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뭐, 뭐라고?!”
황제의 신하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그들은 상상도 못 한 발언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영토를 내달라……. 한족을 제어해 달란 뜻이로군. 짐의 공식적인 선언으로 말이지.”
하지만, 주원장은 담담했다.
그는 마른 비가 이 말을 꺼내리라 예상한 눈치였다.
주원장은 차분한 어조로 마른 비에게 물었다.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르겠군. 아니면 그냥 뻔뻔한 건가? 자네는 국문이나 다름없는 거용관을 부수고, 관군을 따돌렸네. 내 얼굴에 먹칠을 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마른 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사정을 알잖아. 많이 급했다는 거. 관군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하는 거 같진 않은데?”
주원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온 천하는 짐의 땅이다. 영지를 하사하더라도 그건 내 영토를 잠시 맡기는 것일 뿐. 자네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지 않나?”
“맞아. 황제의 이름으로 그 땅이 와족의 소유라는 걸 공언해 달라는 거야. 다른 놈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신하들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폐하! 더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릴…!”
“오만불손한 놈 같으니! 태도부터 용납할 수 없도다! 감히 폐하께 저따위 말투로…!”
주원장이 손을 들어서 신하들의 불만을 억눌렀다.
“경들을 만나기 전에 맺은 인연이다. 짐은 괘념치 않으니 잠자코 있도록.”
날카로운 눈빛이 마른 비를 향했다.
“예외란 한 번 만들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지지. 자네, 지금 내게 그런 전례를 만들라는 건가?”
마른 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맞아. 그렇게 해줘.”
정적이 흘렀다.
마른 비는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를 했고, 주원장은 이상할 정도로 아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적어도 신하들이 보기엔 그랬다.
신하들은 알현을 허락한 것부터 못마땅했으며, 그들 중엔 마른 비가 황성에 찾아왔을 때 당장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한 자도 있었다.
“막무가내로군. 심지어 거긴 단순한 땅이 아니지 않나?”
주원장이 옥좌 옆에 있는 탁자에서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영롱한 빛을 내는 금광석.
그건 척 봐도 영묘에서 나온 게 틀림없었다.
“운남에서 살아나온 자들은 자네가 무척이나 미운 모양이야. 내게 이걸 바치더군. 황실로 하여금 자네에게서 금광을 빼앗게 할 속셈이겠지.”
맨 처음 영묘에 도착해 금광을 확인한 무인들.
그들이 들고 나온 금광석이 돌고 돌아 주원장에게까지 왔다.
동료와 사형제를 잃은 자들이 마른 비에게 복수하기 위해 머리를 굴린 것이었다.
“왜 말을 빙빙 돌려? 아저씨답지 않게.”
마른 비가 눈썹을 찌푸렸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주원장이 된다, 안 된다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말을 끄는 걸 눈치챈 것이다.
마른 비는 서로 다 아는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듯 손을 저었다.
“금광……. 무림인에게는 눈이 뒤집힐 일이지만, 아저씨에겐 아니잖아?”
운남 끝까지 내려와 금을 채굴한다?
일반 병사들은 당해낼 수 없는 맹수들을 뚫고?
못할 건 없다.
아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며, 황실로서도 절대 내주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황권 강화와 초원 정벌로 눈코 뜰 새 없는 지금, 땅끝에 있는 금광까지 욕심낼 정도로 주원장은 미련하지 않다.
무엇보다 마른 비는 주원장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결단을 내리는 걸 도와줄게. 운남에 한족이 머물 곳이라곤 대리와 곤명뿐인 건 알지? 통치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변방의 조그만 땅. 그리고 아저씨의 목숨. 어느 쪽이 중요해?”
“……!”
신하들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마른 비의 말을 황제에 대한 협박으로 이해했다.
“이런 찢어 죽일 놈이…!”
주원장 옆에 있는 사내가 검을 뽑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는 듯 없는 듯했는데, 한순간 살기가 폭발적으로 끓어올랐다.
그리고 사내가 흘리는 기운은 마른 비에게 상당히 익숙했다.
‘이것… 표금산과 같은…!’
집요하게 쫓아와 배에 검을 꽂았던 주원장의 사냥개.
사내는 표금산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나이는 그보다 많으며, 더러운 느낌은 덜했다.
하지만 힘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사내의 무공 수위는 놀랍게도 그믐에 비견할 정도였다.
‘표금산의 후임인가? 어디서 이런 놈을 데려온 거지?’
느낌이 온다.
이놈과는 악연으로 엮일 거라는 게.
그렇다면 작심하고 기를 눌러놓을 필요가 있었다.
“어디서 살기를 뿜어? 죽고 싶어?”
마른 비는 눈에 힘을 주며 그를 바라봤다.
상대도 엄청난 강자지만, 운종학을 꺾은 마른 비의 기세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이놈이…!”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빛에 담긴, 소름 끼치는 살의.
사내는 그것만으로 마른 비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일전을 겨루려 했다.
그가 검의 손잡이를 쥐는 순간!
“물러나라! 누가 멋대로 나서라고 했나!”
주원장이 호통을 쳤다.
그러곤 마른 비에게 말했다.
“도발과 경고. 이토록 호전적인 모습이라니……. 자네, 변했군. 내가 아는 그 소년이 맞는 건가?”
마른 비는 지체 없이 대꾸했다.
“많은 일이 있었거든. 아저씨도 변한 건 마찬가지야.”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마른 비는 그간의 감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했고, 주원장이 그걸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황제의 호위들이 뿜어내는 살기가 황궁을 삼킬 듯이 폭증했다.
마른 비가 주원장과 눈을 맞추다가 조용히 말했다.
“무작정 떼를 쓰는 게 아냐. 위협을 한 것도 아니고. 아저씨의 안위에 관계된 것만 아니면 무엇이든 청을 하나 들어준다고 했지? 그 약속을 지키라는 거야.”
구명지은.
사영의 암습에서 주원장을 지켰을 때의 약속을 말함이다.
마른 비는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약속을 꺼내들었다.
주원장은 담담했다.
마른 비가 알현을 요청했을 때부터 모든 걸 예상한 것처럼.
“후후. 영토와 내 목숨 중에 무엇이 중하냐고 묻다니…….”
부드럽게 표현해도 될 일을 도발적인 언사에 실었다.
그간의 관계에 선을 긋는 동시에 약속을 지키라는 우회적 압박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짐에게 말이지.”
참으로 놀라운 배짱이 아닌가.
주원장은 마른 비를 휘하에 두고 싶단 욕심이 다시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주어야겠군. 줄 수밖에 없겠어.”
“폐, 폐하…!”
신하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일렀다.
“금광과 나무가 있는 땅. 이 시간부로 그건 자네 부족의 것이네.”
“고마워, 아저….”
주원장은 손을 들어서 마른 비의 입을 막았다.
그러곤 덧붙였다.
“허나 그 정도로 내 목숨값을 지불하기엔 싸지. 해서….”
주원장은 다음에 이어질 반응을 기대하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했다.
“운남 전체를 자네의 영역으로 선포하겠네.”
“……!”
경악이 일었다.
신하들은 너무 놀라서 입을 열지 못했고, 마른 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남 전체를? 그건 너무 과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주원장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지. 그래서 그만큼의 일을 자네가 더 해주어야겠네.”
주원장은 똑똑히 들으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오스트갈. 중원에 들어온 그놈이 잠적해버렸어. 바투와 무칼리까지 대동한 채로. 황궁을 뚫지 못하면 초원으로 돌아갈 줄 알았거늘…….”
이번만큼은 마른 비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최대의 난적.
모두의 예상을 깨부수고 중원에 난입한 초원 최강의 무장은 또다시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그렇다면 오스트갈이 노리는 건 뻔했다.
“중원은 넓어. 어딘가에 숨어 힘을 기르며 기회를 엿보고 있겠지. 놈은 나를 쓰러뜨릴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이게 주원장의 본심이리라.
서달이 초원에 올라가 있고, 상우춘이 죽은 지금, 오스트갈은 발밑에 숨은 비수나 다름없다.
오스트갈을 잡는 데 힘을 빌려달라는 것.
주원장이 말을 늘이고,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가 그 청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싫어. 난 더 이상 아저씨를 위해 싸우지 않아.”
영묘와 신령목이 와족의 것이란 걸 공인받기만 하면 된다.
아무런 실익이 없는 조건 때문에 피를 흘릴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마른 비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부족을 지켜준다고 들었네. 이번에 상당한 숫자가 희생되었다지?”
주원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태고의 자연이 보존된 천혜의 땅. 거기서 또 뭐가 나올지 누가 알겠나? 분명 운남을 뒤지는 자들이 나올 테지.”
황제의 칙령으로 금광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와족과는 싸울 이유가 사라진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운남을 배회할 거다.
그 과정에서 지형을 잘 아는 소수부족이 희생될 건 뻔한 일이었다.
“운남을 수왕의 영역으로 선포하면 그들의 안전이 확보될 걸세. 숭산 일대가 소림의 영역으로 여겨지며 인근의 백성들이 혜택을 받는 것처럼 말이야.”
행정적, 실질적 차원의 점유가 아니다.
실제로 그 넓은 땅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주원장이 말하는 건 강호무림에서 일컬어지는 ‘영역’의 개념이었다.
주원장은 마른 비가 했던 질문을 똑같이 되물었다.
“묻지. 자네의 노고와 소수부족들의 목숨. 어느 쪽이 더 귀중한가?”
마른 비는 주원장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거래.
주원장은 전처럼 호의에 기초한 도움이 아닌, 거래를 제시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네.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식구들과 소수부족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니까.
“으음……. 폐하께서…!”
신하들은 황제가 명령이 아닌 거래를 요청했다는 데 기막혀 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 부분에 대해선 별 감흥이 없었다.
자신은 한족이 아니며, 주원장은 자신의 군주가 아니니까.
또다시 손에 피를 묻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착잡할 뿐이었다.
“오스트갈……. 바투와 무칼리도 있다고 했지? 찾으면 사람을 보내줘. 그때까지 난 좀 쉬고 있을 테니까.”
“잘 생각했네. 서로에게 최선이 될 것임을 보장하지.”
주원장과의 담판을 마친 마른 비는 왔던 길을 유유히 되돌아 나갔다.
표금산의 후임으로 임명된 사내는 마른 비의 뒷모습을 노려봤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운남으로 돌아가는 길.
항구, 주점, 객점, 노상의 가판대와 민가에서까지.
마른 비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
‘벌써 퍼졌어? 엄청 빠르네. 마음이 급했구나?’
주원장의 일처리는 신속했다.
황제는 공식적으로 금광이 수왕의 것임을, 그리고 운남이 그의 영역임을 선포했다.
“수왕이 또 일을 저질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개 야만인이 폐하와 담판을 지었다고?!”
“금광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운남이라니! 성 전체가 백 명이 될까 말까 한 원시부족의 영역이라고? 황제가 미친 것이냐?!”
파급력은 대단했다.
호사가들은 수천 명이 몰살한 금광 쟁탈전을 되새기며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운남 야수족! 그들이 소림과 무당보다도 강한 것 아니야?!”
“천검을 꺾었어! 수왕이 바로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이다!”
온 천하가 마른 비의 이야기로 들끓었다.
구파와 사도칠문의 장문인들은 물론이요, 천마와 패군까지 수왕의 아래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전투화장? 요상한 술법을 받았다며? 그건 진짜 힘이 아니지!”
“술력을 받은 건 천검도 마찬가지다! 이긴 건 이긴 거야!”
힘의 우열을 가르기 좋아하는 자들은 끝도 없이 싸워댔다.
그리고 오랜 논쟁 끝에 논의가 좁혀졌다.
십좌 위에 선 일인.
세인들은 마른 비에게 제(帝)의 칭호를 붙이기에 이르렀다.
“스물셋! 그 나이에 천하최강의 반열에 오른 자가 있었던가…!”
“황제에게 자신의 영역을 공언 받은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운남의 패자.
야수들의 군주.
남쪽 하늘의 제왕.
마른 비에게 따라붙는 칭호였다.
남제(南帝)의 전설 같은 일화가 온 천하를 뜨겁게 달궜다.
“출출하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관심이 없었다.
철중구라면 ‘나 여기 있소!’ 하고 길거리를 활보했겠지만, 마른 비는 별비와 함께 아무도 없는 숲길로 이동했다.
〔뭐 먹고 싶냐? 멧돼지? 사슴? 말만 해라, 비아야! ‘별비신검’으로 먹기 좋게 토막을 내주마!〕
별비는 왕문이 준 검에 이름까지 붙였다.
그리고 전투가 없을 때는 도축용 칼이라는 본래의 용도에 맞게 활용했다.
중원인들은 남하하는 마른 비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다 왔어. 집이다!”
그렇게 석 달.
마른 비는 청죽림에 당도했다.
쪽빛의 대나무는 보는 것만으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땅! 땅! 따앙―!
왕문과 아창족 철장들은 아예 청죽림으로 옮겨와 전사들의 무구를 손보는 중이었다.
여울은 화통달에게 달라붙어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유사시에 전사들을 완벽하게 보조하고 싶은 것이리라.
마른 비를 발견한 아이들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형이다! 비아 형이 왔어!”
그믐, 어스름, 산, 안개걸음이 마을 중앙의 회의실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오는 여인.
노을을 보는 순간, 마른 비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잘한 거야. 옳은 결정이었어.’
순진무구하게 웃는 아이들을 안아 올리며, 마른 비는 주원장의 제의를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아름다운 미소를, 평온한 삶을 지켜 주리라.
선조들과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힘을 지닌 자의 책무였으니까.
“다녀왔어.”
마른 비는 달려와 안기는 노을을 힘껏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