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설 할아버지가 안 보이네? 떠났어?”
마을의 공터로 가는 길.
마른 비가 노을에게 물었다.
설지굉은 공유립과 여규의 간곡한 설득 끝에 다시 점창에 몸담게 됐다.
하지만 점창파가 야생곡을 떠날 때 함께 가진 않았는데, 늘그막에 만난 그믐과 화통달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설지굉은 마른 비가 자란 마을이 궁금하다는 핑계를 대며 두 사람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아, 마을에 한 달쯤 계시다가 사천으로 떠나셨어.”
“사천? 거긴 왜?”
마른 비가 묻자, 노을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어. 매듭을 지어야 할 일이 있다고만 하시더라. 할아범에게도 당가에 갈 계획이란 것만 말해주셨대.”
“당가라고?”
설지굉이 점창에 입문한 이유.
설검대를 키우고, 공지량의 지시를 수행하며 대장로가 되려 했던 까닭.
그건 새파랗게 어린 청년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회안검 선배.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그러고도 무림의 선배로 존중받길 바라십니까? 한평생 정파인으로 지내고도 선배는 정도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릅니다.’
십여 년 전, 설지굉의 어깨에 비수를 박아 넣고 훈계를 늘어놓은 당가의 애송이.
지금은 당가의 가주가 된 당문휘가 그 장본인이었다.
설지굉은 당문휘에게 복수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나, 설검대와 팔 한쪽을 잃고 나서야 그 말의 뜻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제는 정확히 안다.
당문휘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늘어놓았는지.
설지굉은 당문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분명 한판 격돌이 벌어지겠지만, 그건 원한이나 증오와는 거리가 먼, 순수한 비무가 될 터였다.
“음……. 당가라니….”
당가는 와족의 기습으로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정사대전이 끝나고 돌아와, 몰살한 식솔들을 본 당문휘는 피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와족에 대한 복수를 포기했다.
누가 잘못을 저지른 지는 명백했기 때문이다.
지금 마른 비의 손엔 당문휘가 청죽림으로 보낸 서신이 들려 있었다.
거기엔 승전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원한을 잊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전처럼 가깝게 지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고.
당문휘처럼 서신을 보내진 않았지만, 그건 청성파 영송과 아미파 월연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별일 없겠지?”
노을이 묻자, 마른 비가 답했다.
“그럴 거야.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설 할아버지는 정말 많이 달라졌으니까.”
저 멀리, 부족 식구들이 공터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마른 비는 웃음을 띤 채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됐어.”
식구들이 모인 자리.
마른 비는 마을의 공터에서 황궁을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래서 다시 중원으로 간다고?”
노을이 낮은 어조로 물었다.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눈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마른 비는 볼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으, 응, 노을아. 그렇게 됐어.”
아무도 말이 없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시간만이 고요히 흘렀다.
〔분위기가 왜 이래?〕
별비가 눈치를 보며 중얼댔다.
마른 비도 생각지 못한 반응에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안전하게 지내려면 그게 최선이었어. 괜찮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황군이 싸울 때 돕는 정도일 거야.”
식구들이 마른 비의 결정을 이해 못 할 리 없다.
헤어지는 게 서운하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전장에 뛰어드는 게 안타까워서 그러는 것이리라.
마른 비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을 때였다.
“걱정은 무슨. 우리가 널 걱정할 거 같냐?”
산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툭 뱉었다.
‘어? 왜 이러지?’
뭔가 평소의 식구들과는 다른 반응이다.
마른 비가 당황해서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푸핫! 이거 봐! 내 말이 맞지? 비아 이놈은 엉덩이 붙이고 살 팔자가 아니라니까?”
산이 와락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저기서 한숨을 쉬며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게 보였다.
평소에 쉽게 구할 수 없는 먹거리들.
식구들은 내기를 한 게 분명했다.
“그럴 줄 알았다, 인마! 너 또 집 나갈 줄 알았어!”
산이 마른 비의 등짝을 치며 웃었다.
마른 비가 벙 찐 표정을 짓자, 산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비아야. 그동안 고생 많았다. 혼자라서 힘들 때도 많았지? 이제 걱정 마라. 우리가 함께할 테니까.”
“어… 어?”
안개걸음이 다가오며 말했다.
“뭘 놀라? 못 알아들어? 우리도 같이 갈 거라고. 회의를 통해 결정한 일이다.”
노을도 일부러 굳혔던 표정을 풀며, 보기 좋게 미소 지었다.
“그래, 같이 가. 그리고 함께 싸우자. 우리도 중원 구경 좀 해야지. 가만히 놔둘 수 없는 놈들도 있고.”
백수교.
그리고 놈들에게 끌려간 하얀 깃.
하얀 깃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지만,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
또한, 노을은 백수교에게 선포했다.
너희는 이 순간부터 우리의 적이라고.
“출발할 준비 다해놨다. 무기 수리가 끝나는 대로 갈 거야. 우리도 너 따라서 세상 구경 좀 해보자.”
산이 말하자, 노을이 웃으며 덧붙였다.
“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어? 한마디 해. 중원에 가면 네가 우릴 이끌어야 하니까.”
이제야 상황이 이해된다.
가슴이 뭉클하며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마른 비는 활짝 웃었다.
“나도 백수교에게 볼일이 있어. 오스트갈을 치기 전에 그놈들부터 손봐주자.”
마른 비는 식구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중원에 나가면, 온 천하가 우릴 주목할 거야.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겠지만… 어떤 시련이 닥쳐오든 함께 헤쳐 나가자.”
마른 비의 눈길이 북쪽을 향했다.
“와족, 중원으로 간다.”
햇살이 하얗게 쏟아지며 전사들을 비추었다.
별비가 ‘놀고들 있네.’라며 구시렁대자, 마른 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삐로롱, 삐롱!”
독특한 울음이 바람을 타고 번졌다.
창공을 날아온 새 한 마리가 어두운 골짜기로 진입했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새카만 협곡.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기운이 새어 나오는 골짜기는 지옥의 입구 같았다.
“삐로로롱…!”
협곡 여기저기엔 집채만 한 쇠말뚝이 박혀 있었다.
기괴한 형상의 짐승들이 말뚝 주위를 서성였는데, 피부가 벗겨진 놈부터 뿔이 여러 개인 놈, 비정상적으로 근육이 발달한 놈까지 제각각이었다.
“삐이이…….”
새가 두려운 듯 몸을 움츠렸다.
새의 가슴과 눈 부위는 밝은 하늘색이었고, 그 외의 털은 은빛이었다.
운남에선 어깨걸이 풍조라고 부르며, 중원에선 극락조라고 불리는 새.
마른 비가 백의 서원에서 구해준 녀석이 틀림없었다.
“삐롱, 삐롱.”
지상을 배회하는 야수들이 풍조를 올려다봤다.
짐승들의 외형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눈이 피를 머금은 것처럼 빨갛다는 점.
풍조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을 꾹 감더니, 앞만 보며 날았다.
전속력으로 협곡을 파고든 풍조는 마침내 찾아 헤매던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삐아아악!!”
흰 수리의 울음이 협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막대한 자연기가 치솟으며 검은 기운을 밀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검은 기운은 원상복구 됐고, 설산의 지배자는 맥없이 거꾸러졌다.
“대단하군. 이것이 정녕 야생에서 홀로 큰 짐승이란 말인가.”
피, 가죽, 뼈…!
짐승의 사체로 쌓아 올린 산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무릎에 팔을 괸 그는 볼을 주먹 위에 얹은 채 하얀 깃이 몸부림치는 걸 지켜봤다.
“후욱, 훅…!”
하얀 깃이 숨을 내쉴 때마다 대기가 흔들렸다.
안간힘을 썼지만, 하얀 깃은 날아오르지 못했다.
아니, 지금 있는 곳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검은 기운도 문제지만, 하얀 깃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건 날개와 몸통에 꿰인 검은 쇠사슬이었다.
“삐아아악!”
사내는 미소를 띤 채 하얀 깃이 울부짖는 걸 지켜봤다.
“……!”
사내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하얀 깃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멀리, 이쪽으로 접근 중인 풍조를 발견한 것이다.
하얀 깃은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의지를 발했다.
〔어떻게 여기에…! 아이야! 나가라! 여기에 들어오면 안 돼!〕
풍조는 흠칫했지만,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풍조가 다가올수록 하얀 깃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능이 발현된 녀석이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여긴 위험해! 당장 도망치란 말이다!〕
그러다가 하얀 깃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외쳤다.
〔여기서 나가라! 그리고 운남으로 가! 너의 말을 알아듣는 인간들이 있을 것이다! 마른 비! 혹은 저녁노을이란 인간을 찾아라! 그리고 내 말을 전해!〕
하얀 깃은 자신이 이곳에 와서 본 것들을 필사적으로 전했다.
그리고 희망을 걸었다.
풍조가 협곡 바깥으로 나가기를.
와족에게 이곳의 위치를 알려주길 말이다.
“삐로로롱!”
풍조가 알았다는 듯 울자, 하얀 깃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새카만 기운에 둘러싸인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괴물이 있다니! 이건 예상을 한참이나 넘어선다! 너무 위험해…!’
하얀 깃의 시선이 짐승의 산 아래를 향했다.
거기엔 나신으로 서 있는 옥예린이 있었다.
자신과 달리 아무런 제지가 없음에도 옥예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개가 스민 듯한 눈동자로 멍하게 서 있을 뿐.
그건 마치 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보였다.
〔미안하구나, 아이야……. 내 생각이 짧았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하지만 난관을 극복할 방도는 반드시 있는 법.
하얀 깃은 실책을 머리에서 지우고, 현실에 집중했다.
하얀 깃이 풍조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이, 이런…!〕
하얀 깃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풍조.
그 새가 남자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삐로롱, 삐롱!”
야수들을 보며 겁을 먹은 것과 달리 풍조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사내는 풍조의 말을 알아듣는 듯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나? 그래서 네가 한동안 보이지 않았구나.”
사내가 상처투성이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섬세한 손길로 풍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왕이라면 본교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놈이 아닌가. 한데 흑상에 잡힌 너를 구해줘?”
어둠 속에서 새하얀 이가 보였다.
스산한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얀 깃이 날개를 움찔댔다.
“좌호법……. 본신의 힘은 형편없지만, 동조율만큼은 놀라운 놈이었거늘. 옹개를 죽인 여인도 수왕이란 놈의 식구가 아닌가.”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구부정했던 허리가 펴지자, 장대한 육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탄탄한 근육은 마른 비의 육체를 보는 듯했다.
“유쾌하구나! 참으로 재미있어! 자… 그럼 이제 저놈을 어쩐다?”
사내의 눈길이 하얀 깃을 향했다.
검은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눈동자를 보는 순간, 하얀 깃은 등줄기를 긁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아아……. 이걸 어떻게 해야….’
사내가 한 발 한 발 다가올수록, 하얀 깃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후(後)
청명한 하늘과 푸른 물결.
지평선 끝까지 펼친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 속이 탁 트이는 듯했다.
파도가 선체를 두드릴 때마다 기분 좋은 울렁임이 번진다.
호화로운 복장을 한 사내가 뱃전에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후우……. 드디어 출발이군요.”
사내는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풍채가 좋았다.
하얀 피부에 귀태가 나는 얼굴.
옷부터 흘리는 분위기까지,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남자였다.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사내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도 거한이란 소릴 들을 만한 덩치였지만, 지금은 옆에 있는 남자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근육.
육체는 위협적인데, 풍기는 분위기와 인상은 더없이 온화하다.
말을 건 사내와는 다른 측면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남자였다.
“대협은 무슨.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래도.”
대협이라 불린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말을 건넨 사내 입장에선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강호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외모가 문제다.
실제 나이는 쉰 중후반일 텐데, 겉으로 보기엔 자신과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아저씨보다는 대협이라고 부르는 게 훨씬 편했다.
“잘 안 됩니다, 그게. 그냥 대협으로 하죠.”
사내가 대협이란 호칭을 밀어붙일 때였다.
병사 한 명이 뛰어오며 외쳤다.
“제독! 출항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명을…!”
“대기하라. 대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사내는 병사를 물린 뒤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란 바… 아, 혀가 꼬이는군요. 너무 어릴 때 운남을 떠나는 바람에….”
사내는 과거의 추억을 되새길 겸 마른 비란 이름을 온전히 불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어에 익숙해진 혀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만하지. 벌써 이십 년 전인가?”
마른 비가 부드럽게 웃으며 사내를 돌아봤다.
“제가 열두 살 때니까, 정확히 이십이 년 전이네요.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연왕(燕王)의 운남 정벌.
대리와 곤명, 좀 더 확장된 몇몇 도시에 국한된 일이었지만,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마른 비는 곤명으로 달려갔고, 명의 장수에게 포획된 아이들을 발견했다.
연왕의 체면 때문에 사서엔 다르게 기록됐지만,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명군을 때려눕혔던 남제의 위용을 기억한다.
그에게 살려달라고 벌벌 떨던 제국 병사들의 모습도.
“감사하긴. 나도 놀랐어. 어린 꼬맹이가 거세를 자청하고 황실로 끌려갈 줄이야. 풀려날 수도 있었는데,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사내는 마른 비에게 구원을 받았음에도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되길 원했다.
정화(鄭和).
명의 태감(太監)이자 전략가로 이름 높은 사내가 멋쩍게 웃었다.
“중원에 나가고 싶었거든요. 혼혈에 회교도(回敎徒) 출신인 저로선 운남 생활이 끔찍했습니다. 명 황실에 들어갈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연왕 전하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먼 과거의 일이다.
이제는 연왕에서 영락제(永樂帝)가 된 사내가 벌인 일.
그의 이야기가 나오자, 마른 비는 자신을 휘하에 두고자 했던, 당돌한 꼬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체였나, 이름이? 고 녀석, 어릴 땐 귀여웠는데 왜 그렇게 자란 거야? 피는 어디 안 가나봐. 제 아버지를 꼭 닮았어.”
정화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죽여 외쳤다.
“대협! 제발…! 명색이 제독인데 그런 말 듣고 가만있으면 난리가 난단 말입니다! 안 그래도 대영반이 절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정화는 울상이 돼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마른 비는 또 한번 정화를 기겁하게 했다.
“금의위 걔네 사냥개부터 시작한 놈들인 건 알지? 표금산도 그렇고, 거기 수장들은 하나같이 왜 그래?”
마른 비는 그치지 않고 덧붙였다.
“아저씨가 잘못한 거야. 상우춘 대장군에 이어 강무재 아저씨까지……. 대체 몇 명을 죽인 거야? 그러니 그런 놈들을 주변에 두지.”
여기서 처음에 나온 ‘아저씨’란 태조(太祖)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정화는 아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 아아…….”
마른 비만큼 야생에의 적응력이 뛰어나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 사람이 없다.
그래서 황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초청한 것인데….
“이러다 저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정화가 저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을 때, 마른 비가 말했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슬슬 출발하자고. 나도 목숨 걸고 나온 거야. 아내가 가지 말랬는데 몰래 나온 거란 말이야. 나중에 집에 가면 맞아 죽을지도 몰라.”
수십 년간 하도 싸돌아다녀서 노을은 이제 그러려니 했다.
족장 자리를 물려준 뒤로는 함께 여행을 했는데, 이번엔 항해라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배를 싫어하니까.
같이 갈 수 없으며,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드물게 반대를 한 것인데, 마른 비는 그걸 무시하고 몰래 나온 것이었다.
“하아… 그러죠. 가면서 이야기나 들려주세요. 살신전이나 천인회 토벌전 등등…. 궁금한 게 많습니다.”
정화의 말투는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음? 백… ‘으응’한테 다 듣지 않았어?”
마른 비는 이름을 말하려다가 황급히 그 부분의 발음을 뭉갰다.
명 황실이야 알 바 아니지만,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해야 했으니까.
「월주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죠. 몇 달 전에도요. 그래도 현장에 있던 분한테 듣는 것만 하겠습니까?」
정화는 아예 전음을 사용했다.
마른 비는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몇 달 전? 호오… 아직 손 안 털었나 보네?”
정화는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서 병사들에게 외쳤다.
“긴 항해가 될 것이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도록! 닻을 올려라! 출항한다!”
예순두 척의 대선과 수백 척의 전투함, 수송선…….
병사들 외에도 수부, 기술자, 의원 등 탑승 인원은 무려 이만 팔천 명에 육박했다.
정화의 지휘를 받는 그들은 원정을 위한 인류 최초의 대 함대였다.
“와~ 굉장한데?!”
마른 비는 원정대를 지키고, 현지에 적응케 하며,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조력자였다.
강호에서 수십 년간 전설 같은 일화를 만들어낸 남제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원정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우, 우웨엑…!〕
하지만 별비는 온통 체면을 구겼으니, 바로 뱃멀미 때문이었다.
뱃전에 널브러진 채 먹은 걸 게워내는 백호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야야. 들어가서 자. 그러게 왜 여기까지 나와서는…. 말했잖아. 강이랑 바다는 다르다고.”
별비의 등을 두드려주며, 마른 비는 오래전 처음으로 중원에 나간 날을 떠올렸다.
‘신기해. 그때처럼 가슴이 뛰네?’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것이 마른 비를 키웠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그의 본질은 열여덟 살에 처음 중원으로 나갈 때와 똑같았다.
‘궁금해. 이번엔 또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까?’
시원한 바람이 더 넓은 세상으로 가라는 듯 등을 떠밀어주었다.
마른 비는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활짝 미소 지었다.
<혼세록 남천제 편 完>
드리는 말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드디어 첫 글을 완성한 초보 글쟁이 기백입니다.
웹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일단 써보자는 생각에 키보드 앞에 앉았던 날이 생각나네요. 최선을 다해 썼는데도 아무도 봐주지 않아서 막막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포기하지 않고 쓰다 보니 이렇게 연재를 하게 되고, 완결을 내는 날이 오네요.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기쁩니다.
가장 먼저 독자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아직 전업 작가를 할 만한 상황은 못 되어서 근무와 글쓰기를 병행 중인데, 지칠 때마다 독자님들의 관심과 격려 덕분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꼭 전업 작가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때는 충분한 시간을 쏟아서, 더욱 정제된 글로 자주 찾아뵐게요.
아울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연재 중단은 없다는 것을 약속드립니다. 휴식기는 있을지언정 구상한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을 때까지 꾸준히 달려가겠습니다.
혼세록을 쓰자고 마음먹은 건 영화 어벤져스가 유행할 때였습니다. 동일한 시대, 같은 세계관에서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얽히는 게 매력적이더라고요. ‘동양에도 풍부한 소재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론 한국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장르와 독자층, 그리고 지리적 협소성 때문에 무협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혼세록을 읽다 보면 많은 분들께서 아마 한백림 작가님의 글을 떠올리셨을 것 같습니다.
많은 영향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어벤져스와 같은 형식을 띠는 장르소설이 있는지를 찾던 중에 알게 됐고, 팬이 되었거든요.(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추천 드립니다. 정말 재밌어요!)
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에 본 소설과 영화들이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알 만한 대사 등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 작품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표시라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천제 편은 혼세록의 오프닝에 해당합니다. 전체적인 세계관과 인물, 사건 등을 소개드리는 것이라고 하면 적합할 것 같네요. 마른 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며, 이어질 후속작들에서 간접적으로 다뤄질 예정입니다.
이 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기약 없는 글쓰기를 반복했는데, 제 글을 독자님들께 소개해드릴 수 있도록 해주신 스토리야 출판사 관계자분들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불투명한 길에 뛰어들 때 마음껏 해보라고 격려해주신 부모님과, 옆에서 항상 힘을 준 수, 연참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던 민과, 난생처음 보는 무협에 당황하면서도 끝까지 읽어준 필과 규도요.
네, 저는 지금 나 홀로 시상식 중입니다. 완결이 너무 감사하고 기쁘네요.
참신한 내용과 독자적인 세계관, 틀에 박히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처음 쓰는 글이다 보니 미흡한 점이 많았는데, 아껴주신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저는 조금 쉰 뒤에 차기작 ‘살신자’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독자님들께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20년 3월 5일 기백.