했다.
하지만 전상이 째려보자 고개를 수그렸고, 무공 대신 내기를 시작했다.
종목은 내공 없이 청죽사주 마시기였는데, 중원의 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독함에 한 시진도 안 돼서 전부 뻗어버렸다.
“뭐 이런 멍청이들이…….”
여규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쉴 때였다.
한 남자가 환히 모습을 드러낸 채 야생곡 입구로 진입했다.
골짜기 여기저기에 널브러졌던 자들이 벌떡 일어서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여기엔 고수 아닌 이가 없었고, 세 집단이 뿜어내는 살기에 공간이 일그러질 지경이었다.
“대, 대협! 접니다, 장오!”
후개의 명을 받고 마른 비를 찾아온 남자.
장오는 허옇게 질려서 식은땀을 흘렸다.
“개방? 아직도 있었어?”
마른 비가 묻자, 장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대협! 전쟁 내내 멀리서 대기했습죠! 충분히 쉬신 듯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마른 비가 눈짓하자,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뭐야? 개방인가?”
“깜짝이야. 적인 줄 알았네…….”
“우린 적 맞는데? 수왕 형님이 괜찮다니 뭐….”
일행은 다시 엎어져서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쳐다보지 않을 뿐, 온갖 종류의 기파가 물밀 듯이 쏟아진다.
장오는 침을 꿀꺽 삼킨 뒤에 천천히 마른 비에게 다가왔다.
“대협. 전후 처리를 위해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장오는 기가 질리는지 슬쩍 눈을 들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진지한 얼굴로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