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 * *
금으로 양각된 용.
벽면에 새겨진 조각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역동적으로 꿈틀댄다.
용은 사해를 굽어보고 있었는데, 온 천하의 백성들이 두 손을 모은 채 용의 비상을 우러르고 있었다.
질 좋은 석재를 엄선했다 하나, 돌에 새겨진 백성들과 금으로 조각된 용은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다.
뚜벅, 뚜벅.
반대편 입구가 작은 점으로 보일 만큼 길고 긴 복도.
마른 비가 안내인과 함께 통로에 들어섰다.
마른 비는 벽면을 보자마자 툭 뱉었다.
“요즘 살만한가 보네?”
안내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마른 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명장의 솜씨가 분명한 걸작을 감상했다.
“이야, 대단한데?”
복도의 양 벽면은 하나의 그림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이 천하를 일주하는 가운데 중원의 명승지와 절경을 굽어본다.
은으로 조각된 명소들에는 그 장소와 연관된 역사적 위인이 새겨져 있었다.
재미있는 건 위인들도 용을 우러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용을 부러워하고 숭앙하는 것처럼.
“자화자찬이 너무 과한 거 아냐?”
안내인은 또다시 휙 돌아서 마른 비를 째려봤다.
하지만 핀잔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다.
커다래진 눈은 ‘당신, 그러다 죽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가.”
벽면의 상부와 천장 사이에는 빗살무늬 형태의 창이 뚫려 있었다.
그리로 햇살이 들어와 벽면을 비췄는데, 그로 인해 금과 은으로 된 조각들이 영롱하게 빛났다.
빛을 내지 않는 건 오직 백성들뿐이었다.
“이해가 안 되네. 하려면 똑같이 귀금속을 쓸 것이지……. 설마 백성들만 일부러 돌에 새긴 거야?”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안내자는 어깨를 떨어뜨린 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끼이이익.
건너편 입구에 도달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문이 활짝 열렸다.
마른 비는 계속 걸으며 세 달 전 야생곡을 나온 날을 떠올렸다.
“꼭 가야 해?”
노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여규와 철중구는 물론이고 그믐까지 마른 비를 말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위험하니까.
“아냐.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어쩌면 최상의 방법일지도 몰라.”
사영만 마른 비의 의견에 찬성했다.
지금 여길 방문하게 된 건 장오가 꺼낸 이야기 때문이었다.
“대협, 우선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용병연합에 이어 사천 무림과 사도칠문, 정도맹까지…! 이 전쟁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겁니다!”
장오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일 만했다.
중원의 세력 판도를 통째로 뒤흔든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금광을 노리고 운남에 들어온 수천 명이 몰살했으며, 상대는 세상에 처음 이름이 알려진 원시 부족이다.
정파와 사파를 대표하는 간판 세력들이 줄줄이 깨져나갔고, 한 개 성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한 사례는 전무후무했다.
화룡점정은 역시 운종학과의 일전이다.
패군과 더불어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양대 산맥 중 하나를 깨부쉈으니까.
이게 알려지면 온 천하가 진동할 게 분명했다.
“천하제일인! 무림인의 상당수가 대협을 최강의 무인 아니, 전사로 인정할 겁니다!”
살기에 눌려서 허옇게 질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장오는 상기된 얼굴로 침까지 튀기며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마른 비는 담담했다.
“전투화장과 신령목 덕분에 가능했던 거야. 순수한 내 힘이 아닌걸.”
마른 비는 스스로의 힘을 과장하지도, 폄하하지도 않았다.
허나 그 객관성과 차분함이 마른 비를 더욱 거물처럼 보이게 했다.
“술력을 받은 건 맹주도 마찬가지였죠. 실전에 조건은 무의미합니다. 이긴 건 이긴 겁니다! 대협께선 자그마치 오십 년의 격차를 추월했다고요!”
장오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사문을 핍박한 맹주가 무척이나 아니꼬웠던 게 틀림없다.
철중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참……. 어이, 개방 형씨. 맹주가 죽고, 사대 무력 단체가 전멸했어. 정도맹이 무너질 판인데 웃음이 나와? 뭐, 나야 반가운 일이지만….”
장오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여규가 답변을 내놨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건재하잖아. 알다시피 그들이야말로 정파의 진정한 저력이야.”
여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맹주만큼 강한 사람은 없겠지만, 또 모르지. 백 년간 이어진 원의 지배 하에서 그들이 얼마나 힘을 키웠을지……. 정사대전 때도 알려지지 않은 강자들이 무수히 튀어나왔잖아. 아무튼 큰 타격이긴 해도 정파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야.”
“음……. 맹주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의외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내.
마교 출신이자, 마른 비 외에는 별다른 친분이 없는 사영이 끼어들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아야, 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사실 맹주가 살아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백 번 죽여도 모자랄 놈이지만, 정세가 심상치 않아.”
“정세라니? 설마…?”
그러고 보니 사영은 맹주에게 돌아가서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했다.
마른 비가 말을 흐리자, 사영이 대꾸했다.
“그래. 본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내가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점창파와 투견대는 기겁한 표정이었다.
중원 무림인에게 마교란 공포의 대명사였고, 역대 천마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천하제일을 논할 때 빠진 적이 없다.
마교가 새외의 세력인 데다 악의 근원처럼 여겨져 그 수장인 천마를 암묵적으로 배제할 뿐.
“마교 아니, 천마신교가 남하한다고? 이 시기에?!”
천검이 죽었으며, 정도맹이 무너졌다.
패군이 부상을 입었고, 그 결과 사도련은 장강수로맹과 내전을 치를 판이다.
한데 이 시점에 마교가 밀고 내려온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하, 하지만 천마신교는 지금 내란이 일어난 게…!”
사영은 일행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맞아. 알다시피 본교는 내전 중이다. 나와 소교주님은 반란세력과 사투를 벌이고 있지.”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다고?
천마의 후계자인 소교주가 버젓이 살아 있는 상황이다.
반란세력의 입장에선 소교주를 제거하기도 바쁠 텐데, 중원 침공이라니?
그렇다면 판세가 기울었거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형님. 마교가 지들끼리 싸운다는 게 뻥 아닙니까? 그것조차 술책일 수도….”
함윤의 의심은 타당했다.
그는 야투에서 일어난 일을 보지 못했으니까.
철중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란이 벌어진 건 맞다. 소교주와 권마. 그들이 환마와 싸우는 걸 똑똑히 봤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변하게 된 그날을.
철중구가 팔짱을 낀 채 이를 악다물었다.
정신없이 지냈지만, 그는 잊지 않았다.
환마가 야투에서 무언가 일을 꾸몄고, 자신을 치우려 했던 사실을.
일행은 마교 내부의 사정이 궁금했지만, 사영에게 그 이상을 묻는 건 불가능했다.
“영이 네 말은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뜻이구나? 마교의 침공을 막으려면.”
마른 비가 말하자, 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성 강한 문파들을 통솔할 수 있는 지휘자.
사영이 운종학이 살아 돌아갔으면 했던 이유였다.
운종학은 압도적으로 강했으며, 그 역할을 잘 해냈으니까.
그는 구파와 오대세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맹주가 독단적으로 운남에 내려온 이후, 탄핵에 관한 논의가 진행 중이었으니까요.”
장오는 장내의 인물 중 유일하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마교의 준동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개방이 알아챘다면 구파도 전해 들었을 것이다.
탄핵은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됐지만, 운종학이 멋대로 운남에 내려와 죽는 바람에 맹주 자리가 공석이 됐다.
거기에 마교의 일까지 겹쳤으니 차기 맹주를 뽑는 일은 발빠르게 진행될 터였다.
중원 무림인에게 마교의 침공만큼 섬뜩한 일은 없으니까.
“탄핵 말입니까?! 저흰 금시초문인데….”
공유립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장오는 아차 하는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음, 그게… 점창은 전 장문인 건으로 인해 이번 논의에선 배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장문인.”
“……그렇군요. 아닙니다. 물의를 일으킨 저희가 사과할 일이지요.”
공지량이 벌인 짓이 있는데 무슨 말을 할까.
무엇보다 구파의 탈퇴를 선언한 이상, 점창은 더 이상 정도맹 산하가 아니었다.
아무튼 결론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고, 각자 자신의 위치로 최대한 빨리 복귀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야기가 샜군요. 제가 대협을 찾아뵌 목적은….”
장오는 그제야 마른 비를 찾아온 이유를 꺼냈다.
그걸 들은 마른 비는 다음 날 친구들이 떠날 때 함께 야생곡을 나왔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오랜만이군.”
“……!”
묵직한 목소리가 마른 비의 상념을 깼다.
복도의 끝.
거기엔 휘황찬란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러네. 오랜만이야, 아저씨.”
방의 중앙엔 화려한 옷을 걸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백색의 제의(帝衣)에 수놓인 금빛 용의 물결.
허나 용포보다도 시선을 잡아끄는 건 그걸 걸친 남자였다.
길바닥에서 시작해 천하의 정점에 오른 자.
주원장은 전보다 더욱 거대해진 존재감으로 마른 비를 굽어보고 있었다.
‘……아냐. 분명 더 커졌지만, 예전이 오히려….’
욕망을 위해 인간을 장기판의 졸로 쓰는 자.
그리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을 버리는 비정함.
소교주가 배신당했고, 상우춘이 숙청당했다.
그 외의 얼마나 많은 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것인가.
많은 경험을 쌓고 무수한 일을 겪은 지금, 마른 비는 주원장이 전처럼 커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수척해졌어? 원하는 걸 얻었는데 말이야.”
뼈가 담긴 말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백성을 평안케 할 것이다.’
솔직한 선언이며, 주원장은 일정 부분 그 말을 지켰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원 시기보다는 나아진 백성들의 일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허나 크게 달라진 점이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약자들이 신음하는 건 똑같으며, 수탈의 주체가 바뀌었을 뿐이니까.
옥좌에 앉은 주원장은 백성의 평안보단 후대에 위협이 될 공신들을 숙청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백성을 도구로 삼는 군주의 한계였다.
‘이 사람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아. 죽을 때까지 긴장하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른 비는 주원장을 둘러친 후광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마른 비는 긴장의 작은 찌꺼기까지 던져버린 뒤에 말했다.
“아저씨. 중원 무림이 내 고향을 침략한 건 알지?”
주원장은 미동도 없이 대꾸했다.
“그래. 엄청난 일을 저질렀더군. 요 몇 달간 들려오는 건 전부 자네와 자네 부족의 이야기였네.”
마른 비 역시 여기까지 오면서 질리게 들었다.
하도 그 이야기뿐이라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오는 내내 일체화를 펼쳐야 했을 정도로.
마른 비는 주원장과 눈을 맞춘 뒤에 말했다.
“전후 처리 때문에 왔어. 날 좀 도와줬으면 해.”
장오는 말했다.
당장은 마른 비의 힘에 눌려 조용하겠지만, 침공은 끊이지 않을 거라고.
훨씬 교묘하고, 비열하며, 강대한 손길이 들이닥칠 거라고 말이다.
그건 금광을, 영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계속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장오는 은근슬쩍 정도맹 가입을 제의했다.
와족이 정파의 일좌를 차지하면 최소한 천하의 절반은 억누를 수 있으며, 유사시엔 정도맹이 방패가 되어줄 거란 뜻이었다.
정도맹을 몰살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자, 그건 개방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나와 친분을 다지는 동시에 우릴 정파로 끌어들여서 공을 세우겠다는 거겠지. 후개다운 발상이네.’
하지만 마른 비는, 와족은 어떤 세력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아귀다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니까.
그래서 마른 비는 말했다.
개방의 도움을 잊지 않겠다고.
하지만 우리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고.
그에 대한 해결책이 지금 꺼내는 말이었다.
“아저씨. 황제의 권한으로 영묘 아니, 금광을 우리의 영토로 공인해줘. 신령목이라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